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그를 사랑한 부인과 여자들
2007.09.14 23:53
장가갈 생각지 않아 모친 박계숙 여사가 중매
전주이씨 효령대군 18대손 이재희씨와 결혼
“아버지에게 여자가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호탕한 성격에다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생들도 많이 따랐던 것 같습니다.”
김두한 집안의 장녀이자 외동딸인 김을동씨(57, 탤런트)의 기억이다. 하지만 김씨는 아버지에게 몇 명의 여인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김씨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로 인해 바람났다든가 말썽을 피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아버지의 여인은 본처 이재희 여사와 작은 부인 두 분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한 여인을 사랑하기는 했다”고 덧붙였다.
김씨에 따르면 ‘김두한의 여인’은 본처와 작은 부인 두 명, 김두한이 흠모했던 여인, 그리고 김두한을 따랐던 수많은 기생들로 요약될 수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여인은 모두 네 명. 먼저 김두한의 본처인 이재희씨로 김을동씨의 모친이기도 하다. 둘째 부인은 김부미씨로 김두한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셋째 부인은 김순옥씨로 아들 하나를 남기고 있다. 그리고 여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한 묘령의 박정인씨가 그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두한의 주변에 여인이 많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 그러나 가족에 대해 소홀했던 아버지에 대해 서운해한 김을동씨도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은 각별했다고 기억한다. 김두한의 화려한 여성편력에도 그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던 여인. 본처인 이재희 여사(87년 작고)다.
두 사람은 김좌진 장군의 부인이자 김두한의 어머니인 박계숙 여사의 중매로 만났다. 아들이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자 박 여사가 직접 나선 것이다.
어느 날 아들을 보기 위해 종로를 찾은 박 여사는 “집안의 대는 이어야 한다. 명망가 집안의 참한 규수가 있으니 이제 가정을 꾸려라. 남자는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되는 거다.”
박 여사가 말한 참한 규수가 바로 이재희씨였다. 이씨는 전주이씨 효령대군 18대 손으로 조상 대대로 서울에 살았다. 안동 김씨 후손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김두한은 결혼할 상대가 가문있는 집안의 처자라는 사실에 얼굴도 모른 채 부모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두사람은 1944년 봄에 결혼했다. 김두한의 나이 27세였고, 이재희씨사는 21세였다. 그러나 말이 부부지 김두한은 집보다 밖에 머문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씨는 안동김씨의 며느리로 4대 봉사까지 지냈지만 김두한은 몇 년간 집에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자연히 가정 경제는 이재희씨가 책임져야했다. 이씨는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활하며 딸을 키우고, 남편을 내조했다. 당시 삯바느질은 기생들을 상대로 해야 돈을 벌 수 있었지만 이씨는 “양반집안 며느리가 기생의 옷을 바느질 할 수는 없다”고 고집, 집안 살림은 더욱 곤궁했다.
김두한, 정치적 문제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조강지처만이 형무소 찾아와 면회 ‘내조’ 절감
김을동씨는 “아버지가 정권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그 많던 여인들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며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형무소를 찾아갔다”고 말했다. 이씨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김두한의 옥바라지를 다했던 것.
김을동씨는 그때 아버지가 조강지처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 같다고 말한다. 김씨는 “지금까지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고 협객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김씨는 어머니 이씨를 “지조와 기개가 대단했던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이었다”고 평했다. 김씨에 따르면 이재희씨는 김두한의 둘째 부인과 셋째 부인 사이에 난 자식을 모두 호적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김두한의 세 여인은 1972년 그가 임종했을 때 처음으로 함께 모였다. 이재희씨는 이후에도 두 부인과 그들의 자식들을 김두한의 분신으로 여기고 김두한이 베풀지 못한 사랑을 대신해 전했다고 한다. 김을동씨도 부모님이 살아생전 못다한 정을 나누도록 경기도 한 공동묘지에 합장했다.
김두한의 두번째 부인은 얼마 전 작고한 김부미씨다. 김두한은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김경민·현성씨와 첫딸 김영채씨를 두었다. 김두한은 김부미씨를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김씨는 당시에는 드문 동경유학을 한 신지식인이었다. 해방이 된 지 얼마 안됐을 무렵 김부미씨는 친구 손에 이끌려 김두한의 강연회를 간 게 인연이 됐다.
김두한은 강연회 내내 김부미씨를 주목한 뒤 강연회가 끝나자 그녀에게 다가가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러나 뭇여성들의 우상이었던 김두한은 보기좋게 딱지를 맞았다. 자존심이 상한 김두한은 무작정 김부미씨를 찾아갔다. 그러나 김부미씨는 겸손하게 김두한을 손님으로 맞았고,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었다. 김두한은 집을 나설 때 김부미씨에게 쪽지를 하나 건넸다. 쪽지에는 글 대신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여자에게 꽃을 선사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후 두 사람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고, 자연스럽게 한 집 살림을 하게 됐다. 두 사람의 금술은 아주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남인 김경민씨는 아버지가 자신을 무척 귀여워했다고 말한다. 밖에서는 늘 강한 남자였지만, 집에서는 자상한 아빠였다는 것.
김씨에 따르면 김두한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항상 아들 자랑을 했지만 교육을 시킬 때는 혹독했다고 한다. 김두한은 김씨가 중·고등학교 시절 할아버지인 김좌진 장군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현했고, 김씨도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나라사랑의 정신을 항상 가슴속에 담고 살아왔다고 말한다.
