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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의 역사
1. 티베트불교 역사 구분
• 인도불교의 전래 및 구역시대(舊譯, 600~850)
• 파불 시대(850-950)
• 인도 후기 불교의 전파 및 신역시대(新譯):부흥기(950~1250)
• 황금기(1250~1450)
• 원과 명나라의 우호관계(1450~1650)
• 청나라와 우호관계와 독립(1650~1949)
• 중공의 침략과 해외망명기(1950~)
2. 불교 전래 및 구역(舊譯, 600~850)
• 송첸감뽀왕(569~649)의 중국불교와 인도불교 도입: 문성공주와 당번고도(唐蕃古道)
• 티송데첸왕(742~797): 본격적인 인도불교의 도입, 왕실의 후원
• 뵌교와의 대립
o 샨따락쉬따(Śāntarakṣita)와 빠드마삼바바(Padmasaṃbhāva)의 공헌
o 빠드마삼바바와 예세쵸갈: 티베트 불교의 아버지와 어머니
o 삼예사 창건(787~791)과 티베트불교 최초의 비구 교단 성립
*돈수 vs 점수 대논쟁
• 중국 돈오선종의 유행: 계율과 육바라밀의 부정 & 사회적 혼란
• 샨타락쉬타의 예언 & 까말라실라의 티베트 입국
• 삼예 대논쟁(792~794): 중국 북종선 마하연선사 vs 인도 대승불교 카말라실라
*랑다르마왕(Langdarma, 재위 838~841)의 폐불
• 뻴기 도르제(Pelgyi Dorje)에게 암살당함.
• 파편의 시대:구게왕국, 푸랑, 라다크, 3대 불교 왕국의 정립
*후기전파 및 신역(950~1250)
• 인도불교의 밀교화
• 티베트인들의 인도 구법행: 린첸상뽀(958~1055), 마르빠(1012~1097)
• 딴뜨리까의 밀교전파:띨로빠-나로빠-마르빠-밀라레빠-감뽀빠: 꺄규파 형성
• 까규파 행법: 나로6법 & 마하무드라
*까담빠의 형성
• 아띠샤(Atiśa, 980~1054)의 불교개혁과 돔뙨빠(1005~1064)의 까담빠 형성
*사꺄빠
• 쾬(Khȫn) 가문, 시가쩨 근처 회색 대지(사꺄)의 사꺄승원에서 출발
• 사꺄판디따(1182~1251)의 공헌
• 최겔팍빠(1235~1280): 쿠빌라이의 왕사. 티베트를 통치. 파스파문자 개발과 화폐 도입.
*조낭빠
• 시가쩨 근처 조모낭 지역에서 발전, 5대 달라이라마의 박해. 암도 지방에서 융성
*겔룩빠
• 쫑카빠(1357~1419)의 보리도차제광론(람림) 저술, 티베트 불교의 교과서
• 엄격한 계율의 수행 및 불교 논리학, 중관을 강조, 차제에 의한 수행을 강조
• 라싸와 시가쩨에 10대 불교대학 건립(4대 사찰: 간덴, 따쉴룽뽀, 데풍, 및 세라 사원)
• 3대 달라이라마 소남갸초(1543~1588)가 몽고의 알탄칸(Altan Khan,1507~1582)로부터 ‘달라이Dalai’칭호를 부여받음.
• 5대 달라이라마(1617~1682)와 구쉬칸(Gushri Khan,1582~1655)의 정치적 후원을 받아 티베트의 최고 통치자가 됨. 포탈라궁전 건설. 군사를 동원하여 까규파와 조낭파를 공격
• 6대 달라이라마(짱양갸쵸,1683~1706)는 낭만주의 시인 가객, 애정 편력, 20세에 포탈라에서 쫓겨나 몽고로 납치되는 도중 의문사. 그는 연애 시집을 남겼다.
“어여쁜 임을 따르려니, 깨달음의 길 걷기 힘들고
깊은 산 속에서 수행하려니, 임을 그리는 한 조각 마음이 걸리네.
