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비빔밥 조선일보 입력 2006.08.03. 19:16
전주가 고향인 작가 최일남은 "남들이 제 고장 음식을 자랑할 때마다 넉넉한 마음으로 웃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전주비빔밥이라는 든든한 '배경'에서 나오는 여유다. 그 맛엔 전주사람 아닌 이들이 더 안달이다. '밥맛 없어 밥상에서/ 마누라와 싸운 날은/ 시외버스를 타고 전주에 와/ 콩나물 국밥이나 콩나물 비빔밥을 찾을 일이요'(나태주·전주에 와). '전주 남문시장 밖/ 어느 허술한 집 상머리에 둘러앉아/ 그 비빔밥에 황포묵을 들고 싶다'(송수권·황포묵).
▶ 놋쇠 대접에 고슬고슬 지은 흰밥 한 덩이. 그 위에 올라앉은 선홍빛 육회, 아삭한 콩나물, 치자 물 들인 황포묵, 얌전하게 부친 황백 지단, 밤 은행 대추 호두 잣에 이르는 오실과…. 전주비빔밥은 오방색을 고루 갖춰 눈부터 사로잡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고명과 야채들은 맛도 빛깔도 저마다 살아 있다. 그래서 비벼먹고 나서도 개운하다. 뒤섞여 텁텁한 맛이 아니다.
▶ 전주비빔밥이 중국에서 열린 세계미식(美食)대회 비(非)중국요리 1등에 올랐다고 한다. 그리 놀랄 소식이 아니다. 비빔밥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아 한국 대표음식 첫손가락에 꼽힌 지 오래다. 대한항공은 9년 전 비빔밥을 기내식으로 개발한 이래 2000만 그릇 가까이 차려냈다. 이젠 외국 항공사들도 다투어 낸다. 국제기내식협회(ITCA)는 1998년 대한항공의 비빔밥을, 올해엔 비빔국수를 최고 기내식으로 뽑았다.
▶ 비빔밥엔 외국인은 모를 맛 이상의 맛이 있다. 우리네 삶의 달고 쓴 오미(五味)가 고명으로 얹혀 있다. 관악산 연주암엔 비빔밥 한 그릇을 점심으로 공양받으려는 등산객이 줄을 선다. 콩나물, 무채, 김치만 얹었어도 꿀맛이다. 거기 담긴 절집의 공덕이 맛난 것이다. 신경숙은 음식점에서 강된장에 보리밥을 비벼먹으며 "나는 어린 시절을 먹고 있다"고 했다.
▶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겠다고 형 아우 없이 머리를 디밀던 양푼 비빔밥, 땡볕에 모 심다 보리밥에 푸성귀와 고추장을 썩썩 비벼 먹던 바가지 들밥, 제사 모신 뒤 밥, 나물, 적(炙)들을 한데 섞어 나누던 제삿밥. 거기에 어우러진 건 너와 내가 아닌 우리였다. 김영남은 드센 세상, 비빔밥처럼 순하게 살자 한다. '뻣뻣한 말들은/ 시금치와 콩나물처럼 데쳐서 숨을 죽이고/ 가슴속 응어리는 깨서 계란처럼 지단을 부친다…고소한 맛이 나도록 감사의 변(辯)도/ 그 위에 참기름처럼 뿌린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tjoh@chosun.com)
2006년 조선일보 만물상 faneyes ・ 2023. 12. 27. 10:23
김영남은 드센 세상, 비빔밥처럼 순하게 살자 한다. '뻣뻣한 말들은/ 시금치와 콩나물처럼 데쳐서 숨을 죽이고/ 가슴속 응어리는 깨서 계란처럼 지단을 부친다…고소한 맛이 나도록 감사의 변(辯)도/ 그 위에 참기름처럼 뿌린다.'
[출처] 2006년 조선일보 만물상|작성자 faney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