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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루란 무엇인가?
1. 나루란?
어원은 밝히기 어려우나, 백제의 두 번째 도읍이었던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을 곰나루라고 한 것이 가장 이른 시기의 나루에 관한 용례이다. 나루는 나라와 어원이 비슷하여 고대의 원시적 형태의 국가가 강가 등지에 위치하여 인근 부족의 교역을 중개하고, 한편으로 무력으로 상업적 질서를 유지한 데서 기인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는 배로써 사람이나 짐을 실어나르기 때문에 ‘나르는 곳’에서 ‘나루’라는 말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한자로 표현할 때는 도(渡)·진(津)이라고 하고 좀 큰 것을 포(浦), 대규모의 바다 나루는 항(港)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중요한 강이나 바닷목에 군사시설을 설치하고 군대가 주둔하면서 지키는 것을 진(鎭)이라고 나타내기도 하였다. 특히 큰 강 하구나 바다 항구에는 포를 많이 썼다.
그 예로는 서울의 마포(麻浦), 평안도의 진남포(鎭南浦), 황해도의 몽금포(夢金浦), 경기도의 제물포(濟物浦), 충청도의 남포(藍浦), 전라도의 줄포(茁浦)·목포(木浦), 경상도의 삼천포(三千浦), 부산 일대의 삼포(三浦 : 釜山浦·鹽浦·薺浦), 강원도의 경포(鏡浦), 함경도의 광포(廣浦) 등을 들 수 있다.
진이 들어간 지명으로는 경상도의 삼랑진(三浪津), 함경도의 어대진(漁大津)·청진(淸津), 강원도 북부 동해안의 안인진(安仁津)·화진(花津, 花津浦)·주문진 등이다. 한문으로 굳이 진·포·도라고 하지 않고 강인 경우에는 ‘나루’라고 통용하였는데 서울 한강의 광나루·동작나루·송파나루·양화나루·노량나루 등이 그러한 예이다.
원래 나루는 수운, 곧 물을 이용하는 교통의 요지이므로 시대에 따라서 물을 이용하는 교통 수단의 변화나 연결되는 육로의 개설, 교량의 건설 등의 요인에 의해 그 중요성이 변화하고 혹은 영영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또 강에 모래가 쌓여서 이전보다 얕아지고 좁아진 결과 배가 그 곳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영산포(榮山浦)와 같이 이름만 남은 경우도 있다.
나루에는 나룻배가 있어서 강을 낀 마을 사람들이 이 나롯배로 강 건너로 장 보러가기, 관청일 보기, 학교 다니기, 농사 짓기, 물건 싣기 등을 한다. 사공이 없을 때는 양쪽 강안에 튼튼한 쇠 밧줄을 걸어서 그 줄을 잡아당기며 나룻배를 움직이기도 한다.<자료:엠파스백과사전>
2. 도선권과 나루관리
조선 시대의 역참 및 조운과 같이 조세나 각종 물자 수송 등의 국익에 관계되는 각 나루의 도선 문제와 관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① 나룻배는 5년이 되면 수리하고 10년이 되면 개조하도록 하였다. 강선(江船)의 경우에 길이 50척 너비 10척 3촌 이상인 경우에는 대선으로 하고, 길이 46척 너비 9척 이상인 경우를 중선으로 하며, 길이 41척 너비 8척 이상되는 배는 소선으로 하였다(해선이나 어선도 모두 동일하였다).
② 각 나루의 관선(官船)은 선적(船籍)에 기록하고 척수를 정하여 제군문(諸軍門)에 분속시켰으며 별장을 파견하여 검사, 감독하게 하였다. 예를 들어, 광진에는 4척, 송파에는 9척, 삼전도에는 3척, 신천에는 2척, 한강도에는 15척, 노량진에는 15척, 양화도에는 9척, 공암에는 5척, 철곶에는 1척을 두었다.
③ 송파의 별장은 광진·삼전도·신천의 관선을 동시에 관리하며 이는 수어청(守禦廳)에 소속되어 있었다.한편 한강의 별장은 훈련도감에, 노량진의 별장은 금위영에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양화도 별장은 공암과 철곶의 관선을 겸하여 관리하였는데 어영청 소속으로 병조에서 임명, 파견하였다. 양근(楊根)의 용진(龍津)은 훈련도감에, 파주의 임진(臨津)은 총융청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다.
각 군문은 별장을 자유로이 임용하였고, 지방관은 진부를 정하여 복호(復戶)를 지급하였으며 사선을 임대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④ 각각 소속이 다른 선박을 타고 타 지역으로 함부로 건너가는 자는 그 신분을 막론하고 율에 정해진 대로 논죄하도록 정하였다. 이 경우 선주가 발견 즉시 관에 고발하지 않았을 때에는 동일한 죄로 이를 벌하도록 하였다.
