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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추는 이인무
-2014년 봄학기 시창작 개강 특집
□일시: 2014년 3월 9일 토요일, 일요일 (양일간)
□장소: 서울시 노원구 중랑천변 물억새 군락지 옆 벤치
□대담 취지: 봄학기 수업의 방향과 시쓰기 전체의 맥락에 대해 별 기탄없이
떠들어보자는 것. 이틀간의 대담에 참가해준 물억새들과 오리‘들’, 물속으로 숨던
고기‘들’(물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이름을 댈 수 없음)에게 사의를 표하면서.
MATHIAS EICK QUINTET
언어의 응시
-시창작 수업을 시작하는 소감에 대해 한 말씀 해주세요. = (생략) -요즘 근황에 대해서 널널히 선전해주시지요. =(웃으며) 뭐가 궁금하신지 말씀해주시면 대답할게요. -머, 딱히 그런 게 없군요, 아쉽게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십시다. -요즘 시는 좀 쓰시나요? =‘좀’이라는 말은 좀 그렇군요. 그냥 ‘쓰시나요?’라고 물어주세요. -앗, 질문을 수정하겠습니다. 시는 쓰시나요? =(틈 없이) 안 씁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다음 질문하실게요.
-시쓰기 강의를 기획하면서 바라는 중심은 어떤 것입니까? =질문이 어렵군요. 편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중심이자 실천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방금 인문학이라 그랬나요? 말장난이지만 기표를 고칠게요. 입문학이라고. 입으로 하는 것. 입은 말이 새는 구멍이지요. 구멍은 뭡니까. 언제나 어디서나 쉴새없이 감당해야 하는 결핍입니다. 우리의 수다와 농담과 노래와 시라는 열망들이 근거하는 육체적 위치이기도 할 겁니다. -좀 살살 하시지요. 첫강부터 그렇게 정색하시면 아직 갈 길이 먼데 심란해질 듯 합니다. 갑자기 수강료 환불하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쉽게, 재미있게, 맛나게, 구체적으로. 이것도 입문학이라 생각하는데요. =말을 끊으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우좌지간(이 말처럼 폭력적인 말이 없을 것!) 인문학의 첨병이 시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인문학이 공들이는 게 언어학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 말하는 태도를 문제 삼지요. 인문학에 대한 정의가 많겠지만, 인문학은 ‘언어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처럼 정곡을 찌르는 정의는 없을 겁니다. 듣고 있어요? -선생님, 죄송했어요. 갑자기 문자가 와서 그걸 확인하느라. =머, 삶이 다 그렇지요. 수업시간에 교사의 말을 듣지 않고 친구와 종이쪽지를 돌려보는 게 시라고 말한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 사람 말에 기대면 지금 당신은 ‘시를 쓰고 있었던 것’. 괜찮습니다. 저도 그딴 느낌 잘 압니다. 문자 해봤고, 받아봤고.
-선생님, 대담에 좀 진지하게 임해주세요! 비스듬하게 앉지 마시고. =알았습니다. 진지하게. -시를 쓰려는 초심자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을 쫌, 가슴에 닿게 말씀해주세요. =가슴에 닿는다는 말처럼 공허한 말이 있을까요? 그건 그렇고, 시쓰기에 있어 초심자라는 말은 초보 운전자와는 개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기초가 되면 강의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을 보면서 생소한 경이를 체험한답니다. 이 학생들은 다 어디서 모여온 것일까? 그게 저의 신비체험이랍니다. 알고 봤더니 다 학교가 뿌린 찌라시 보고 찾아왔다더군요. 어이없는 일이지만 세상은 이렇게 어이상실의 연속이지요. 시는 이것을 바라보는(바로보는) 언어적 체위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시를 쓰겠다고 손을 든 사람들은 이미 시에 감염된 것이지요. 그 대목을 저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요가나 스포츠댄스가 아니라 그짓도 하면서 시에 손을 댄다는 것을 눈여겨본다는 말입니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그런 동작들에 대해 세심한 분석이 가해져야 할 겁니다. 갈곳이 없어 시창작 수업을 신청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 분들은 나름 노련한 분들입니다. 왜? 인생이 언어의 응시 속에서 관리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으니까요. 