목포항 여객 너미널, 여객선의 출항 시간을 기다리며 무심하게 터미널 청사를 지켰던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가 설날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급하게 배에 올랐다. 이들의 얼굴엔 금세 생기가 돈다. 손에 손에 하나씩 과일 상자나 술상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 마음은 벌써 고향집 안방에 가있는 듯하다.
이윽고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배는 거친 기계음을 쉴새없이 토해내며 미끄러지듯 항구를 빠져 나간다.
오분쯤 지났을까. 배가 제 속도를 내기도 전에 갑판 뒤편에선 술판이 벌어진다. 해삼과 가오리를 썰어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이 그만인가 보다. 형님 동생들이 만났으니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캬~ 하고 술을 넘기는 소리와 엔진 소리가 뒤엉키고 저마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고향 출신인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에 당선돼 여느 설보다 기분이 좋다는 얘기, 그리고 부산에선 분위기는 좋았지만 직접 표와 연결되지 않아 안타까웠다는 얘기 등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객지에서 생활하면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다는 이들은 고향발전에 대한 기대도 빠뜨리지 않는다.
하의도 항로에만 19년째 다닌다는 정형선 선장ㅇ, 그는 지난 1986년 김대중 선생이 연금에서 풀려나 하의도를 방문했을 때 보선사 자격으로 안내한 적이 있다. 정 선장은 김 대통령이 위기에 선 나라 경제를 슬기롭게 회복할 수 있으리란 강한 믿음을 내비쳤다.
모처럼의 고향길, 대통령의 고향 사람들의 타고 있는 배는 마침내 목적지인 하의도에 도착했다.
목포에서 뱃길로 2시간, 점점이 흩어진 다도해 사이로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는 섬. 전라남도 시안군 하의면. 15대 대통령인 김대중의 고향이다.
섬 주민들은 마치 연꽃이 물에 피는 형상을 한 하의도에서 언젠가는 큰 인물이 날 것을 기대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아왔지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당은 불과 11km에 불과해 가난은 대를 이어 전해졌다고 한다.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3공화국 때 하의도는 박정희의 최대 정적인 김대중의 고향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외의 그늘 속에 묻혀 있어야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얼마되지 않는 지원금마저도 오기로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의도에서 가장 크다는 대리의 마을 안길은 진흙탕일 때가 더 많았고 초가집도 사라진 지 얼마되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1924년 1월 16일 그곳 후광리 97번지에서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사형제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삼백평 남짓한 그대의 생가 터는 지금은 마늘밭으로 변해 있다.
섬소년 김대중은 염전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소년 김대중은 아버지에게서 올바른 사고력을 물려받았다. 또, 어머니의 가르침은 그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김대중의 나이 예닐곱 살 대의 일이다. 아버지를 기쁘게 해줄 마음으로 마을에 들른 엿장수에게서 담뱃대를 훔쳤다가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얻어 맞았다. 어머니 장씨는 애들이 잘못을 저리르게 처신했다며 엿장수를 크게 꾸짖었다. 훗날 그는 <나의 삶 나의 길>이란 자서전에서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히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10살 되던 해 김대중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덕봉강당>이라는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마을의 조은 골목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다 보면 지금도 언덕 위에 서당의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버지의 6촌 동생인 초암 김공빈 선생이 세웠다는 이 서당에서 김대중은 두 달 만에 천자문을 터득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모르는 글자가 나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그 뜻을 이해할 때까지 매달렸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부터 그는 역경을 이겨내는 집념을 스스로 터득했는지 모른다.
“총재가 글을 배울 때 글을 모르면 밥 먹으러도 안 가고 책도 안 덮어 놓고 기어코 그 놈을 알아 놓고서 가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그랬고.”
하의면 대리의 한 노인의 증언이다.
그는 일 년 동안 서당에 다닌 뒤 하의 보통학교 2학년에 들어간다. 그리고 고학년이 되자 목포 북교 소학교로 전학을 한다.
높은 교육열과 강직한 성품을 가진 그의 어머니가 맹모 삼천지교를 실천한 것이다. 가산을 팔아 목포로 이사를 나온 장씨는 선창가 만호동에 여관을 차리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나선다. 장씨는 여관 2층에 공부방을 따로 마련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는 북교 소학교에서도 공부를 잘 하고 똑똑한 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키가 크고 통솔력이 뛰어났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고, 특히 작문을 잘했다고 한다.
