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그들의 삶이 평탄치 못한 것은 아마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조선시대에 이러한 주요한 대표적인 작가이자 사상가로 김만중과 허균을 들 수 있다.
허균이나 김만중은 모두 상층 사대부에 속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또한 진보적 의식을 소유한 비판적 지식인이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둘의 특징이다. 허균은 도학의 굴레를 벗어나 자연스러운 감정을 담은 문학을 주장했고, 김만중은 모방에 치우치는 한문학보다 나무꾼과 빨래터의 아낙네가 부르는 민요가 오히려 더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주장한 것이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뿌리는 같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서포 김만중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 그의 문학적인 사상을 중심으로 그의 근대적인 사상을 살펴보고, 비판해 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생애와 작품
작품은 작가의 세계관의 표현이라는 관점에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포 김만중(인조15년~숙종18년, 1637~1692, 字는 重叔, 시호는 文孝)은 아버지 김익겸이 정축호란 때 김상용을 따라 강화도에서 순절함으로써 유복자로 태어났다. 즉, 그의 가족이 정축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했지만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자 그의 부친 충정공 김익겸은 순절하고, 만삭이 된 어머니 윤씨는 서울로 귀향 가던 중 강화와 김포를 잇는 강을 건너는 가운데 배 안에서 만중을 출산했다. 어린 시절 교육은 윤씨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윤부인은 명문거족의 출신으로 지혜로웠다 한다. 일찍이 남편을 잃은 윤부인은 만기, 만중 두 형제를 데리고 친정으로 데려와 부친 참판공 '윤지'를 섬기고 안으로는 모친 홍씨를 정성껏 섬긴 효부인이기도 하다. 모부인은 고금에 드문 현부인으로 부친인 참판공이 별세한 후로는 친정의 생활도 어려워 침자(針子)로써 생활을 이어갔지만, 자식들의 학업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그들에게는 곤궁한 내색을 전연 감추었다고 한다. 특히 「소학」, 「사략(史略)」, 「당시(唐詩)」 등은 윤씨가 직접 가르쳤으며, 병자호란 후로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워 「맹자」, 「중용」등은 윤씨가 곡식을 많이 주고 사서 읽혔고, 「좌씨전」 한 질은 값이 너무 비싸 자식들이 감히 사달라고 하지 못하자, 윤씨가 베틀 가운데서 베를 끊어 사주었다 한다.
김만중은 현종 6년(1667) 29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38세 때까지 10년간 정언, 부수찬, 사서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이 기간이 그의 일생 중 가장 평온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30세 때는 그의 형 김만기가 정2품직에 오르고, 35세 때는 그의 질녀인 김만기의 딸이 세자빈(숙종비 인경왕후)에 책봉되는 등 영광의 세월이었다.
이후 환해의 풍파가 일어났다. 제18대 현종 초년의 1차 예송 논쟁이 서인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현종 15년에 2차 예송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이 해에 효종비인 인선왕후가 승하했는데,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조대비)의 복제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다. 「가례」에 의거,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면 조대비는 기년상, 차자로 보면 대공상복을 입어야 했는데, 남인은 기년설(朞年說, 1년 동안 상복 입음)을 주장하고, 서인은 소위 대공설(大功說, 아홉 달 동안 상복 입음)을 내놓았다. 왕은 서인의 설이 근거가 미약하다 하여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서인은 쇠락하기 시작하여 숙종 초에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이로 인해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 등 일파는 유배, 혹은 파직되었고, 김만중도 그 여파로 결국 삭직된다.
이때부터 5~6년간 남인의 집권 중에 영의정 허적(許積, 1610-1680)의 전횡으로 숙종의 노여움을 사는 가운데 그의 서자 허견의 역모가 탄로나자 허적은 사사되고 남인의 대다수가 연좌되어 유배 또는 파직된다.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이를 기점으로 서인은 재집권하게 되었으니, 김만중은 43세의 나이로 예조참판에 오르고 47세 때는 대사헌, 50세 때는 대제학에 올랐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신환국을 기점으로 서인은 남인을 극도로 탄압함으로써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가 무너진다는 점이다.