제 생각을 막바로 말씀드리자면,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를 응시하는 것이고, 자기 삶의 미열같은 증상들을 문자언어로 다스리려는 인문적 노력입니다. 논어를 펴놓고 강사가 떠드는 것을 주워듣는 수업은 공자어록에 묻어가면서 혹은 강사의 말에 휩쓸리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고, 시쓰기는 언어와 언어의 문맥 속에 자기를 위치시키려는 자발성이지요. 이 자발성의 중심은 존심이지요. 시를 쓰는 사람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방어기제입니다. 자기 삶과 대면하겠다는 사람에게서 무엇을 더 뺏을 수 있겠어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일은 시는 언어로 하는 공사고, 혼자 할 수 있고, 더구나 그것이 예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곤란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시를 철학이나 윤리나 삶의 악세사리로 대체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
언어의 거죽을 읽자
-시수업을 수강하는 초발심 자체에 주목하는 말씀이 주목됩니다. 대개의 삶이라는 게 머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다 별볼일 없이 흘러가는 게 아닙니까. ‘흘러간다는 것’이 삶의 한 특징일 겁니다. 그럭저럭. 그런 삶의 와중에서 시에 혹하는 일이 자존감과 관련된다는 말에 밑줄 긋습니다. 그러나 자존은 꼭 시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말을 뺏으면서) 그렇습니다. 시만이 자존심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기만이구요. 시가 자존심의 영역이 아니라, 시에 헌신하는 과정이 자존심일 겁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시라는 길은 ‘가지 않는 길’일 겁니다. 가고 싶지만 돈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는 비현실인 것이지요. -그럼, 우리가 수강료 내고 비현실을 배우는 겁니까? =발끈 하시기는! (귓속말로) 아닌 게 아닙니다. 시를 써서 돈을 모은 경우도 있는 모양인데 (이 뒷부분은 읽으시고 각자 삭제해주십시오, 저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아마 그것은 시가 아닐 겁니다. 재즈는 무엇보다 돈이 되지 않는 음악이랍니다. 그래서 아니 그러하기에 재즈가 순수한 음악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궁핍한 열정들이 자기의 꿈을 향해 쏘아올린 폭죽들이 재즈의 프로세스였을 겁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기 삶에 대한 열심입니다. 그것이 시를 쓰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시를 잘 쓰자면, 시를 많이 읽어야 겠지요? =넵, 그런 말 어디서 들으셨어요? -에이, 왜 그러세요? 삼척동자도 아는 얘기를 가지고,,,,,, =삼척에 지인이 있는데 그쪽 동자들은 잘 모르던데,,,,,, -빨리, 대답하세욧. 선생님은 말장난을 심하게 하는 게 문제 같은데요.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면 너무 진지한 축도 나만큼 문제일걸요. 말이 잠시 엇나갔는데, 시를 많이 읽는다는 말은 당근이겠지요. 적당히, 대강, 대충 읽는 것은 독서가 아닙니다. 책과 골똘하게 대결하는 것이 진짜 독서일 겁니다. 누구를 만날 때도 건성으로 만나면 상대편이 읽혀지지 않지 않습니까. 제 말씀은 문자의 겉이라도 꼼꼼히 읽자는 것이지요. 속은 각자가 챙기는 것이니까요. ‘꿈보다 해몽’이라는 속담. 제가 말하는 바는 꿈이라는 팩트를 정확하게 간추리는 힘이 필요하고, 해몽은 그 다음에 하자는 겁니다. 잘 보시면, 우리는 해몽을 우선하는 독서, 영화보기, 음악듣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기의 선입견을 덮어씌우려는 독서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읽는 거야 다다익선이니 더 말하면 입이 아프겠지요. 일부 먹고 살기 위해 책을 읽는 부류들 말고 책을 골똘히 읽는 사람들 만나기 참, 어렵습디다. 마치 일년 가야 영화관 한 번 제대로 가지 않듯이. 검색해 줄거리 보고, 다운받아 노트북 화면으로 보고. 이것도 영화감상이라면 감상이겠지만,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우리 얘기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요? -잘 가고 있습니다.
