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엽 " 최영 "장군은 "황금을 아들아 돌 같이 보거라""라는 아버지 가르침을 가지고 살았지요. 청렴하기로 유명한 장군 ! 이때 북으로는" 홍건족과 여진족"을 남으로는 "왜군"을 물리친 유능하고" 훌륭한 장군 ! " 가는곳마다 "승리로 이끈 장군!" 왕은 그 공로로 "토지와 노비를 주었지만" 전혀 받지않았지요 이때에 ! "국왕우왕"은 최영.이성계 둘을 매우 신임 했지요. 이때의 중국정세는 "명나라가 판"을 치면서 "고려국경"을 수시로 공격 합니다 "최영장군이 왕에게 건의합니다" 이때 공격하여" 요동"을 차지 하시지요 왕은 "최영 의견"을 따라 "좌군도총사 조민수." "우군도총사 이성계"에게 5만 군사를 내주면서 "공격"을 명하지요 이성계는 "조민수를 회휴"하여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합니다 송도를 오히려 공격하였고 최영은 소수 병력으로 대항했지만" 이성계에게 잡히고" "끝내 참형"을 당하지요 후에 이성계는 도왔던 "조민수장군도 목을 베었지요" 최영 장군은 죽기전에 "유언"을 남깁니다 " 내가 평생 청렴하고 충성스럽고 참되게 살았다면 죽은후에 나의 무덤에서 풀이 나지 않으리라 ! 그런데 최영장군"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답니다" 이에 연유되어 " 최씨 자리에는 풀도 안 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답니다. 최영장군이" 독(毒)"해서가 아니고 너무나" 억울해서 ""고려를 지키지 못한 책임감..., 또한 조선 건국후 이성계는 만육(晩六) ""최양""이 벼슬을 버리자, 이성계의 거듭된 요청에도 거절하자 , " 최씨고집 ""이란 말이 이때 나왔답니다. "고려" 지조를 지킨것이지요 냉정한 사람을 볼때에 "앉은(누은)자리에 풀도 안난다" 뜻이 유래 되었답니다. 최씨고집은 "지조와 신념"이고 "풀도 안 난다는"통한의 한(恨)이 되지요 (역사 공부 한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