김씨는 군사정권의 횡포를 막기위해 두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선 것이나 1991년 일본 총리 방한 때 할복자살을 기도한 것이 모두 ‘피의 내력’인 것같다고 회상한다. 김씨는 김두한의 셋째 부인인 김순옥씨가 전국을 떠돌며 어렵게 생활한다는 사실을 알고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 도와줄 형편이 못되는데도 어머니로 깍듯이 대하고 함께 살자고 제의하기도 하였다.
김부미씨는 자신이 김두한의 부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살아오다 얼마 전 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셋째부인 김순옥과 결혼, 아들 범상도 낳아
부통령 이기붕씨 별장에서 신혼살림 차려 생활
김두한은 1972년 임종 직전 조일환 등 자신의 부하들에게 “처(김순옥)와 범상이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김순옥씨는 30여 년간 베일에 가려있다 최근 언론에 얼굴이 알려진 김두한의 셋째 부인이다. 김씨는 얼마전까지 만리포 해수욕장 근처에서 ‘청산리 장군집’이란 포장마차를 운영했다.
김두한과 김순옥씨가 처음 만난 것은 1967년 한정식집에서였다. 당시 김순옥씨는 모 여대 영문과에 입학, 자취를 하면서 밑반찬을 얻기 위해 사돈 언니가 운영하는 한정식집을 드나들고 있었다.
한정식집의 단골이었던 김두한은 김순옥씨를 보고는 그녀의 언니에게 “한번 보고싶다”는 말을 전했다. 김순옥씨는 당시 젊은 여자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두한의 청을 받아들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만남을 지속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싹텄지만 김두한에게는 김순옥씨와 동갑인 딸(김을동)이 있었고, 29세나 연상이었다. 그러나 김씨의 감정은 깊어만갔고, 집안에는 알리지도 않은 채 1969년 서울 정릉에 있는 한 절에서 냉수 한그릇만을 떠놓은 채 결혼식을 올렸다.
지유당시절 부통령을 지낸 이기붕씨의 별장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두 사람은 정말 신혼부부처럼 지냈다. 김두한은 20대 초반의 김순옥씨를 ‘한양아가씨’라 부르며 극진히 위해주었다.
김씨가 낙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시간을 내 무교동에 데리고 가 낙지를 사주었고, 임신을 했을 때는 부하들에게 김씨가 먹고싶다는 음식을 챙겨주도록 했다.
김순옥씨에 따르면 아들(범상)을 낳은 뒤에는 서린동 사무실에서 아들을 목마 태우고 자신과 너무 닮았다며 자랑하는게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고 한다.그렇지만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72년 김두한이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영영 저 세상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순옥씨가 25세때로 범상의 나이는 세 살이었다.그녀는 김두한에게 누가 될까봐 장례식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먼발치서 남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김순옥씨는 삼오제때 범상을 데리고 소복을 입고 나타나 큰집(본처 이재희씨) 가족들은 놀라게 했다. 그러나 범상을 보고 김두한의 핏줄임을 안 큰집 식구들은 김씨를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이재희씨는 손수 범상을 김두한의 호적에 올려주었다.
김두한은 임종 직전 김순옥씨와 범상을 부하들에게 부탁했지만 김씨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거처를 옮겨가곤 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식당 허드렛일을 시작으로 전국을 떠돌며 행상, 포장마차 등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지난 95년 김두한의 둘째 부인(김부미)의 장남인 김경민씨가 김순옥씨의 어려운 사정 얘기를 듣고 함께 모시고 살자고 했지만 김순옥씨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김두한의 부하들도 오야붕(두목)의 유언에 따라 김순옥씨를 도와주곤 했다. 김두한의 후계자인 조일환씨는 김씨를 공사장 함바집을 운영할 수 있게 해주었고, 다른 부하들은 김씨에게 지난 7월 만리포 해수욕장에 포장마차를 마련해주었다.
김순옥씨는 김두한과 결혼함으로써 친정과 연을 끊고 지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활이 어렵더라도 영감님(김두한에 대한 김씨의 호칭)의 부인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옥씨는 김두한과의 생활을 회상할 때 “떠돌이 생활로 인해 아들(범상)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게 제일 아쉽다”고 말한다. 아들은 현재 부동산중개업을 하고 있는 사촌형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김순옥씨는 “영감님과는 짧은 인연이었지만 지금까지도 가슴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영감님께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두한을 닮은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김두한을 흠모하던 기생들과 묘령의 박여인
김두한의 주변에는 늘 여인들이 있었다. 때문에 김두한은 주로 흠모의 대상이었지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 김두한도 마음을 빼앗긴 여인이 있다. 여고에서 영어교사를 한 박 모라는 여인이다. (이름이 박정인이라는 얘기도 있음)
김을동씨는 박 여인에 대해 “조용하고 기품있는 여성이었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두한과 박 여인 간의 로맨스는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한편 김두한은 부인들 말고도 뭇여성, 특히 기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김을동씨에 따르면 콧대 높은 종로 기생들도 김두한과 술을 한 잔 마시기 위해 안달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1954년 종로 민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된 것도 그러한 ‘오빠부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을동씨는 “아버지가 다른 여자로 인해 바람났다든가 말썽을 피운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말해 김두한의 여성편력에도 원칙과 기준이 있었음을 가늠케 했다.
글 / 박종진(일요시사 정치부차장) 사진 /경향신문 포토뱅크
[출처] 나바아임화수의 사형집행과 야인시대 실존 인물들의 그 당시... (작성자: 납치당한 외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