그는 숙종 13년(1687) 언사사건으로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즉 숙종은 혈통을 이을 자식이 없어 걱정하던 중, 인경왕후의 승하로 계비를 맞이한 인현왕후 민씨의 양해로 궁녀 장희빈을 후궁으로 맞게 되었고, 숙종 12년에는 장씨가 숙의가 되었다. 이것이 2차 당쟁의 실마리이다. 이후 장숙의는 정사에 참여함에 따라 지위와 권세가 드세게 되고 이를 기화로 재야의 남인들이 재차 등용을 꾀했고, 그녀의 오라비 장희재와 결탁, 득세를 시도했다. 여기에 장씨의 어머니는 일찍이 조사석의 비첩이었지만 조사석은 숙종 13년에 우상에까지 올랐고, 대신 영의정 김수항은 파직되었다.
이때 김만중은 숙종에게 조사석의 현달과 김수항의 파직의 부당함을 상소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샀는데, 당시 영의정 남구만, 예조판서 남용익을 비롯한 정원, 옥당(홍문관)의 신원의 보람도 없이 결국 숙종 13년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구운몽(九雲夢)」은 바로 이 선천 유배지에서 쓴 것이다. 그런데 장씨로부터 왕자 균(畇, 훗날 경종)이 태어난 국경을 맞아 숙종 14년에 다행스럽게 특사로 풀려났다.
그러나 숙종 15년 정월, 숙종은 균을 서둘러 왕자로 책봉하자 서인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 이에 숙종은 반대하는 모든 중신을 물러나게 하고, 송시열 김수항 등 서인의 영수들은 유배 중 사사되고, 김만중은 보사공신의 칭호를 삭탈 당했다. 이것이 소위 기사환국이다. 이에 김만중은 남해로 유배되고 거의 온 가족들이 절도로 귀양가게 되니 윤씨는 우수 끝에 그해 겨울 12월 22일 세상을 뜬다. 효자 김만중은 모부인의 장례에도 참예치 못하고 슬피 울다가 숙종 18년 4월 30일 56세를 일기로 외로이 숨을 거두었다. 남해 유배 3년의 시기에 비교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그의 저서 「서포만필」을 비롯, 「九雲夢」, 「謝氏南征記」 등의 소설을 완성했던 것이다.
2. 사상
(1) 「서포만필」에 나타난 김만중의 문학적 사상
「서포만필」은 조선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서포 김만중의 수필집이다. 중국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 중에서 의문되는 대목을 번역·해명하고 신라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명시(名詩)들을 비평하였다. 특히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을 평한 문장에서, 한국 사람이 국어를 버리고 남의 말을 배우고 있음을 개탄하고, 한문 문장에 비하여 한국 문학의 우수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정세로 비추어볼 때 놀랄 만큼 진보적이며 주체적인 탁견(卓見)이었다 하겠다. 서포만필에서 그의 진보적인 사상을 알 수 있는 구절은 이러하다.
우선 송강가사를 그가 평한 것을 보면 '송강(松江)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전후사미인가(前後思美人歌)는 우리나라의 이소(離騷)이나, 그것은 문자(文字)로써는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악인 (樂人)들이 구전(口傳)하여 서로 이어받아 전해지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칠언시로써 관동별곡을 번역하였지만, 아름답게 될 수 없었다. 혹은 택당(澤堂)이 소시(少時)에 작품이라고 하지만, 옳지 않다.'