지성을 다해 떠올리는 부처님 얼굴은, 도무지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데
생각지 않으려는 임의 얼굴은, 더욱 더 또렷이 떠오르네.”
• 13대 달라이라마(툽뗀가쵸,1876~1933)는 민족주의자, 1911년 독립선언
• 14대 달라이라마(뗀진갸초,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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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예(Samye)의 대논쟁: 인도불교와 중국불교의 관점 차이
티베트는 인도와 중국 양쪽에서 불교를 도입했다. 중국에서는 돈오를 주장하는 선불교가 들어왔고, 인도에서는 점수를 주장하는 대승불교가 들어왔다. 두 세력 간의 알력이 노골화되자 티송데첸(742~797) 왕은 삼예寺에서 2년(792~794)에 걸쳐 대논쟁을 벌이게 한다. 토론에서 진 쪽이 철수할 것을 약속한다. 왕은 인도불교 측을 선호했다. 그는 날란다 대학장이었던 샨타락쉬타(725~783)를 티베트로 초청하였다. 산타락쉬타가 두 번째로 티베트에 들어올 때 파드마삼바바를 동행하였다. 파드마삼바바는 주술적 능력으로 불교에 저항하는 토착 신령들을 제압하여 불교의 수호신으로 변화시켰다.
중국 선종을 대표하는 마하연 선사가 먼저 포문을 연다.
“일체의 행위로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선한 행위를 하면 좋은 과보를 받아 태어나고 악한 행위를 하면 나쁜 과보를 받아 태어난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깨달음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분별의 경계를 지워버린다면 부처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불사불관(不思不觀, no thought, no examination, nirvikalpa)한다면 경계의 순간에도 실재라는 착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궁극적인 지혜는 이와 같이 단숨에 증득할 수 있다.”
마하연은 선종 돈오(頓悟)의 핵심을 설파했다. 차분하게 듣고 있던 산타락쉬타의 제자 카말라실라(740~795)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그 어떤 것이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사물의 모양을 잘 관찰하여 선악을 분별하고 의혹을 끊는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부정하는 셈이다. 묘관찰지가 없다면 과연 어느 누가 무분별지(無分別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또한 생각을 멈춰야 한다지만 그런 생각 자체도 이미 마음 작용을 일으켰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카말라실라는 마하연이 전개한 논리의 오류를 지적했다. 마하연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것은 망상에 불과하니, 일체 작용이 멈출 때 진실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기절하거나 술에 취한 상태 역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 된다. 하지만 관찰하는 행위가 없는데 어떻게 무분별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고 작용을 중지했거늘 어떻게 일체법의 무자성을 인식할 수 있을까? 인도불교 측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했던 예쉐왕뽀(카르마실라의 제자였다)가 마하연의 주장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해탈의 방편인 수행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돈오(頓悟) 한다면, 지금 당신이 하는 짓은 수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카말라실라와 예쉐왕뽀의 빈틈없는 논리에 마하연은 어떤 답변도 내놓지 못했다. 그는 카말라실라에게 꽃을 바치며 패배를 인정했다. 약속했던 것처럼 티베트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티베트는 인도에서 들여온 대승불교가 꽃피우게 된다. 그러나 선종의 가르침은 족첸이나 마하무드라 수행법 속으로 통합되어 전해진다.
*랑다르마의 파불
티송데첸을 이은 랄파첸 왕(재위 815∼838)은 불교를 과도하게 숭상해서 뵌교세력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에 그의 형인 랑다르마(809∼842)는 파불을 단행하였다. 그 파불의 정도가 심하여 불교세력의 저항이 일어나 결국 그는 뻴기 도르제(Pelgyi Dorje)라는 승려에 의해 암살되었다. 티베트 중앙권력이 무너져 향후 200년간 분열과 혼돈에 빠진다. 랑다르마의 증손자들이 서쪽으로 도망가서 구게Guge라는 불교왕국을 세운다. 푸랑, 라다크, 잔스카르에도 작은 왕국이 들어서서 서로 경쟁하며 공존한다.