5학년 때 전체 일흔세 명 가운데 2등으로 수료했으며, 6학년 때는 예체능 과목까지 만점을 받아 전교 1등으로 졸업을 한다. 이때가 일제의 강압 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39년이다.
30회 졸업 동기생으로는 한때 야당 생활을 같이 한 임종기 전 국회의원이 있으며, 33회 출신인 권노갑 전 의원은 목포상고를 거쳐 평생 김대중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인연을 맺는다.
그는 18살 나이로 목포상업학교에 진학하는데 일본인과 조선인이 반반 정도였던 164명 가운데 당당하게 수석으로 합격을 했다. 목포상고에 남아 있는 학적부를 보면 그의 성격은 담백하고 활동적이고 이해력과 사고력이 우수하며 언행은 명석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패기있고 모범적인 인물이며 비판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취업반인 1, 2학년 때는 1등과 4등을 유지하다가 진학반으로 바꾼 3학년 때는 2등, 4학년 때는 8등, 그리고 졸업반인 5학년때는 39등으로 내려앉는다.
고학년에 오르면서 개인적인 갈등과 함께 당시 상황에서 비롯되는 번뇌를 엿볼 수 있다. 그런 그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이 줄곧 반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실력만큼은 인정을 받고 있었다.
갈등과 번민 속에 1943년 가을 김대중은 공식적으로 최종 학력이 되는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한다. 상업학교를 졸압한 그는 일제의 징병을 피해 진학을 포기한다. 대신 목포 상선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경리 사원으로 근무하다 해방을 맞은 청년 김대중은 귀속 재산이 된 목포상선회사를 관리하다 곧 회사의 대표가 되어서 사업 수완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1946년엔 흥국해운을 창업하고, 1948년엔 전남선박 목포조합장, 1951년엔 목포운수 사장을 지낸다. 그리고 그해 10월엔 목포일보를 인수해 어엿한 토착 사업가가 된다. 당시엔 육상 교통이 좋지 못해 해상 운송이 각광을 받았으며, 그는 화물선 사업을 벌여 꽤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사업 영역이 부산까지 미쳤다고 한다.
해방 뒤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몽양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곧바로 탈퇴한다. 그런데 이때 건국준비위원회에 몸 담았던 것이 그에게 평생 색깔론의 꼬리표가 따라 붙게 만드는 뼈아픈 이력이 되고 만다.
후일 그는 “나는 정직하게 말해 공산주의자가 무엇인지 몰랐다. 다만 조국을 건설한다는 희망과 의욕에 불타 건준에 참여했었다"고 밝힌 바 있다.
1950년 6.25가 터지자 신성모 당시 국방부 장관은 전선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국군이 곧 승리할 수 있다는 거짓선전을 되풀이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며 안심하라는 라디오방송 담화를 발표했다. 서울에 머물러 있던 김대중은 여관방에서 대통령 담화를 듣는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미 대전으로 옮겨간 뒤였다.
목포까지 천리길을 걸어서 탈출했던 고통은 그의 앞날에 닥쳐올 죽음의 위협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족과 이틀밤을 보낸 그는 지역인민위원회에 연행돼 형무소로 보내진다. 그러던 9월 18일 인민군은 사람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김대중은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처형장까지 사람을 실어 나르던 차가 고장이 나고 때마침 밀리던 인민군은 서둘러 퇴각하고 말았다. 형무소에 갇힌 200명 가운데 100여 명이 죽음을 당한 뒤였다.
인민군 정규군이 사라진 뒤에도 죽음의 위협은 그를 계속 따라 다닌다. 그는 지방 공산당원들을 피해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고 생애 첫 번째 사선을 넘는다. 1952년 전쟁의 와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서 부산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주요 야당 인사들을 국제 공산당원으로 날조해 강제 연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이 그것이다.
그는 이때 정치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바르지 못한 정치가 국민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를 알수 있었던 것이다.
