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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한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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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순례하는 교회
올해 서울교구의 사목교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입니다. 이 표어를 보면서 ‘교회와 세상’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사목교서는, 지금 우리사회는 상호불신과 반목으로 치닫고 있으며 계층 간의 통합과 마음의 일치를 이루어 사회 갈등을 치유해야 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또 이러한 사회 갈등과 불안의 배경으로 물신주의적 가치관으로 인한 부와 가난의 양극화 현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일치와 화해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참된 가치와 평화를 심어주고 증거해야” 할 교회의 책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 신앙인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뜻 보기에 우리 교회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상수’(常數)이고 세상은 우리가 변화시켜야 할 ‘변수’(變數)처럼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올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 있는 교회’에서 그러한 당당한 주님의 제자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의 눈물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기에는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그러한 세상에 맞서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은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출발을 위해 행군하던 광야와 같습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축복도 있고 만나도 있고 유혹도 있고 분노와 질투 그리고 탐욕도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우리도 주변인이자 이방인입니다.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을 ‘광야’로 이해해 봅니다. 세상을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교회는 세상 안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던 것처럼 악마의 유혹과 맞서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황량하고 잡초만이 무성하고 흙먼지 바람이 휘몰아치는 ‘광야’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곳은 생명이 없어 보입니다. 모두들 떠나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을 올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살아남기 힘든 광야입니다. 이 순례의 길은 퇴로도 찾기 힘들며 오로지 그릇된 길에 들어서지 않으려고 애써야 하며 함께 걷는 이들을 위해 생명의 물, 오아시스를 찾아나서는 일에도 게을러서는 안 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사순 첫 주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에 대해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유혹을 오늘 우리에게 다시 옮긴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매김하고 있는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물적 욕망에 노출되어 있어 양적 팽창과 외형적 화려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 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주라 생각하고 다른 종교에 대해 오만과 자만을 부리기도 합니다. 사순 1주의 복음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광야의 유혹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세상으로부터의 ‘유혹’과 세상에 대한 ‘자만’을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마는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들고 와서 그 말씀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나의 의지로 듣는가 하느님의 의지로 듣는 가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지닙니다.
‘광야’는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온갖 불평불만을 터트리면서 가혹한 현실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광야는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단련시키는 학교이자 배움의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유랑공동체는 수많은 유혹과 도전을 극복하면서 하느님께 한발 한발 더 다가갔습니다. 광야는 자신의 전존재가 완전히 뿌리뽑히는 곳이면서 동시에 쇄신의 상징이 됩니다. 곧 뼈와 태를 바꾸는 ‘환골탈태’라는 존재론적 변화의 장소가 광야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곳이 광야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존재론적 변화, 곧 회개가 가능할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만을 바꾸는 회심이 아닙니다. 회개로 번역되는 희랍어 ‘메타노이아’는 사실 히브리어 ‘슈브’라는 단어에서 옮겨진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선다’는 ‘슈브’는 단지 생각과 마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실존적 생활양식 모두를 하느님께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왔다! 할 때, 그 회개는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걸라는 소리입니다. 결단의 요청입니다. 돈과 탐욕의 우상 ‘맘몬’과 하느님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도전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과연 회개의 삶, 메타노이아의 삶을 살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우리 가톨릭교회가 아닌 개신교회의 통계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08년 10월,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종교기관을 물었습니다. 가톨릭교회(35,2%), 불교(31,3%), 개신교(18%) 등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밖의 다른 통계를 보더라도 가톨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나름 도덕적 순결성을 지닌 믿을만한 종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을 계기로 해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위상은 더 높아졌습니다. 많은 개신교 신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밖에서 보는 가톨릭의 모습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빛처럼 보입니다. 혼탁한 세상에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3.14)라고 하시면서 ‘착한 행실’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하게끔 인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소금과 빛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삶은 어떤 ‘당위’가 아니라 이미 ‘존재’ 자체가 빛과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신의 짠맛을 잃지 않으면서, 또 자신의 색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음식의 맛을 더하고 부패를 막아줍니다. 또 빛은 어둠을 밝혀줍니다. 빛은 어둠의 불확실성과 위험을 피하게 만듭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교회는 빛과 소금입니다.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소금 그 자체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고, 빛이 그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위론적 명령보다는 존재론적인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더욱 엄중한 현실의 삶과 반성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탐욕과 광기’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탐욕을 시스템으로 만들어버린 사회입니다. 온 사회가 마치 광기를 내뿜듯 돈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 어느 네덜란드 선장처럼 돈이 되는 곳은 지옥이라도 항해할 태세입니다. 돛이 불타 죽을지라도 이익이 난다면 지옥의 불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처절한 용기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사상에 휘말린 우리 사회는 이미 공동체를 파괴하고 원자화된 개인의 자유만 인정합니다.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사회적인 유대나 연대니 하는 말도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철저한 자신의 이익추구만이 이 험악해진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오직 돈 만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길이 되어버렸습니다.