⑤ 각 나루의 도선 및 내왕선이 파손되었을 경우 다른 선박을 가진 사람이 이를 즉시 구출하지 않을 때는 선주와 진부가 모두 장 100의 벌을 받으며 별장은 곤장의 벌에 처하도록 하였다.
⑥ 경강의 민유 선박은 매년 이를 조사하여 모두 원전에 규정된 대·중·소의 크기에 따르며 문자로 부호를 새겨 낙인을 하고, 선주의 성명을 선적에 갖추어 기록해 두고 1년에 한번씩 세금을 받아들인다. 모든 선박은 1년에 3냥을 납세한다. 그러나 선박에 낙인이 없거나 허가증이 없고 선적에 등록되지 않은 경우에는 배액을 징수하였다.
만일 공용 땔감이나 사료를 적재하고 내왕하는 경우에는 세금을 반감하여 이것으로써 나룻배의 개조에 보충하도록 하였다. 또한 전국 각 지방 나루의 나룻배는 소재지의 고을 수령이 선적을 만들어 세금을 거두며 이를 군수에 보충하고 연초 때마다 관찰사가 왕에게 보고한다.
⑦ 제궁가나 각 관청의 선박도 역시 그 척수를 정하고 선적을 만들어 감세하되 소정된 척수 이외의 선박에는 감세하지 않았다.
⑧ 어렴(漁簾)의 상선으로서 내사 및 각사에 소속되어 있는 것은 이를 모두 폐지하되 강안 나루터 사람으로서 도고(都庫)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였다.
⑨ 대로의 나루터에는 진부를 평상 10인으로 배정하였고, 한강나루·노도나루·삼전도나루에는 10인을 추가하였다. 또한 중로의 나루터에는 6인, 소로의 나루터에는 4인을 배정하였다.<자료:엠파스백과사전>
3. 우리 나라의 역대 나루
나루의 분포 유형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육로의 연결점에서 하천을 횡단하여 도하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하구에서 수로를 따라 가항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이다. 셋째는 해수로를 따라 항해함으로써 해상 통로의 통과 지로서의 성격을 발휘하거나 도해하여 도로망과 연결되는 경우이다.
도로망은 이미 고려 시대에 대로·중로·소로의 3등급으로 나누어져 체계가 확립되었으므로 이때에 이미 나루는 육로의 결절점에 발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나루의 확증은 조선 시대에 와서 비로소 드러난다. 당시에도 교량 건설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나루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특히 서울의 남쪽을 흐르는 한강변에는 상류 쪽에 광진·삼전도·두모포·한강도·노량진·마포·서강·양화진 등의 나루가 있어서 서울에서 지방으로 향하는 도로를 연결시켜 주었다.
이들은 오늘날 교량 건설로 인하여 그 기능이 상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화 과정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나 지명을 통하여 과거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점을 상기할 때, 한강 이외의 지역에도 도·진·포의 지명이 계승되고 있는 강변취락은 나루에 기원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항 종점은 자연·사회경제 조건과 관련하여 지역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연 조건의 경우, 내륙수로를 항해 활동의 무대로 보는 이상 수심이 깊고 계절 변동이 없으며 유속이 느려야 한다.
그러나 수운은 화물과 여객을 시발점과 종착지 사이에 이동시키는 목적이 있으므로 배후지의 사회경제 조건에 영향을 받게 된다.
결국 한강이 우리 나라에서 최장의 하천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륙수로의 가치가 크고, 강변을 따라 도하지로서 나루가 집중분포한 것은 조선 시대 이래 강북을 끼고 도성이 자리하여 정치·문화의 중추 기능을 가진 데 연유한 것이다.
중추 기능을 가진 통치 거점은 종속 지역의 원만한 통치를 위해서 관리의 출장과 공문서의 전달을 정기적으로 수행해야 되는 까닭에, 기능 수행과 관련된 도로망이 국토 전역을 향하여 방사선상으로 발달되는 것이다.
해로변의 나루는 다도해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다도해는 남해안과 서해안의 남부에 전형적으로 형성된 점과 관련하여 이곳으로 나루의 분포지를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나루의 공통된 입지는 한반도에서 섬으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길목은 항(項)으로 표현되므로 항이라는 지명 또한 나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진도해협의 울돌목을 벽파항(碧波項, 혹은 벽파진), 금강 하구의 하항취락을 장항(長項)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나루에서 연유한 것이다.