*에세외의 순교와 아티샤존자의 불교개혁
분열과 혼돈 속의 티베트불교는 인도에서 흥기한 좌도밀교가 유입되면서 계율을 경시하는 풍조로 인해 승풍이 추락하게 된다. 혼탁해진 불교를 개혁하리라는 발원이 일어난다.
구게왕국의 왕인 에세외(959~1039)는 인도 비끄라마실라 寺의 대학자인 아티샤 존자를 티베트에 초청하려 한다. 존자를 초청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려고 왕은 자기 몸만한 크기의 황금을 장만한다. 적국(튀르크 게통)의 왕이 에세외를 사로잡아 감옥에 가둔다. 에세외의 조카 장춥외(984~1078)가 빼내려고 협상을 하니 적국의 왕은 몸크기 만한 황금 외에 머리통만한 황금을 더 가져오라 한다. 조카는 감옥에 갇힌 삼촌 에세외에게 상의한다. 에세외는 비장하게 말한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오래 살겠는가? 장차 불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려 하니, 나를 살리려 황금을 바치지 말고 아티샤존자를 티베트로 모셔오는 데 쓰라. 에세외의 희생과 장춥외의 정성으로 아티샤는 1042년에 구게왕국에 도착하여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을 저술하고, 17년간 포교한다. 불교부흥의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아티샤의 정신을 이어받은 추종자들에 의해 생겨난 종파가 까담파이다.
☸티베트 불교의 4대 종파
아티샤의 활약으로 계율 부흥 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여러 종파가 나타났다. 이러한 불교 종파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까담파를 비롯해 까규(Kagyu)파, 닝마(Nyingma)파, 사캬(Sakya)파, 겔룩(Gelug)파를 들 수 있다.
①겔룩파는 까담파의 계통을 이어받아 크게 발전하여 티베트 최대의 종파가 되었다. 불세출의 스승인 쫑카빠는 방대하고 세밀한 교학의 뒷받침 하에 계율중심의 엄격한 승가전통을 회복하여, 현교와 밀교를 통합하여 티베트불교를 일신하였다. 몸으로는 비구계율을 지니고 행동은 대승불교를 따르며 마음으로는 밀교를 수행하여 三乘삼승을 한 몸에 구현하라고 가르쳤다. 쫑카빠는 아티샤의 보리도등론을 확장하여 해설한 <보리도차제광론 즉 람림Lamrim>을 저술하여 명실공히 티베트불교의 교과서가 되었다. 그의 조카였던 겐뒨둡(1391∼1474)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해 환생하기를 발원해, 다시 태어나 초대 달라이라마로 추존되었다. 3대 달라이라마였던 소남갸초가 몽고의 권력자 알탄칸으로부터 ‘달라이Dalai大海’ 존칭을 부여받아 ‘달라이라마’ 제도가 공인되었다. 몽고의 구쉬칸(Gushri Khan)은 제5대 달라이라마(1617∼1682)에 귀의하여 티베트 통치권을 부여하여 정교일치(政敎一致)제도를 보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는 포탈라궁전을 완성한다.
*최고 학위 ‘Geshe게쉐’: ‘게쉐’는 티베트 불교 최고 학위이며 박사학위에 해당. 최소 13~15년 이상 현교를 공부한 후 최종적으로 토론에서 합격해야 한다.
②사꺄파는 꾄촉 걀뽀(1034∼1102)가 사꺄지방에 절을 세워서 수행하고 포교한 것에 유래한 씨족 교단이다. 꿍가닝포(1092~1158)를 비롯해 소남체모(1142~82), 닥파겐첸(1147~1216), 사캬판디타(1182~1251), 팍파(1235~80)를 5대 학자로 존숭한다. 팍파는 1270년 元 쿠빌라이의 스승이 되어 티베트 대리통치를 위임받기도 하였다. 팍파는 원 제국을 위해 파스파八思巴문자를 만들고 화폐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까파의 현재 종정은 사캬 틴진 린포체(공마 린포체)이다.