시 비슷한 것
=입 열린 김에, 제 말 더 해도 되겠습니까? -말이 고프셨던 모양이네요. zz =2013년 발표분 시 중에서 시인 당 한 편씩 추린 사화집을 읽었지요. 삼백편 정도이니까 삼백 몇 명의 시인들이 동원된 것이지요. -어머, 시인들이 그렇게 많아요? 저는 선생님 뿐인 줄 알았어요. =맞아요, 당신 앞에 있는 시인은 지금 소인 뿐이지요. 딴소리 하지 마시고요. -그래서요? =그 시들을 통독하면서 저는 이상한 문학적 미열을 겪었습니다. 세상에! 좋은 시만 모이니까 좋은 시가 좋은 시가 아니더라구요. 이 이상한 가역반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서 쩔쩔 맸다는 말씀이지요. 저의 입맛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밥맛이 없었던 것인가. 물론 둘 다이면서 둘 다 아니라는 자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밥맛은 여전한데 나의 입맛이 간 것이고, 입맛은 여전한데 밥맛이 밥맛이었다는 논리가 성립되더라구요. 어느 쪽이 되었던 간에 문제는 문제였습니다. 삼백 몇 편의 저 여전한 밥을 입에 떠넣고 있느니 개콘을 보는 게 낫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었기를 바랐습니다. 밥맛에 따라서는 입맛도 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겁니다. 그래도 삼백 몇 편의 시를 읽으면서 세 편의 시를 골랐으니 저의 감식안이 너무 편협한 것이겠지요. 제가 꼰대가 되었나 싶어서 우울한 마음을 달래며 조용히 그 앤솔로지를 덮었습니다. 시 속에 시가 없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시 이야기를 꺼내면서 살아야 하는 저의 속쓰림입니다. ‘엎질러졌으나 스밀 데 없는 물처럼 새벽 세
시에 깨어나 서성인다’ (김병호,「지금쯤」)는 문장에 눈이 갔습니다. -그 문장 멋있네요. =우린 다 속절없이 엎질러진 물이 올시다.
-선생님, =왜요? -시는 뭐예요? =미리 말하면 영업에 지장 있는데,,,,,, -에, 시라는 것은 =잠깐요, 전철 지나가고 나서요 ㅋ. 됐어요, 이제 시작하세요. =재즈라는 것은, -선생님, 시라니까요 =아, 죄송. 시라는 것은 잘 모르겠어요. 벤야민이 이렇게 말했대요. 개념은 번역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있어 보여요. =그렇지요, 동감이에요. 정의할 수 없는 게 시이겠지요. 시를 머라고 말씀하시겠어요. 물론 이거다저거다 말씀할 수 있으나 그게 다 맞으면서 조금씩 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영국어 시가 있고, 프랑스어 시가 있고, 일본어 시가 있듯이 한국어 시가 있을 겁니다. 김소월의 시가 있고, 한용운의 시가 있듯이, 서정주의 시가 있고, 백석의 시가 있듯이, 김종삼의 시가 있고, 김춘수의 시가 있고, 김수영의 시가 있을 겁니다. 어쩔 수 없이, 어쩐다는 도리 없이, 당신의 시가 있고, 나의 시가 있어야 하겠지요. 시인의 수만큼의 시가 있다고 보면 될 겁니다. 시에 대한 개념도 그렇게 여러 갈래라는 것.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 제목 혹시 들어보셨어요? -그럼요, 누가 선물해줘서 저도 읽었어요.「자서전 비슷한 것」=제목 기발성이 있지요? 저 제목이 주는 놀라움은 그것이 바로 ‘언어’의 본질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점만 들이대자면, 우리가 읽고 쓰는 시는 ‘시 비슷한 것’입니다. 이게 시의 얄궂은 운명입니다. 그 비슷한 공백을 자기의 뜨거움으로 메우고자 하는 끝없는 열망. 그 공백이 너무 커서, 너무 넓어서, 너무 뜨거워서 시인들은 자살을 하기도 하지요. 질문하시는 분은 대충 뜨겁기를 바랍니다. 이게 시가 아닌 줄 나도 잘 알아, 그러나 나는 이게 시라고 굳세게 믿으면서 쓸 겁니다. 한 마디 더 해도 될까요? -네 =제프 다이어의「But Beautiful」에서 인용합니다. ‘자신만의 소리를 낼 수 있는가. 다른 누군가와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가. 이틀 밤 동안 결코 똑같은 연주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재즈란 무엇인가에 결부된 질문들이다.’ 재즈를 시로 대체하고 한번 나직히 읽어보십시오.
