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타인벡/김병철 옮김
그들은 하이웨이에 서서, 물에 온통 잠긴 들판과 암적색 화차 덩어리와 천천히 흐르는 물 속에 깊이 잠겨 있는 트럭과 자동차들을 뒤돌아보았다. 그렇게 그들이 서 있는 동안에 또 안개처럼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서 가야지."
하고 어머니가 서둘렀다.
"로자샤안, 너 좀 걷겠니?"
"좀 비틀비틀해요. 얻어맞은 것만 같아요."
아버지가 불평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가긴 가는데 어디로 간다는 거지?"
"글쎄 말이유. 어서 로자샤안이나 붙잡아 줘요."
어머니가 딸의 오른팔을 붙잡자, 아버지는 왼팔을 붙잡았다.
"물이 안 난 데로 가야 해요. 이틀 동안이나 벌써 젖은 옷만 입고 있지 않았수?"
그들은 천천히 하이웨이를 걸어갔다. 길가에 있는 개울에서 세차게 흘러가는 물소리가 들렸다. 루디와 윈필드는 발로 길바닥의 물을 튕기면서 나란히 걸어갔다. 그들은 천천히 길을 걸어갔다. 하늘이 차차 어두워지고 빗발이 심해졌다.
하이웨이에는 왕래가 완전히 두절되었다.
"어서 빨리 가야지."
하고 어머니가 다시 서둘렀다.
"이 애가 너무 젖으면, 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잖아요."
"빨리 가라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라는지 난 모르겠는데."
아버지가 또다시 투덜댔다.
길은 개울을 따라 구부러졌다. 어머니는 근처의 땅과 물에 침수된 밭을 둘러보았다. 길에서 멀리 떨어진 왼쪽, 다소 기복을 이루고 있는 언덕 위에 비에 젖어서 꺼멓게 보이는 헛간 한 채가 서 있었다.
"봐요!"
어머니가 반색을 했다.
"저길 봐요! 저기 저 헛간은 젖지 않았을 거에요. 비가 멎을 때까지 저기 가 있습시다."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헛간 주인한테 내쫓기게 되면 그 땐 어떡한다?"
길가 저만큼 앞에서 빨간 점이 하나 루디의 눈에 띄었다. 그녀는 그 쪽으로 달려갔다. 들판에 홀로 핀 쪼글쪼글 시든 제라늄이 한 그루 있고, 비에 두들겨 맞은 꽃이 한 송이 달려 있었다. 그녀는 그 꽃을 꺾었다. 꽃잎을 한 장 살며시 따서 콧등에 갖다 붙였다. 윈필드가 보고 달려왔다.
"나두 하나 줘."
"안돼! 다 내 거야. 내가 찾아 냈어."
그녀는 빨간 꽃잎을 또 한 장 따서 이마에다 붙였다. 조그맣고, 선명하게 새빨간 하트 모양의 꽃잎이었다.
"응, 루디! 나에게도 하나 줘. 줘, 빨리."
그는 루디 손 안의 꽃을 뺏어채려다가 손이 빗나갔다. 루디는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서 버렸으나, 곧 입술이 실룩거리고 눈에서 눈물이 솟아 나왔다. 다른 식구들이 뒤쫓아왔다.
"아니, 너 무슨 짓이냐?"
어머니가 말했다.
"도대체 뭘 어쨌기에 그래?"
"저 새끼가 내 꽃을 빼앗으려고 했지 뭐야."
윈필드가 흐느끼면서 말했다.
"난― 그저 하나만 달랬는데―콧등에 붙이려구."
"한 장만 주렴, 루디야!"
"자기가 찾으면 되잖아. 이건 내 거야."
"루디야! 하나 주지 못해."
루디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위협을 느끼자 전술을 바꿨다.
"이봐."
하고 그녀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 장 붙여 줄께."
어른들은 계속 걸어갔다. 윈필드가 그녀 앞에 코를 내밀었다. 그녀는 꽃잎을 한 장 혀로 적셔서 아무렇게나 코에다 갖다 비벼댔다.
"요녀석."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윈필드는 손가락으로 꽃잎을 찾아서 자기 콧등에다 비벼댔다. 그들은 다른 식구들에게 떨어질세라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갔다. 루디는 이젠 재미가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이봐, 더 줄께. 이마에 붙여라."
