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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보길도로 가는 연락선.>>>>
<2008.3.23. 보길도.. 촬영 비가 오는날... 강행.. >
43친우 여러분...
우리 고등학교적''어부사시사"'의 추억을 기리며...
낭만의 섬 꿈속의섬..추억의 섬으로 고우"' 닻들어라 닻들어라...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가 말년을 보낸곳이지요
"'어부사시사"' 오우가"'의 고향이고요 "'윤선도의 고향은 해남입니다만
태어난곳은 "'한성 동부 연화방"'이라는데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 근처라지요
8세때 작은 아버지"'유기"'의 양자로 들어가서 해남윤씨의 대종을 잇는다지요
11세때 절에 들어가 학문 연구를 시작 하고 26세에 "'진사시험"'에 급제 하고
여러 벼슬을 전전 하나 별 재미를 못보다가 "'봉림대군"'의 가정 교사로 발탁되어 "'세자 시강원 문학"'
요즘 말로는 "'왕립 세자 전속 대학원 총장"'을 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고 빛을 보게 되었답니다
조선의 3대 시가인 "'박인로 정철 윤선도"'중의 한사람이고요.
. "'다산 정약용의 외할아버지"'가 되고 "'국보 240호인 세필화 자화상"'으로 유명한
"'해남 윤씨 "'하면 꼭 거명 하는 "'문인 화가"'윤두서"'외증손자""가 됩니다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 하여 "'유성룡 이순신"'과 갈등 하는 "'윤두수"'는 "'해평 윤씨"'로 같은 집안이 아닙니다..
29세에 "'이이첨"'의 난정을 탄핵 했다 "'정치적 열세"'였던 남인이었고 서인이었던 송시열과 격돌
여러곳을 유배생활로 전전 하게 되지요 ""성격이 강직 했던 굽힐줄 몰랐고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글 사진 홍삿갓..>
'영덕"'에 유배 되었고 조대비 복제 상소로 항쟁 "'삼수 갑산을 가더라도..""등의 말이 나온 조선에서
가장 유배 생활 하기 어려운 함경도의"'삼수"'로 유배 생활 가기도 했지요 병자 호란이 일어 났다는 소식을 듣고
"' "'가노"'수백명으로 "'구국 특공대"'를 급조 수십대의 배에 태우고 "'인조"와 세자들을 구하기 위해
"'강화도"'로 가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제주도로 가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린 "'보길도"'의 경치에 반해 여기에 정착 하게 되고 "'부용동"'이라고 이름도 새로 짓는답니다
"'부용동"'에는 51세에 들어와 85세에 돌아가셨지만 7차례나 드나들면서
귀양을 가느라 실제로 산 햇수는 13년정도 살았답니다
<보길도 세연정..보길도 예술극장 공연장..>>>>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머물면서 지은 정자로 날이 좋은 날이면
노비들에게 술과 안주를 마차에 가득 싣게 하고 기생들을 거느리고 나와 술을 한 잔 걸치고서는
어부사시사를 부르게 했던 곳입니다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안빈 낙도"'를 생각히면 약간 거리가 있지요..
그도 그럴것이 ""실은 윤선도는 양반중에 양반 ..임금님의 사부에... 엄청난 부를 지닌
당대의 실력자였으니까요... 작품과 저자는 다르다고 봐야겠지요...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상 "'최고봉"'이며"'어부 사시사 40수 봄 여름 가을 겨울 10수씩
산중 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가 가장 빼어나다지요 그의 시의 주제는
"'자연과의 화합 "즉 물아일체"'였던것이지요 후대 "'정조"'가 특명을 내려
"'고산 유고"'라는 이름으로 "'시문집""을 만들었고 "'세연정 낙서재"' 무민당"'등을 짓고
<<<보길도 세연정.. 배띄워라..배띄워라..>>>>
'음악"'을 좋아한 "'고산"'은 자기가 만든 노래를 "'자기가 만든 무대에서 "'요즘의 뮤지칼"'처럼
"'가무인"'들 을 동원 "'실제 공연도 했다지요.. "'어부사시사 중 겨울 노래 한수
"''간밤의 눈걘 후에 경물이 달랃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난 만경류리.
."' 듸희난 쳡텹 옥산 지국총 지국총 어 사 와 션곈가 불곈가 인간이 아니로셰..
.."" 그의 외손자"'가 되는 "'정약용 은 강진에서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니
보길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만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기구한 운명이 된게지요..
<<<<동천석실..>>>>
<<해남에 있는 해남 윤씨 종택에 있는 500년된 은행나무
해남에 있는 종택을 "'녹우당""
해남윤씨는 연안이씨, 여흥민씨와 함께 해남땅의 큰 성씨로서 명문으로 꼽힌답니다요
.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시조 작가인 고산 윤선도와 그의 증손이며
선비화가로 유명한 공재 윤두서가 이 집안에서 난 사람이니,
녹우당은 그들의 자취가 밴 옛집이군요.
윤선도는 42세 되던 인조 6년(1628)에 봉림 대군과 인평 대군의 사부가 되었는데 봉림 대군은 나중의 효종이지요
효종은 즉위한 후 어린 시절의 사부였던 윤선도를 위해 수원에 집을 지어 주었답니다.
1660년에 효종이 죽자 윤선도는 고향으로 내려오면서 수원 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왔구요.
그것이 지금 녹우당의 사랑채입니다요
. 지금은 해남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으로 부르고들 있으나 원래는 그 사랑채 이름이 녹우당(綠雨堂)이구요.
집 뒤 산자락에 우거진 비자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 하며 푸른 비가 내리는 듯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 이서는 성호 이익의 이복 형이며
그의 글씨는 동국진체 글씨의 원조로 일컬어지고요
그로부터 백하 윤순을 거쳐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동국진체는 완성된답니다...
<<<<보옥리 공룡알 해변..>>>>>.
<<녹우당 현판>>.
<<<,보길도에는 동백이 한창이었다...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보길도 세연정..>>>>
<<<,보길도와 완도 해남을.. 오가는 연락선..>>.
<세연정엔 관광객들만... 윤선도의..여유로움은 없다...>>
<<정자의 여닫이 문이 고리에 걸려 있다..>>>.
<세연정의 바위...... 윤선도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동천 석실 올라가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세연정에서..지나가는 나그네...>>.
<동호인들과 인증샷 왼쪽 홍삿갓....>>>
<<,세연정 연못에도 동백 꽃이 떨어져서..정취를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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