지름길은 없다
-각자의 시를 찾아라, 그 말씀이시군요. 선생님, 이발하셨군요. 어디서 깎으세요? =딴얘기 하지 마시고, 시 얘기만. 오직 시! -오직, 여수! =여수 밤바다겠지요 -각자의 시를 찾는다는 게 꿈이지요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애티튜드는 찾는 척 하는 겁니다. -갑자기 문자 쓰시네요, 애티튜드? =가끔 그런 말 써야 먹힙니다, 스펠은 몰라요, 저도 -갑자기 생각나서 저도 여쭤보실게요? 수업시간에 창작시 첨삭지도도 하실 건가요? =할만 하면 하는 거지요. 가령, 자기의 이름을 잘못 썼다든가 등등. 기타 언어는 자기의 산물입니다. 자기의 눈물이자 입김이자 호흡입니다. 머, 그런 걸 고치고달고 하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유화를 가르치는 화가양반들이 붓잡은 수강생의 손을 잡고 스킨쉽을 하는 게 부러웠습니다. 시창작에는 그런 포즈가 없지요. 연필 잡는 법을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
-각자의 시를 쓰기 위한 방법 같은 게 있을까요? =그런 얍삽한 생각일랑 애저녁에 버리세요. 문학은 김수영이 아니더라도 온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젊은 말과 나이 든 말이 달리는데, 물론 젊은 말이 힘있게 달리겠지요. 나이 든 말은 지름길을 안답니다. 문학은 노털이 알고 있는 지름길이 아닙니다. 물불 가리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서는 행로! 풀섶에 가려진 길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없던 길을 발명하는 일입니다. 그게 문학의 길인데, 마치 시창작교실 주변에 지름길이 있다는 생각은 오산! 인문학의 범람이 인문학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한글로 된 논어를 읽으면 될 것을 굳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으려고 하는 것 즉 자발성을 양보하고 누군가의 안목을 거쳐야 직성이 풀리는 관성은 인문정신의 근간은 아닐 겁니다. -요점은요? =요점 없어요. 제 생각에 한정되는 것이지만, 자기와 만나는 것. 자기의 통점痛點을 아는 것, 어루만지는 것, 위무하는 것, 삶의 허위를 들여다보는 것 등등. 저같은 부류가 할 일은 일말의 가이드이지요. 저 짝에 가시면 우물이 있을 겁니다와 같은. 입을 열고 물을 붓는 것은 저의 일이 아닙니다. 시창작이라는 기차에 같이 타고 가는 것입니다. 물론 탈 사람만 타는 것. 우리는 시라는 역까지만 같이 갑니다. 역광장에 내려서 시를 찾는 것은 각자의 일입니다. 저마다 다른 인생 그래서 저마다 다른 시의 얼굴. 저마다 절절한!
-시를 쓰는 사람에게 특히 필요한 것이 있을까요? =그럼요. 필기구와 노트는 꼭 있어야 할 겁니다. -저렴한 농담 하지 마시고요 =저한테 지금 대드는 겁니까? =말이 그렇잖아요, 지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고정하시고 =제 특징이 잘 고정하는 겁니다. 하여튼,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99%의 재능, 99%의 훈련, 99%의 작업이라고 했습니다. 시도 비슷할 겁니다. 훈련과 작업은 알겠는데 99%의 재능은 의외입니다. 검증받기 난해한 것이 재능이고 오해하기 쉬운 것도 이것입니다. 재능이 열정과 동의어로 쓰이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겠지요. 열정은 호기심일 것이고, 움직임입니다. 몸과 마음의 움직임이 새로운 생각을 자아냅니다. 저는 요즘 잘 쓰지 않는 말 가운데 감수성이라는 말을 꺼내겠습니다. 감수성. 누구는 감수광은 알겠는데 감수성은 모르겠다고 하더이다. 감수성은 예민한 감성을 가리키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튼튼하고 예리한 생각을 의미할 겁니다. 예술과 관련지어서는 자칫 감상주의와 혼동할 수도 있습니다. 단순하고 범박하게 해석해서, 내 바깥의 것들을 받아들이고 녹여내는 힘을 감수성이라 정의하겠습니다, 저는. 선천적으로 감수성의 폭이 넓은 사람이 있을 것이나, 시를 위해서는 이또한 훈련되어야 할 영역입니다.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산보도 하고, 방황도 하고, 분노도 하고, 책도 읽고. 이런 종합성이 없이 시를 쓴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포크너의 말이 포크로 찌르는 것 같아요. =대충 들으세요, 말이 그렇다는 뜻이지요. -선생님 말씀 듣고 보니, 그럴 듯 해요. 가끔 영화도 봐야 겠어요. 다운 받아 봐도 되지요? =물론이지요, 불법 다운이 더 좋답니다. 그건 시적 사고에 준한답니다.^*^