길 오른쪽에서 쫙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빨리 가자. 큰 비가 온다. 이 울타리로 빠져 나가자. 그게 가깝겠어, 자, 어서! 기 운을 내, 로자샤안."
그들은 딸을 거의 끌다시피하면서 도랑을 건너 손을 잡고 울타리를 빠져 나갔다. 그러자 그 때 폭풍우가 내리쳤다. 빗발이 굉장했다. 그들은 기를 쓰며 진창속을 저벅저벅 밟고 약간 경사진 언덕을 기어올랐다. 검은 헛간은 비 때문에 거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비는 한바탕 휘몰아쳐 수면에 물창을 튕기고, 점점 더 몹시 불어대는 바람에 몰려 빗발을 저쪽으로 몰고 갔다. '샤론의 장미'는 자주 발이 미끄러져 양친의 부축을 받으며 질질 끌려가야 했다.
"여보! 이 앨 업을 수 없겠수?"
아버지가 허리를 굽히고 딸을 안아 올렸다.
"아예 펑 젖었구나. 윈필드―루디! 먼저 뛰어가라."
그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비에 흠뻑 젖은 헛간에 이르자 비틀거리며 열려 있는 한쪽 끝으로 뛰어들었다. 그 곳에는 문도 달려 있지 않았다. 둥근 가래 하나, 부서진 경작기 하나, 쇠바퀴 하나 등 녹슨 농기구가 몇 개 뒹굴고 있었다. 비는 지붕을 몹시 두드리고, 휘장을 친 듯 시야를 가렸다. 아버지가 기름이 밴 상자 위에 조심스레 '샤론의 장미'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아이구 죽겠다!"
"아마, 안에 건초가 있을 거예요. 봐요, 문이 있군요."
어머니가 녹슨 돌쩌귀가 달린 문을 활짝 열었다.
"건초가 있구나."
어머니가 소리쳤다.
"자, 들어와 어서들."
안은 캄캄했다. 판자 짬에서 희미한 광선이 새어들어왔다.
"누워라, 로자샤안."
어머니가 말했다.
"누워서 좀 쉬어라. 옷을 말릴 방법을 찾아볼 테니."
윈필드가,
"어머니!"
하고 불렀지만, 요란하게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때문에 그 밖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뭐냐? 왜 그러냐?"
"저것 봐! 저 구석."
어머니가 그 곳을 바라보았다. 컴컴한 구석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반듯하게 드러누워 있는 남자와 그 옆에 눈을 크게 뜨고서 새로 온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는 소년. 그녀가 보고 있자니까 소년은 천천히 일어나서 이쪽으로 걸어와 목쉰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닌 여기 주인이세요?"
"아니."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비를 피하러 들어왔을 뿐이야, 딸애가 병이 나서. 얘야, 젖지 않은 담요 없니? 이 애 옷을 벗기는 데 쓸 수 있을 만한?"
소년은 구석으로 되돌아가더니 더러운 깃털 이불을 한 장 가지고 와서 어머니에게 주었다.
"고맙다. 이 양반은 웬일이냐?"
소년은 목이 쉰 단조로운 소리로 말했다.
"처음엔 병이 났는데―이젠 먹질 못해서 저래요."
"뭐라구?"
"굶어 죽을 것 같애요. 목화밭에서 병이 났어요. 엿새나 먹질 못했거든요."
어머니는 구석으로 걸어가서 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오십 세 가량의 사나이, 턱수염이 난 얼굴은 홀쭉 야위었고 뜬 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이 어머니 옆에 따라와 섰다.
"네 아버지냐?"
하고 어머니가 물었다.
"예! 배가 고프지 않다느니, 방금 먹었다느니, 그런 소릴 하며 내게만 먹을 걸 사 주시더니, 이젠 기운이 다 빠져서 움직이시지도 못해요."
지붕을 때리던 빗발이 좀 약해졌는지,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도 이제는 조용히 달래는 듯한 소리로 변했다. 핼쑥 야윈 사나이가 입술을 움직였다. 어머니는 그 옆에 무릎을 꿇고 귀를 기울였다. 또다시 입술을 움직인다.