'구마라습이 말하기를 "천축인(天竺人)의 풍속은 가장 문채(文彩)를 숭상하여 그들의 찬불사(讚佛詞)는 극히 아름답다. 이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단지 그 뜻만 알 수 있지, 그 말씨는 알 수 없다." 하였다. 이치가 정녕 그럴 것이다.' 이 부분은 번역으로 손상되는 문체에 대해 말하면서 국문사용에 대한 그의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이 말이요, 말의 가락에 있는 것이 시가문부(詩歌文賦)이다. 사방의 말이 비록 같지는 않더라도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다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가 있는 것은 유독 중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은 자기말을 버려 두고 다른 나라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거이다.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뭇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 하며 서로 주고 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하여도 그 진가(眞假)를 따진다면, 정녕 학사(學士) 대부(大夫)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다.' 이 부분은 국어로 쓴 시문(詩文)의 참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물며 이 삼별곡(三別曲)은 천기(天機)의 자발(自發)함이 있고, 이속(夷俗)의 비리(鄙俚)함도 없으니, 자고로 좌해(左海)의 진문장(眞文章)은 이 세 편 뿐이다. 그러나 세 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후미인곡이 가장높고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그래도 한자어를 빌려서 수식을 했다.' 이는 송강 가사에 대한 김만중의 찬사로 볼 수 있다. 송강의 가사를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이소(離騷)'라하여 우리나라시가의 최고라 했으며, 거듭 '좌해 진문장'이라 하여 우리나라의 참문장은 위에 열거한 세 편의 시가라 했다. 또한, 그 중에서도 순수 국어로 표현된 후미인곡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했다. 그는 송강의 가사를 평하면서, 시화의 전통에 따라 시어의 희롱에 그치지 않고, 나라말의 묘미를 살린 것이면 어떤 나라 시라도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태도를 확실히 했다. 곧 언어는 제각기의 색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잘 살려야만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서포만필」 중에서도 김만중의 문학관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김만중은 문학을 장단과 가락을 가진 것이라 정의하였다. 그가 문학이 철학적인 뜻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 나라의 말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밝힌 것은 선구적이다. 이는 뜻으로만 한정된 한문학의 독점적 의의를 부정하고 국어로 표현된 문학이 참문학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의 주장은 국어 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즉, 언어는 나름대로의 색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잘 살려 써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그가 송강의 가사를 높이 평가한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국문학에서 국어의 중요성을 주체적으로 인식한 점은 문학사적으로 높이 평가될 만 하다고 본다.
(2) 소설에 대한 그의 문학관
김만중은 또 소설문학에 대하여서도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소설이 인간의 사상과 감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인정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짓는다고 하였다. 그는 소설의 역할에 대하여 「서포만필」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항간에 옛말책을 이야기하는 자가 있어 삼국시대의 역사를 말할 때 유현덕이 졌다고 하면 눈물을 흘리고 조조가 패했다고 하면 통쾌하여 좋아 날뛰었으니 이것이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권여인지 알 수 없다. 지금은 진수의 「삼국지」나 사마온공의 「통감」같은 것으로는 울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통속소설을 쓰는 이유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김만중 자신의 소설의 기능과 그 힘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옳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당시는 양반들 사이에서는 소설문학이 도덕과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이유로 소설창작이 어려웠는데 김만중은 그들과 다르게 17세기후반 소설문학에서 창조적인 국문소설들을 적지 않게 발표했다.
그는 소설문학에서 당시의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인물의 성격과 인간관계에 대한 폭넓은 묘사에 기초하여 당시 사회현실을 보다 진실하게 반영한 사실주의적인 소설을 세상에 내놓기도 했다.
김만중은 이 소설들에서 인물성격의 전형화와 심리묘사, 세련된 소설문체 등 여러 면에서 조선중기 소설의 획기적인 반전을 이루어 놓았을 뿐 아니라 당대의 불합리하고 모순에 찬 현실을 폭넓게 반영하면서 사회의 부정적 현상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뚜렷이 보여 주었다. 특히 「사씨남정기」는 김만중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중편소설의 발전에서도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왜냐하면 「사씨남정기」는 김만중의 윤리의식의 일단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대의 허물어져 가는 윤리상을 비판한 작품으로서 그 고유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만중이 소설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파지림에 이르기를 마을 아이들이 집에서 괴롭게 굴어 귀찮아지면, 아이들에게 돈을 주어 모여 앉아 옛 이야기를 듣게 한다. 삼국지를 들을 때, 유비가 패하는 대목에서는 슬픈 얼굴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조조가 패하는 대목에서는 즉시 기뻐서 쾌재를 부른다고 하연다. 이것이 나관중이 연의를 지은 이유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사람들을 모아 놓고 陳壽의 正史 三國志나 資治統監을 강설한다면, 눈물 흘리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통속소설을 짓는 이유이다.'
