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서재필 기념공원 독립문 소나무
보성강이 주암호를 들어가는 들머리의 문덕교를 지나면 순천과 보성으로 나뉘는 삼거리이다. 여기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길 8에 독립문이 우뚝 서 있으니, 바로 서재필기념공원이다.
봄맞이 입춘 아침, 대문에 써 붙이던 입춘문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봄을 맞아 집안의 길함과 황제의 나라에 큰 경사가 두루 있기를 바라는 세시풍속이다.
고종이 1896년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황제가 되어 연호를 건양이라 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쓰던 조선 개국 5백 년에 처음 맞는 당당함이지만, 이미 나라는 기울어지는 달이었다. 이듬해인 1897년 나라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황제즉위식까지 가졌지만, 이 역시 이름뿐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백성들은 첫 황제 연호 건양을 기려 새봄맞이에 자랑스레 대문에 붙인다.
그리고 이 건양다경의 다른 이름이 바로 독립문이다.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에 있는 독립문은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가 발의하고, 고종 황제가 동의하여 3,825원을 모금 그해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했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보성의 독립문은 2008년에 서울의 독립문과 똑같은 규모, 같은 방향으로 세워졌다. 독립문이 세워진 의의와 뜻이 같고, 서재필을 기리는 의미가 더해진 기념비이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전남 동복군 문전면 가천리(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대구 서씨 가문의 서광효와 성주 이씨 이기대의 다섯째 딸 이조이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곳 문덕의 기념관 앞을 흐르는 작은 내를 거슬러 1.3km쯤 서재필의 외가 마을이 있다. 외가는 외고조부가 처음 터를 잡았고, 외증조부 이유원이 이조참판, 외종조부 이기두가 동지중추부사, 외삼촌 이지용이 충청도 석성현감을 지낸 문벌이자, 대지주 가문이었다.
서재필이 태어난 외갓집 마루에서 바라보는 앞산의 두 봉우리는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하다. 성주 이씨는 아들을 낳기 전 큰 용이 집 뒤뜰 뽕나무를 감고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었다. 또 그의 외삼촌 이지용도 마을 어귀 고목을 감고 있는 큰 뱀의 태몽을 꾸었다.
서재필의 어릴 적 이름이 쌍경이다. 아버지 서광효가 자신이 진사시에 급제한 해에 태어나서 두 가지 경사가 겹쳤다 하여 지어준 이름이다. 서광효는 또 처가가 있는 이곳 동복현감을 지냈다. 하지만 서재필의 일생은 영광과 고통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함이었다. 7살 때 아버지의 6촌 형제인 서광하의 양자가 되어 충남 은진군으로, 관직에 오른 양부를 따라 한성부에서 살게 되었다.
서재필은 1879년 15살의 나이에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을 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한 수재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 삼일천하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정변 실패 뒤, 친가, 처가, 양부 집안까지 연좌제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아내인 광산 김씨가 독약을 먹고 죽자, 2살 난 외아들은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배고픔에 죽은 어미의 젖을 먹다가 독약 성분에 죽었다고도 한다. 그런 사연을 안고 서재필은 미국인이 되어야 했으니, 모국인 조선이 좋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서재필은 모국의 독립을 위해 할 바를 다한 대인이었다.
간혹 서재필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내 눈에 들보는 안 보고, 남의 눈의 티끌만 나무라는 고약한 심보일 수도 있다. 어찌 백 점짜리 삶이 있겠는가? 백 사람이 백 말을 해도 보성 문덕면 서재필 기념공원 독립문 옆의 소나무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의 축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