"그래."
어머니가 말했다.
"넌 이젠 안심하고 있어. 아버진 이젠 나으신다. 우리 딸의 젖은 옷을 벗길 때까지 좀 기다려다오. 응?"
어머니는 딸 있는 데로 돌아와서,
"자, 그 옷을 벗어라."
하고는 깃털 이불을 펴서 딸의 몸이 보이지 않게 가리었다. 그리고 딸이 옷을 다 벗자, 어머니는 그 깃털 이불로 몸을 싸 주었다.
소년이 또다시 옆으로 다가와서는 사정하듯 말했다.
"난 몰랐어요. 벌써 먹었다느니, 배가 고프지 않다느니, 아버지가 그런 소리만 했거든요. 어젯밤 내가 나가서 유리창을 깨고 식빵을 좀 훔쳐다가 아버지에게 드렸더니 모두 토해 버리구, 그 후부터는 전보다도 기운이 더 빠지셨어요. 수프나 우유를 드려야겠는데, 아주머니, 우유 살 돈 좀 있으세요?"
"가만 있거라. 걱정 안 해도 좋아.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까."
갑자기 소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버진 정말 죽어요! 정말 굶어 죽어요!"
"조용하거라."
어머니는 죽어 가는 사나이를 막연히 지켜 보고 있는 아버지와 존 백부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 깃털 이불로 몸을 싸고 움츠리고 앉아 있는 '샤론의 장미'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눈은 '샤론의 장미'의 눈을 지나쳐 앞을 보고 있다가 다시 딸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두 여인은 서로 상대방의 눈 속을 깊이 들여다 보았다. 통하는 바가 있다는 듯이. 딸의 숨결이 가쁘게 헐떡거렸다.
"좋아요."
마침내 그녀는 말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줄줄 알았다. 이미 알고 있었어!"
어머니는 무릎 위에 깍지 낀 자기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샤론의 장미'가 속삭이듯 말했다.
"모두들―좀―밖에 나가 줘요."
빗발이 가볍게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몸을 숙여 손바닥으로 딸의 이마에 흩어져 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고는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다음 재빨리 일어섰다.
"자, 모두 저 헛간으로 나가요."
루디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자,
"쉬!"
하고 어머니가 말을 막았다.
"잠자코 나가 있어."
어머니는 그들을 모두 문 밖으로 몰아낸 뒤, 자기도 소년을 끌고 나가 삐거덕거리는 문짝을 닫았다.
잠시 '샤론의 장미'는 속삭이는 듯한 빗소리가 나는 헛간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지친 몸을 간신히 일으키고, 몸에 걸친 깃털 이불을 끌어당기며 천천히 구석으로 걸어가 사나이의 그 야윈 얼굴과 겁에 질려 말똥거리는 눈을 내려다보았다.
그 다음 그녀는 천천히 남자 옆에 몸을 눕혔다. 사나이가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샤론의 장미'는 깃털 이불 한쪽을 헤치고 젖을 꺼냈다.
"먹어야 해요."
그녀는 몸을 비틀 듯 더 가까이 다가가 사나이의 머리 뒤로 팔을 넣고 머리를 받쳐 주었다. 손가락은 부드럽게 사나이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쳐들어 헛간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모으고는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 줄거리 요약
오클라호마의 농민 조드 일가(一家)는 전국을 휩쓴 경제 공항의 여파로 살 길이 막연해지자 농장 지대인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그러나 그 곳은 이미 각지에서 흘러든 노동자들로 과일 따기 품팔이도 잡기 힘든 실정이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고용주들과 그 앞잡이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선교사 캐시가 주동이 되어 파업을 일으킨다. 그러나 캐시는 고용주의 앞잡이인 폭력단에게 살해된다. 그 장면을 목격한 조드가(家)의 장남 톰은 캐시를 죽인 남자를 살해하고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무르익은 포도송이처럼 커지고, 설상가상으로 농장에는 홍수가 밀어닥친다. 그런 와중에서 딸 로자샤안(샤론의 장미)은 사산(死産)을 한다. 그리고 강물이 범람하여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그녀는 아기에게 먹일 젖을 굶어 죽어 가는 한 나이 든 노동자에게 먹이며 신비로운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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