사랑스런 밥맛의 초상
-어디서 읽었는데, 요즘은 그게 금방금방 생각이 나지 않아요? 어떡하면 좋아요, 선생님 =병원에 가 보세요. 아니면 강신주박사한테 다상담을 받아보시던가요 -그건 뭔데요? =일종의 다판다 개념이지요? 철학이 원래 수상, 족상, 관상 너머에 있는 삶을 카운셀링하는 기능도 있잖아요. -생각났어요. 시인이란 신이 말을 걸어주는 자라고 했어요. 아마, 오르한 파묵의 말일 겁니다. =무신론자들은 누가 말을 걸어주나요? -자문자답 =디테일 속에 신이 있다는 말도 공감이 깊습니다. 혹시 ‘인사이드 르윈’ 보셨나요? -누가 usb 빌려줘서 봤습니다. 르윈, 그 사람 저주받은 시인 같은 존재더라구요. =저는 누가 빌려주지 않아서 못봤습니다. -그럼, 제가 리뷰 한 단락 인용하셔도 될까요? =바쁘지 않으세요? -저 오늘 시간 남아서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할게요. ‘인사이드 르윈’의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는 포크송을 잘 부른다. 그것 말고는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상 루저loser다. 버릇없고, 무책임하고, 게으르다. 아무한테나 빌붙어 하룻밤을 자고, 저녁이면 뉴욕의 지하카페에서 노래 부르고 푼돈을 받아 겨우 하루를 버틴다. 인간성도 별로다. 빌린 돈 갚지 않는 건 예사고, 다른 동료 가수들을 재능 없는 속물이라고 빈정댄다. 그들과 달리 자신은 예술을 한다는 은근한 자부심을 내비치는 허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밥맛이 기타를 튕기며,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면 주위를 감동시킨다. (중략)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독 코언 형제는 데이비스를 예술가의 한 초상으로 보고 있다. 아무도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지 않고, 간혹 자기 자신도 그것이 의심스러워 다른 일을 찾아 방황하기도 하지만, 그런 궤적 자체가 예술가의 일상, 혹은 운명의 수레바퀴라고 보고 있다.‘ 이게 다예요. 어때요? =밥맛이군요. 시인과 르윈의 공유점은 속물이지만 그 속물성을 벗어나려는 경계점에 서 있다는 것. 하나는 시로, 하나는 음악으로. 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남편 저녁 차리느라 저도 자세히는 보지 못했어요. =생활과 꿈이 공존할 수 없는 드라마이지요^^ 사랑이 혼외에 있듯이, 현실과 꿈이 포옹하기 힘든 장면들이지요. 자세히는 소설이고 대강은 시입니다. 당신에게서 갑자기 시인의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꽤 시간이 지난 듯 합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시면 하시지요. =질문이 탕진된 시점이군요. 가히 시의 시간이 시작되는 순간이군요. 시는 아마도 말이 끝난 지점부터 시작되는가봐요. 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이 시작되듯이.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기를 바라는지요? =시처럼 흘러갔으면 합니다. 시라고 호명한다고 시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요. 선비들은 풍류가 아닌 곳에 풍류가 있다고 했던가요. 시는 우리가 눈 감고 있는 사이에 우리를 지나가는 무엇입니다. 시수업 시간은 시가 아니라 시에 ‘대해’ 떠드는 시간이 될 것이고, 시라는 꿈을 지원하는 근본들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깃들였으면 좋겠습니다. -앞에서 시 삼백편 읽으시고 그저 그랬다는 말씀, 귀에 남습니다. 그건 멀까?요. =일종의 시적 허무주의, 시적 숭고에 대한 상실감일 겁니다. 다르게 반복하자면, 다들 잘 쓴 시였는데, 참 좋은데, 거기까지였습니다. 어쩌라구,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잘 썼으나 매혹이 없는 시들의 물결. -선생님 시도 끼어 있던데요 =끼어있다니요? -역시 발끈하시는군요. =돼지의 셈법은 본래 자기를 빼는 것이잖아요^*^ -ㅋ 난 그런 거 몰라, 내 책임은 아니야. 이런 뜻으로 들려요. 헤겔의 용어로 ‘아름다운 영혼!’이 되겠지요. =나의 최근 관심은? -물어보지 않았는데요. 그리고, 문체를 바꾸어서 왜 ‘저’를 버리고 ‘나’를 선택하세요.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라는 겸양어에는 어딘지 저렴한 자기 비하가 깃들어 있고, 그러하기에 발언의 확신감이 주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강하게 말하고 싶을 때는 주어를 바꾸는 편이지요. 자동차 기어를 변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캔들