③까규파는 인도의 띨로빠(988∼1069), 나로빠(1016∼1100)를 거쳐 티베트 구도자인 마르빠(1012~1097)와 밀라레빠(1040~1123), 감뽀빠(1079~1153)를 잇는 법맥이다. 마르빠는 인도에 유학하여 나로빠로부터 ‘나로6법’을 배우고, 마이트리빠로 부터는 ‘Mahamudra마하무드라大手印’의 심인법을 배웠다.
마하무드라Mahamudra는 현교의 지관(止觀)과 탄트라불교의 구경차제(究竟次第)의 수행을 활용한 것이며, 나로6법은 구경차제의 전형으로 각 차제는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나로6법의 기초수행인 뚬모(tṻmmo)의 불(psychic fire)은 인체의 단전에 생리적인 불을 일으켜, 생명의 기운인 풍(風 lung)을 좌우 맥관(tsa, 脈管)으로부터 中脈중맥으로 흐르도록 해서 해탈을 신속히 성취하는 요가 기법이다. 이외 환신(gyulṻ), 밀람(milam몽중수행), 바르도(bardo)는 중음(中陰)의 의식과 자수용신(自受用身)성취를 위한 것이며, 광명(ṏsal정광명)은 법신성취를 위한 수행이며, 뽀와(phowa의식사출)는 수행자가 임종 시에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정토(淨土)나 안락한 곳에 태어나도록 유도하는 수행이다.
*마르빠는 부인을 두고 세속적인 삶 가운데서 연꽃을 피우며 위대한 시인, 고행자, 신비가 밀라레빠를 키웠다. 밀라레빠의 생애는 그의 자전적인 詩인 <Gurbum十萬頌>와 <밀라레빠전>에 묘사되어 널리 티베트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밀라레빠의 수제자 감뽀빠(Gampopa, 1079~1153)는 본래 까담파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까담파의 보리도차제와 까규파의 마하무드라를 통합했다. 그는 근기가 높은 제자들에게는 방편도方便道(나로6법과 대수인)를 닦게 하고 보통의 근기 제자들에겐 해탈도解脫道(까담파에서 전수해온 현교 수행)를 닦게 했다.
*감뽀빠의 제자인 뒤숨켄빠(1110-97)가 카르마빠1세로 환생하여 활불(툴쿠Tulku)제도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는 제17대 카르마빠가 종정으로 계신다.
④닝마파는 4대 종파 가운데 티베트불교의 원형을 간직한 유일한 종파이다. 닝마파의 종조로 모셔지는 빠드마삼바바(Padmasambhava)는 우디야나(Oddiyana)국의 호수에 있는 연꽃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연화생(蓮華生)’이라 불린다. 그는 인드라보디(Indrabodhi)왕의 아들로 입양되어 왕궁에서 길러졌으나 후에 왕위계승을 거부하고, 수행의 길을 걸어 성취(成就, Siddhi)를 이루었다. 빠드마삼바바의 전기는 신비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가 활동한 우디야나(오늘날 파키스탄 스와트계곡), 사호르(Sahor북인도 르왈사르)는 모두 밀교가 성행한 지역이다. 그의 영적인 배우자 예세쵸걀(Yeshe Tsogyal, 777~817)과 함께 티베트불교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사랑을 받는다. 그는 구루린포체(Guru Rinpoche)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닝마파 수행은 인도밀교와 중국선이 융합된 형태로 本覺論본각론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밀겸수(顯密兼修)의 입장을 지지하고 밀교를 최고의 가르침에 두고 있다. 닝마파의 족첸(Dzogchen, 大圓滿)수행은 무상요가탄트라 가운데 최고의 수행에 해당한다. 14세기 롱첸파(1308~63)는 족첸의 대가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롱첸닝틱(롱첸心髓)
☸티베트불교의 현재
청나라 건륭제(1711~1799)때 티베트인들은 달라이라마는 관음의 화신이며 청 황제는 문수의 화신이라 여기며 동등한 우방관계로 긍정했다. 청은 은혜와 위엄으로 중화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다.