이처럼 김만중은 소설의 기능 중 사람을 감동시키는 기능을 제일로 생각하고 있다.
(3) 김만중과 퇴계의 비교
국어 문학에 대한 김만중의 선진적 견해는 무엇보다도 그의 확고한 주체적 입장에서 표현되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도 국어 문학의 추세가 불가피한 것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성정에 느낌이 있으면 매양 시가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가는 옛날의 시가와는 달라서 읊을 수 있어도 노래부를 수는 없다. 그리하여 만일 노래부르려고 한다면 반드시 우리 모국어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국어의 음절이 그렇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즉 이 퇴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한문자의 도래가 오래되고 따라서 한문자의 발음들이 우리말로 바꿔져서 한시를 지어도 그것을 읊을 수는 있지만, 노래부를 수는 없는 딱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국어 시가에 손을 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퇴계를 비롯한 16세기 많은 사상가들이 이를 주장했고, 특히 이 퇴계는 그의 시조 작품인 「도산십이곡」을 두고 스스로 노래부르며, 스스로 춤출 수 있는 것으로 자처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 퇴계의 경우에 있어서 자기들의 한시가 가지고 있는 부족한 점들을 솔직하게 인정한 것과 또 국어 시가만이 노래부를 수 있는 시가로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모국어 시가에의 진출이 부득이하다는 것을 명확히 한 점에서 김만중과 비교할 만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퇴계에게서는 김만중과는 달리 주체적 입장을 찾아 볼 수 없다. 퇴계에게는 역시 한시문이 문학의 기본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그는 국어 문학의 가치와 그거 차지해야 할 위치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이 퇴계는 유가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우리나라 가곡은 대개 음란한 것이 많아서 족히 이야기할 것이 못 된다' 라고 하여 우리 국어 시가에 대한 폄하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시가에서 유교의 도학적인 목적만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자유로운 정서면을 억압하고 연애시라면 소위 '남녀상열지사'이니 '비사리어(鄙詞俚語)'라 하여 무조건 배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가 국어 시가에 손을 대었다 해도 양반 유학자들의 고루한 입장을 대변한 것이므로 김만중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김만중은 이 퇴계가 그처럼 음란하여 족히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고 한 우리나라의 나무하는 촉각이나 물긷는 부녀자들의 노래를 이 퇴계까지 포함한 소위 학사 대부들의 시가보다도 훨씬 높이 평가하여 오히려 학사대부의 도학적이며 풍월식의 시가를 거짓의 것이라고 단정하였는데 바로 여기에 김만중의 입장과 사대주의에 물든 양반 유학자들의 그것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김만중은 이조 봉건 통치하의 우리 문학 예술 발전에 있어서 주체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그것을 창작 실천에 옮긴 최초의 작가이다. 동시에 어느 나라 문학을 막론하고 그 나라의 모국어에 기초하여 문학을 발전시킴으로써만 진정한 문학 발전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그의 선진적 견해는 역사학적으로 확증되었으며 오늘에 있어서도 올바른 과학적 견해라고 볼 수 있다.
Ⅲ. 결론
지금까지 서포 김만중의 사상을 그의 「서포만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결국 김만중의 문학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김만중은 한시·한문학보다는 국문시가·국문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하고 있었던 근대적인 작가이다.
둘째, 다른 당시 작가들과 달리 국문소설의 효용성에대한 긍정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문학사상에 있어서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에까지 확대되어 작품세계를 펼친 것은 그의 사상적 입장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만중의 사상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그의 정치적 사상이다. 즉 유교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야망에 전심하던 유교사상이 그것이고, 유배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불교사상이 또 하나이다. 결국 김만중의 사상은 儒·佛의 합일사상을 접목시킨 것으로 이는 그의 문학작품을 통에서도 알 수 있다.
한문학의 일인자였으면서도 특히 국문학과 국문소설에 남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김만중. 이것은「구운몽」과 「사씨남정기」가 국문학적 위치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다만 아쉬운 것은 그의 시가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아 또 다른 문학관 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