-기어를 바꾸셨으니 가속기를 =막, 멋있게 말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칩니다. 최근 읽은 책에 의지해서 제 생각의 일단을 펼쳐보이시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높여보니 기분도 살짝 좋아집니다.『장미의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토 에코가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 소설에는 성적 장면이 딱 두 곳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에 대해 응답하라. ‘성性에 대해서 쓰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음. 시를 쓰는 것보다 시를 하는 게 좋다는 말은 말이 되는가. 옛날이지만, 이젠 나도 옛날이라고 말할 시간들이 생겼네요. 등단했을 때, 그 소식을 처음 알려준 분이 자기를 ‘시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시한다’는 용법은 시쓴다는 말이겠으나 저는 시를 살아낸다는 뜻으로 쓰고 싶습니다. 시를 살자! 한국시가 기기묘묘한 테크닉의 진열대 위에서 각자의 시적 각성을 전시하고 있는 동안, 독자들은 그래서? 하고 딴데를 쳐다봅니다. 그 시간에 종편의 떼토크를 보거나 연속극에 종사할 겁니다. 시를 더 재미있게 쓰자는 뜻도, 독자를 모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언어의 매혹, 삶의 매혹을 동반하는 시들이 좀 쓰여졌으면 좋겠습니다. 시적 댄디즘 같은 것. 이 수업을 통해 여러분들이 그런 시를 쓰시거나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될 겁니다. -시와 독자의 별거는 인정하시는군요. =별거가 아니라 디보스. 이혼.
-어떡해요? 저같은 부류는 손 떼면 되지만, 선생님 같은 분들은 어떡해요? =고마워요, 생각해주는 척 해서. 르윈처럼, 영구혁명을 꿈꾸는 레닌처럼 자기 삶의 좌파로 사는 거지요. 그런 생각은 해요. -무슨 생각요? =에, 그러니까. 무대가 있고, 왼쪽에 피아노, 오른쪽에 드럼, 가운데에 더블 베이스가 놓여 있지요. 연주자는 없고. 좀 앞쪽에 테너색소폰, 트럼펫, 기타 등이 있다고 상상합시다. 악기 다섯이면 퀸텟이고, 넷이면 쿼텟이 될 것입니다. 그 풍경은 음악이 시작되기 직전이거나 공연이 끝나고 연주자들이 퇴장한 순간일 겁니다. 무대 위로 누군가 올라오면 좋겠습니다. 그걸 상상하는 순간 행복합니다. 아직 울리지 않은 피아노, 아직 연주자의 입에 닿지 않은 목관악기. 긴장한 드럼. 오지 않은 음악, 아직 덜 가신 음악의 여운들. 거기 젖어 있는 언어. 가보지 않은 길. 악보에 없는 길. 언어와 언어의 사잇길. 쉼표도 마침표도 사라진 문장들이 허물어지면서 깨어지는 의미들. 그것을 그것이라 믿었던 의미의 붕괴. 나는 그런 무대 앞에 앉아 있고 싶은 것일까.
-선생님, 그만해야 되겠어요. 상태가 급 안 좋아지고 계세요. 끝으로 하나만 물으실게요? 시는 가르쳐질 수 있는 겁니까? =가르쳐질 수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럼, 이 강좌는 뭡니까? =일종의 스캔들이지요. 간혹 배우는 게 있다는 분들도 있으니까요.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요. 말미에 시나 한 편 달아주시오. 제목은「삼척에서 시 쓰는 여자」.
누가 삼척에 시 잘 쓰는 여자 있다 해서
거기 갔다 돌아오는 길이다
라디오에서는 선명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저렇게 분명한 리듬, 또렷한 노랫말, 망설임없는 선율은
귀를 여는 수고를 덜어 주어서 좋다 다시말해
스스로 뚝딱뚝딱 북치고 장고 쳐주니 좋다
그렇지? 그럼으로 이어지는 혼잣말 같다
삼척에서 시 쓰던 여자는 몇 년 전에 이사 가고 없었다
할 수 없이 그 여자가 살던 집이나 답사하고
생각보다 높고 힘든 언덕을 걸어서 내려왔다
과꽃 몇 포기 있었던 것 같다
과꽃이 아닐 수도 있다
삼척에는 본래 그런 여자가 없다고 누가 고쳐줬다
슷, 바람을 들이키며 그를 쳐다봤지만
헛걸음질로 되돌아서던 그때 나는 섭섭했던가
지금 나는 그것을 내게 묻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