1904년 영국 영허즈번드Younghusband대령의 침공과 라싸조약.
1912년 13대 달라이라마 티베트 독립선언.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함.
1950년 중국 인민군의 침략과 점령
1951년 강제 합병
1959년 민중봉기 11만 사망, 14대 달라이라마 인도 망명.
1959~1974 산발적 게릴라 투쟁(CIA의 지원 아래)
1960년대 문화혁명으로 6천여 사찰파괴, 40여만 승려 살해 혹은 투옥.
1965년 9월 티베트가 중국의 자치구(自治區)로 발족하고 식민지정책. 중화주의. 찡창열차. 라싸에 한인 진출. 티베트의 미래 불투명.
2008 라싸에 대규모 독립운동 시위,
현재 캄, 암도 지방과 다람살라에서 분신 시위가 끊이지 않음.
*14대 달라이라마는 환생을 그만둘 것인가?
1989년 티베트 제2의 지도자인 10대 판첸 라마가 숨졌을 때, 당시 달라이라마는 전통에 따라 판첸 라마의 환생을 찾아다닌 끝에 1995년 당시 6세이던 겐뒨 최키 니마를 후계로 지정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판첸 라마와 그의 가족을 연금한 뒤 걀쩬 노르부라는 소년을 11대 판첸 라마로 결정했다. 이후 달라이라마가 지정했던 판첸 라마는 실종됐다. 11대 판첸 라마를 공산당이 결정한 사건으로 충격받은 티베트로서는 차기 달라이라마마저 같은 운명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는 각오이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는 2014년 영국 BBC 방송과 인터뷰에서는 “다음에 우매한 달라이라마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슬픈 일이지만 그럴 바에야 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지금 끝내는 게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Aerial photo taken on July 30, 2019 shows the Guge Kingdom relics. 구게왕국 유적지 지형 2019년7월30일 촬영된 항공사진.
Aerial photo taken on July 30, 2019. 구게왕국 유적지 항공사진 2019년7월30일
☸구게왕국의 역사의 무대 위에서 어떻게 사라졌을까?
구게왕국(866~1630) 당시 푸랑(Purang, 카일라스와 인도 국경 사이에 있는 중개무역지)과 라다크(Ladakh), 잔스카르(Zanskar)에도 불교왕국이 있었는데, 이 네 개의 왕국(푸랑, 라다크, 잔스카르와 구게)이 때로는 합치거나 분열하면서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다. 1624년에 제수이트 교단의 선교사 안토니오 데 안드라데(Antonio de Andrade, 1581~1634)가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구게왕국까지 흘러들어왔는데(1624년) 구게왕국 왕실은 호의적으로 대하여 오랫동안 머물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유럽에서 많은 수의 신도를 잃은 바티칸(교황)세력은 위기감을 느껴 제수이트(Jesuit)교단으로 하여금 이미 식민지화가 시작된 아시아나 북미와 남미, 태평양의 섬으로 선교사를 보내 세력 확장을 꾀한다. 그들이 성경책과 거울과 시계 등 신기해 보이는 몇 가지를 원주민에게 보여주고 환심을 사면 뒤이어 총칼을 든 제국주의자들의 침탈이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제3세계 식민화 과정이다. 구게왕이 선교사에게 생활의 편의와 선교를 허용하는 관용을 베푼 것은 고난에 빠진 형제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불교도의 덕목을 실천한 것뿐이었는데, 주변의 푸랑과 라다크에서는 이를 의심하였다. 구게왕국이 서양에서 들어온 이교도를 끌어와 서양 세력과 결탁하여 이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받는다. 그래서 라다크에서 몇 차례 사신을 보내 항의를 하였으나, 구게의 왕은 개의치 않았다. 한편 불교 왕국의 한복판에 교회를 짓고 주민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도록 허용한 왕의 처사에 불안해하고 불만을 느끼는 세력도 생겨났다. 그중에서 군 지도자급 몇몇과 왕의 동생이었던 최고위직 승려가 모의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주체는 라다크 세력을 끌어들였다. 한편 라다크는 파키스탄과 카쉬미르까지 진출해있던 이슬람 세력과 접촉하여, 이슬람 용병을 고용하였다. 이슬람 용병은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살육하고 파괴하는 무자비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라다크는 이슬람 용병을 고용하여 구게를 침공하였다. 