장항과 군산 사이에는 교량이 부설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도하선의 운행으로 연결되었고, 도하선의 운행 근거지가 되는 도선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 밖에 제주도와 연결되는 해로의 길목에는 탐진(耽津)과 이진(梨津)이, 남해도와 연결되는 해로의 길목에는 노량진이 있었다.<자료:엠파스백과사전>
4. 한강의 주요 나루터
한강은 조선 5백년을 두고 수운(水運)에 큰 구실을 하였다.
삼남(三南)의 많은 세곡이 이 한강을 통해 들어왔고, 목재나 약초, 특산물 등이 이 강을 타고 한양에 공급되었다. 당시 한양 사람들로서는 이 한강이 생활의 젖줄이었고 마음의 안식처였다.
그런 만큼 한강 주변에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다. 나루 곳곳엔 창고들이 들어섰고 야적장이 마련되었다. 나루터에 닿는 배나 뗏목 위엔 한강을 타고 들어온 지방 물건들이 그득했고, 물건 임자와 장사꾼들 사이에 흥정하는 소리가 강물 위로 늘 물결쳤다.
□ 짐배 상대로 떼부자 된 경상들
강 가에서 짐배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을 '경강상(京江商)' 또는 '경상(京商)'이라고 했다. 그들은 배로 들어온 물건들을 사서 서울 장안 사람들에게 팔았다. 막대한 이익을 챙겨 돈을 번 상인들도 많았는데, 이 때문에 세간에선 이들을 일컬어 '경강부상(京江富商)' 또는 '경강거상(京江巨商)'이라고 했다.
강가엔 경상들의 마을이 곳곳에 이루어졌다. 술집과 여관들도 많이 생겼다. 나루터엔 시골 짐배들이 닿는 외에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사람들로 해서 더욱 북적거렸다.
나루터는 한자로 흔히 '도(渡)'나 '진(津)'이라 하는데, 이것은 크기에 따른 구분이다. '도'나 '진'보다 작은 나루는 '제(濟)', '섭(涉)'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의 황하, 요하와 같이 큰 강을 건널 때는 '도하(渡河)'라 했고, 보다 작은 압록강, 한강 같은 강을 건널 때는 '진강(津江)'이라 했다. 강의 지류에 해당하는 내를 건널 때는 '제천(濟川)'이라 했고, 논밭 사이로 흘러가는 도랑물을 건널 때는 '섭수(涉水)'라고 했다.
□ 광나루에서 서빙고나루까지
서울의 한강에는 일찍부터 광나루[광진.廣津], 삼밭나루[삼전도.三田渡], 한강나루[한강진.漢江津], 서빙고나루[서빙고진.西氷庫津], 동재기나루[동작진.銅雀津], 노들나루[노량진.鷺梁津], 삼개나루[마포진.麻浦津], 서강나루[서강진.西江津], 양화나루[양화진.楊花津 楊花渡] 등이 개설돼 있었다. 이 중에서 광나루, 삼밭나루 ,서빙고나루, 동작나루, 노들나루는 '5강진로(五江津路)'라 하여 더욱 중요시되었다.
한강 물줄기는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면 그 위치가 사뭇 다르다. 이것은 홍수 또는 인위적 영향에 의한 것인데, 특히 평야가 넓게 퍼져 있는 지역에서 물줄기의 이동이 심했다.
옛날엔 잠실 남쪽으로 강물이 지났다. 이것은 옛 지도를 살펴보아도 분명히 나타난다. '송파나루'와 '삼밭나루'는 잠실 남쪽을 지난 그 한강 본류에 위치해 있었다.
송파나루는 현재의 석촌호 부근에 있던 나루로, 조선 후기에 상공업이 번성하면서 장터가 크게 이루어졌다. 송파나루의 장터를 '송파장'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객주와 거간을 비롯해 사공, 여행객, 장꾼, 장사꾼들로 크게 성황을 이루었다.
근처의 '삼밭나루'는 '한강나루(한강도)', '버들고지나루(양화도)', '노들나루(노량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4대 도선장의 하나였다.
송파나루보다 훨씬 상류쪽, 지금의 광진교가 있는 근처에 '광나루'가 있었다.이 나루는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중요 길목으로서 노량도와 더불어 태종 때에 처음으로 별감이 배치된 곳이다.
지금의 뚝섬 유원지 부근엔 '잠실나루'가 있었다. 한자로는 '잠도진(蠶島津)'인데, '독백(禿白)'이라고도 하였다. 효종 때에 이 곳에 수세소(收稅所)를 설치하였고, 조선 후기 경강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한강 상류(강원도 지방)의 목재가 물길로 많이 운반돼 왔다.