자본의 갑옷으로 무장한 정신의 빈곤, 지혜의 상실은 사람과 생명을 쉽게 생략하고 개발과 성장만을 걱정하는 대통령을 우리의 손으로 뽑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부자가 되는 것’이 신앙인에게도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부유함은 하느님께 열심히 의지한 은총 결과이자 선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계속 재촉하십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입니다. 부와 가난은 단지 재물이 있고 없는 경제적 문제가 아닙니다. 부와 가난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관계를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의 정치적 관계로 바꾸어 놓습니다. 가난한 자는 결코 정치적으로도 절대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유한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서 돈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돈의 노예가 되었다면 것은 권력의 맛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돈과 권력에 길들여지면 그 빛과 짠맛을 잃게 됩니다.
유신독재와 군부독재의 엄혹한 시절 속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던 한국교회의 모습은 지금처럼 화려하고 부유한 도시 중심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변방에 서 있었지만 항상 하느님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였습니다. 그 시대를 돌아보던 어떤 사제는,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려고 했지만, 결국 세상에 소금을 판 소금장수가 되어버린 꼴이 되어버렸다고 한탄을 합니다. 오늘 교회는 더 힘든 싸움을 진행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맘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 선택은 ‘세상에서 있는 자로 사느냐 없는 자로 사느냐’하는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황금이 지배하는 세상은 신앙을 교묘히 하느님의 말씀을 빙자해 더욱 왜곡시킵니다. 마치 악마가 광야에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하듯이 말입니다.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마지막을 ‘큰일’을 저지르십니다. 어쩌면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했던 갈릴래아 시절부터 예견되어 왔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본과 권력의 상징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어 놓으십니다. “강도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또는 기업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약속을 배반한 아담과 하와를 내쫓으시는 하느님처럼 단호한 예수님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그래서 ‘영원한 질서’와 과거에만 집착해서 그 어떤 변화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불변의 신앙관, 승리와 영광의 신앙에 도취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움’, 하느님 나라는 어쩌면 ‘이단’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인 행세를 하던 사람들은 참된 진리라는 불변의 핵심을 어떤 형식, 곧 율법에 가두어 놓고 고결하고 순수한 도그마로 위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믿음의 ‘핵심’은 언제나 당대의 역사적인 물음에 답하며 전승되어왔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언자의 전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매일 만나는 사람, 매일 마주치는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더 이상 비판이나 개혁이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닌 ‘없음’ 곧 비존재, 부인(否認), 부정(不定)의 대상입니다. ‘너희는 소금과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뒤엎으신 것은 어쩌면 교회의 존재론적 물음과도 연결이 됩니다. 교회가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뽑아버리시겠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정말 큰일을 치시고, 사람들의 깨우침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축복이 시작되면 생각은 멈춘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의 역사는 광야를 걸어가는 고난의 행군입니다. 축복은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마치 축복의 시간을 사는 듯 착각할 뿐입니다.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탐욕과 광기의 역사는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고 바라빠를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아무 생각 없이 승리와 영광에 도취된 교회는 또 다시 예수님을 못 박으라 소리치고 바라빠를 놓아주게 됩니다. 다음 주, 성지주일에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게 됩니다. ‘호산나, 호산나’ 찬미 소리도 높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 찬미가는 ‘십자가 형에 처하시오’라는 비명에 가까운 절규로 변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예수님은 강도의 소굴(자본)을 뒤엎으셨고, 예루살렘 성전(권력)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버리겠다
요한묵시록 2-3장은 ‘일곱 교회’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를 버리겠다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빛과 소금의 존재가 아니라면 버리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권위’는 ‘권력’이 아닙니다. 권력은 지배와 피지배를 전제로 함으로써 언제나 반지성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성이 없고 회개가 없는, 곧 생각하지 않는 관계를 이끌어 냅니다. 이러한 반지성적 요소는 교회를 내면의 깊이보다는 외형적 성장으로 판단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교회 위기 현실과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아무 말씀 없이 물끄러미 지켜보시던 그분의 눈길을 그려봅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긴다”(필리 3,9)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절실합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죄스런 현실에 있다면 그분의 마음과 눈길을 읽으면서 교회 내부의 회개와 자생적 치유와 변혁을 위한 창조적 사고를 키워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맘몬의 땅에서 끌어내려고 하십니다. ‘새로운 탈출’을 준비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이사 43,18).
요한의 묵시록에 나오는 말씀 중에서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묵시 2,5).
오민환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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