6.25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부패, 실정은 그를 정치판으로 끌어들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부산에서 화물 운송사업에 손을 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치라는 바다에 항해를 나서게 되고 그의 인생 항로는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그는 29살 때 목포에서 3대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첫 번째 결과는 패배였다. 이후 그는 민주당에 입당해 장면 박사한테서 본격적으로 정치를 배우기 시작했고 선거구를 강원도 인제로 옮긴다. 같은 당에 소속된 사람이 목포에서 의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제에서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 재도전 하지만 자유당의 후보등록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금대중은 선거 부정을 호소할 생각으로 인근에 있는 군부대를 찾아간다. 그러나 사당장은 출타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사단장은 박정희였다. 그는 59년 보궐선거 그리고 5대 총선에서도 잇따라 패배의 쓴잔을 마신다.
이 과정에서 첫 부인 차용애 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가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던 차용애. 그녀는 끝내 남편의 정치적 성공을 보지 못한 채 34살의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다.
그는 1961년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당선의 기쁨을 맛본다. 상대 후보의 부정 선거로 얻은 3전4기의 인간승리였다. 그러나 당선의 기쁨을 누린 건 이틀뿐. 사흘 후에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군부 세력은 그의 당선을 박탈해 버렸다. 김대중은 국회의사당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쿠데타 세력에 끌려가 부정부패와 용공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고 3개월 만에 풀려나올 수 있었다.
1962년 암담하던 시절 그는 평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친구인 지금의 부인 이희호 여사와 결혼을 한다. 그녀는 그때 YMCA 전국 연합회 총무이사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혼한 지 10일 만에 다시 민주당 반혁명 사건에 연루돼 한 달 동안 구금생활을 하고 정치활동 정화법에 묶여 기약없는 날을 보내게 된다.
정치활동 정화법에서 해금된 김대중은 군정 기간중인 1963년 11월 6대 총선에서 목포를 지역구로 출마해 당선된다. 두 번째 당선이면서 처음으로 국회에 등원하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때 권노갑 전 의원이 그의 비소로 참여한다.
그는 달변과 공부하는 정치인으로 단숨에 정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6대 국회에서는 차관 도입과 경제개발의 문제점 등을 날카롭게 추궁하면서 경제통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특히 1964년, 동료인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 동의안 처리 대는 무려 5시간 19분 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의사 진행을 지연하는 필리버스터를 해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966년 7대 총선은 그에게 잊혀지지 않은 선거이다. 박정권은 그를 낙선시키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선거 운동 기간에 박정희가 두 번이나 목포에 내려와서 국무회의를 소집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공화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목포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대학도 지어주겠다는 장미빛 청사진을 제시했다. 박정희는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상대가 김대중이 될 것이라는 직감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당은 여당의 갖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총력전을 펼친다. 양측은 마치 전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선거를 치렀다.
“선거 막바지에 접어들자 엄청난 공포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유네스코 세계기구에서 이렇게 험악한 공포 분위기에서 치르는 선거는 있을 수 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전남도의회 박용택 의원의 말이다.
국내외 언론의 관심도 당연히 목포에 쏠려 있었다.
일본 NHK의 한 기자는 당시로서는 거금인 천 달러를 선거 자금으로 김대중에게 전달했다가 정중하게 거정당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 기자는 박정희에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은 김대중뿐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2천여 표 차이로 신승하게 되고 거물 정치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개헌에 필요한 117석을 훨씬 넘는 130석을 확보하고 박 정권은 김대중이 그렇게도 경계했던 3선 개허의 마각을 드러낸다. 역사는 어두운 쪽으로 후퇴했고 미래에 대한 어떤 예측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68년 김대중은 정치적 동지이자 영원한 맞수였던 김영삼과의 첫 대결인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신다. 그러나 실패는 병가지상사라 했던가. 1970년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이 세 사람은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든다.
1차 투표에서 관반수 득표자를 내지 못하고 김영삼에게 뒤진 그는 2차 투표에서 이철승의 도움을 받아 역전승을 이끌어 낸다. 이때 김대중 후보측은 우리 정당 정치사상 처음으로 인물 사진을 붙인 피켓을 들고 나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목포에서 올라왔던 사람들이 시민회관 근방에 모여 있었는데 전부 사진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 분이 시민회관으로 들어오는 사이에 시민회관 근방이 전부 김대중 사진 일색이었습니다. 그때 연호도 김대중, 김대중 이었지요. 하여튼 그것이 선풍적인 인기르 fdjedjT지요. 피켓을 들고 나오니깐 김영삼 참모 진영이 기가 죽어 버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