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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래틀은 공연 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음악은 공기와 물처럼 꼭 필요한 것이며, 음악을 한번 접한 사람은 변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 한국 청중들의 반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밝힐 정도로 우리나라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큰 사랑을 받는 베를린 필하모니의 역사를 다룬 책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헤르베르트 하프너 지음, 차경아·김혜경 옮김)가 출간됐지만 아쉽게도 책은 공연만큼 사랑을 받지 못했다. 지난해엔 두 차례의 공연에 무려 5000명 이상이 참석했었다는 계산인데, 고작 2만원의 책은 정작 1000권도 팔리지 않았다. “음악은 음학(音學)이 아니라 음악(音樂)”이라는 말처럼 귀로 듣고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음악의 뿌리를 알고 역사를 알면 그들의 연주가 더 깊이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독일의 저널리스트가 쓴 책으로 베를린 필의 탄생부터 오늘날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그 상임지휘자별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베를린 필을 이끈 지휘자 9명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그들과 연주자들의 관계를 담았다. 지휘자의 특색에 따라 베를린 필이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또 사진자료들도 수록돼 있어 말로만 듣던 오케스트라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들의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고통과 아름다울 것만 같은 단원들과 지휘자, 그리고 행정원들의 알력과 다툼 등 베를린 필의 음악 외적인 모습도 다양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두드러진 특징은 지휘자 각각의 개성을 면밀히 살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음악의 신’이라고 불린 푸르트벵글러, 지휘자의 위상을 승격시킨 신화적인 인물 카라얀의 이야기도 있다. 지금도 지휘자 하면 카라얀을 손꼽을 정도로 그는 지휘자라는 존재를 세계에 널리 인식시킨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이먼 래틀은 베를린 필의 연주를 디지털 형태로 만들어 대중들이 쉽게 클래식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음악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 지휘자 이야기 가운데 아무래도 가장 큰 관심을 끄는 것은 카라얀에 대한 이야기다. 카라얀은 클래식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린 이름이 아닌가 싶다. 그는 베를린 필을 이끌고 일본과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지역으로 순회공연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84년 베를린 필이 방문한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어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의 순회공연 이야기들은 흥미롭게 전개된다. 또한 그는 베를린 필이 적극적으로 음악 녹음에 나서게 했다. 음반과 영상 기술의 발전을 적극 활용해 클래식을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디어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행보다.
올해로 창단 130주년을 맞은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단순히 클래식 음악의 역사가 아니다. 그들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맞아 연주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유대인 연주자들을 내보냈으며, 연주회장이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기도 했다. 1963년 처음으로 베를린 필은 전용 연주회장을 가지게 됐지만, 이후에도 그들의 고난은 계속됐다.
이 책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세계 최고 악단의 역사를 통해 음악과 현실 세계의 관계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줄 것이다. 또한 클래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베를린 필의 굴곡의 역사를 함께 공감함으로써 그 연주를 더욱 가깝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