충분한 무력이 없었던 구게는 한순간에 포위되어, 수성(守城) 태세에 들어갔다. 포위당한 구게는 물과 식량이 모자라 오래 버틸 수 없었다. 더구나 용병대장은 매일 구게의 백성 1,000명을 구게의 왕이 성벽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서 처형했다. 불심이 깊은 왕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왕을 배신한 최고위직 승려는 항복하여 라다크의 속국이 되면 왕국의 명운을 보존할 수 있다고 왕에게 진언했다. 왕은 신하들과 왕족들과 상의하여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무조건 항복할 테니 백성을 더 이상 죽이지 말 것과 왕족의 안위를 보장해달라고 하였다. 구게의 왕 자신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 멀리 유랑의 길을 떠날 것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성문을 열었을 때 이슬람 용병대장은 구게의 왕뿐만 아니라 왕족과 신하, 백성들을 모두 살육했다. 겨우 200명가량이 도망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1630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건조한 바람에 바싹 마른 목 없는 시체와 두개골이 강 언저리 진흙밭에서 발굴된다고 한다. 인간이 어찌 이리도 잔혹할 수가 있을까? 모든 인간에게는 불성이 있는 반면 마성(魔性,악마의 성질)도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인간의 잔혹성 앞에는 불교도 이슬람교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잔혹사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Photo taken on July 25, 2019 shows a Buddha statue at the Guge Kingdom relics. 구게왕국 불교사원 유적 부처님상 2019년7월25일 사진촬영
[참고]구루의 땅: 아나가리카 고빈다 저서, 홍위병에 의해 파괴되기 전의 구게왕국 불교유적과 성산 카일라스의 당시 현장감을 느낄 수 있음. 초판은 절판되어, 알라딘 중고서적에서 구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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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1933년 소설>
구게왕국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안토니오 드 안드라데는 구게왕국 기행문 <대거란과 티베트기행>를 쓰서 리스본에서 출판하여 전 유럽으로 퍼졌는데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티베트의 신비에 대하여 환상을 품게 했다. 그런데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 되어 처형된 것 같다. 아무튼 그 후로도 계속 선교사들이 모종의 환상을 찾아서 아시아의 심장부 깊숙이 들어온다. 그들의 보고서와 기행문이 외부로 퍼지면서 환상은 더욱 부풀려지게 된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공전의 베스트셀러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이다. 작가는 제임스 힐턴(James Hilton, 1900~1954).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불시착한 사람들이 찾아간 곳이 샹그릴라(Shangri La). 해발 8,500미터의 카라칼(Karakal)산 밑에 있는 이상향인데 그곳은 관개시설, 수도, 중앙난방식 온열 시스템이 갖추어진 문명화된 마을이다. 이런 시설은 18세기 초 룩셈부르그에서 온 선교사 뻬롤(Perrault)이라고 하는 사람이 설계한 것이라 말하는 이 마을의 고위 라마(High Lama). 이 말을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뻬롤이다. 현재 나이는 300세라고. 한 사람은 이곳에서 탈출하여 설산의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급격한 노화현상을 일으킨다. 그곳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잃어버린 지평선(사건의 지평선을 연상시킨다)인지도 모른다. 중국 정부는 현재 중국 운남성에 있는 쫑디엔(中甸)을 샹그릴라라고 개칭하면서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