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그림에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의 특성이 탈각된 사람이다. 그리고 문명이라는 이기적 욕망으로부터 멀리 벗어난 사람이다. 그 사람은 매우 단순화된다. 못으로 긁거나 간단한 붓 터치 몇 번으로 처리된다. 골목길 담벼락 낙서처럼 담백하면서도 해학적이다. 사람은 까치가 되기도 하고 개가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한다. 아니, 까치와 개와 나무 들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장욱진의 그림은 마치 고대 원시 부족의 동굴벽화처럼 단순하면서도 주술적이다. 그 사람, 장욱진 화백의 그림을 보기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다녀왔다.
그의 그림은 시선을 잡아끄는 게 아니라 마음을 빨아들였다. 전시된 작품들을 일일이 분석하며 이해하려 하지 않고 스치기만 해도 솔바람이 마음을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그림들은 선(禪)을 행하고 있었다. 복잡한 논리와 사설을 단박에 깨뜨려 버리는 명쾌한 단순성, 그 단백한 원시적 마법에 사로잡혀 내 마음을 씻고 왔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복잡하게 얽힌 현대문명과 인간의 내면을 씻어내는, 선(禪)함이다. 그의 그림을 보고 나와 덕수궁 중화전 뜨락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듯 마음을 태운다. 생각의 연기를 깊이 흡입하며 장욱진의 그 담백한 아름다움을 사모한다.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가 이천 년 전에 전한 복음은 장욱진의 그림처럼 단순하고 담백한 하나의 이야기 아니었을까? 고대의 원시 부족들이 자기 동굴에 그려진 그림을 해석하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 그 의미와 일체가 돼버리는 것처럼, 예수의 복음은 하나의 그림 이야기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도록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교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행적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인간에 대해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사람들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너무 담백해서 누군가 해설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그림이었을 터다. 그 단순하고 순박한 아름다움에 교회라는 건축물이 세워지고 신학이라는 해석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흉측한 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장욱진의 그림처럼 단순한 아름다움과 담백한 원시적 인간성을 잃어버렸는가. 자기가 알고 있는 교리로 타자를 공격하고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심판자의 자리에 서 버렸는가. 이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인가?
우리가 상상하고 바라보는 예수는 인종과 역사와 문명과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오물이 투척된, 거지같은 예수는 아닌가. 내가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순가. 나는 어떤 예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내가 그리는 하나님 나라는 어떤 구도인가. 나는 그 나라를 지금 잘 그려내고 있는가. 장욱진의 그림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들이다. 그 질문들을 담뱃불처럼 깊이 빨다가 손가락을 데인 것처럼 벌떡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다시 서울역으로 갔다. 초고속 열차가 나를 싣고 현실로 빠르게 데려다 주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목사를 그만둘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