현재의 한남동 강가에는 한강나루 즉 한강도(漢江渡)가 있었다. 남쪽 연안은 모랫벌이어서 전부터 '사평리(沙坪里)'라 했는데, 이 때문에 그 쪽에서는 '사평나루[사평도.沙坪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으로도 불렀다. 조선시대 제1의 도선장으로서 판교역을 지나 용인, 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조선 초기부터 여기에는 별감이 파견되어 인마(人馬)의 통행을 보살폈다.
한강진보다 조금 하류엔 '서빙고나루'가 있었다. 이름 그대로 지금의 용산구 서빙고동 강가에 있던 나루. 본래 이 곳은 태조 때에 동빙고와 아울러 궁중에서 쓰는 얼음을 보관하던 창고가 설치됐던 곳이다 이 곳이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갖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였다.
□ 동작나루에서 공암나루까지
'동작나루(동재기나루)'는 문헌에 보면 과천현 북쪽 18리에 있다고 돼 있다. 지금의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모랫벌과 동작구 동작동을 왕래하는 나루로, 옛날엔 물이 깊어 물가운데에 '모로리탄(毛老里灘)'이라는 여울이 있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 발달한 도선장인데, 남태령을 넘어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빠지는 대로의 길목이어서 나룻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
'노들나루'는 지금의 노량진 수원지 부근이다. 이 나루는 건너쪽에서는 '새남터나루'라고도 했는데, 서울에서 시흥, 수원을 거쳐 충청 전라도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4대 도선장의 하나로서 인마(人馬)의 왕래가 많았다. 이 나루는 정조가 수원에 있는 그의 부친(사도세자.思悼世子) 능에 행차할 때 수시로 이용하였는데, 왕이 도강할 때는 배다리를 놓아 행차를 편리하게 하였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1790년에 친히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제정하여 한강 가교의 제도를 마련하고, 오가는 왕복 도강의 안전을 기할 수 있게 하였다. 연산군 때는 이 곳을 제외한 모든 진도의 통행을 금하여 강을 건너기가 몹시 어려웠고, 연료의 채취도 어려웠다고 한다.
'삼개나루'라고도 불렀던 '마포진(麻浦津)'은 지금의 마포동 즉 마포대교가 있는 곳이다. 주로 여의도를 건널 때 이용하던 나루로, 여기를 건너면 여의도 백사장을 건너 영등포를 거쳐 시흥으로 가게 된다. 서해안의 새우젓을 실은 배가 이 곳에 주로 닿아 마포 강가에는 새우젓 시장이 따로 형성될 정도였다. 지금의 서강 근처의 동막(東幕)은 이 새우젓 시장에 독을 만들어 공급하던 곳이었다. 동막은 원래 '독막'으로 독을 만드는 곳이라 해서 나온 이름이다. 도선장에는 뱃짐장수(선상.船商)들이 주로 모여들었고, 나룻배도 사선(私船: 개인의 배)이 중심이었다. 근처에 사대부들의 별장이 있어 지방에서 소작료를 실어 오는 배들도 많았다.
양화나루는 한양에서 김포 강화쪽으로 가는 중요한 나루였다. 이 양화진은 한강진, 노량진과 함께 옛날 서울 삼진(三鎭)의 하나였다. 지금의 양화대교 위쪽(상류쪽)에 있던 나루로, 여기의 배들은 건너쪽 서강과 잔다리[세교동.細橋洞}(지금의 서교동)쪽을 왕래하였었다.
조선시대의 서거정(徐巨正)은 이 나루에 대하여 이렇게 읊었다.
'양화도 어귀에서 뱃놀이하니 별천지가 바로 예로구나.
어찌 신선과 학을 타고 놀아야만 하는가.
해가 서산 마루에 지면서 황금의 물결 이루노니
흥이 절로 이누나.'
위 시의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나루는 훌륭한 뱃놀이터였다. 근처에 선유봉(仙遊峰), 잠두봉(蠶頭峰) 등 경치 좋은 곳이 많아 조선시대엔 중국 사신이 오면 대개 이 곳에서 뱃놀이 행사를 베풀었다. 선유봉은 선유도(지금의 양화대교 중간에 있는 섬)에 있던 작은 산인데, 양화대교를 가설할 때 그 산머리가 잘려 나갔다. 잠두봉은 지금은 보통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부르는, 누에머리 모양의 산으로, 지금 그 마루 위에 절두산 성당이 위치해 있다. 양화나루 부근엔 경치가 좋아 이 곳에도 장안 사대부들의 별장이 많았다고 한다.영조 때에 진(鎭)을 열었지만, 나루는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양천(陽川)을 거쳐 강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라 강화가 배도(背都)로서 중요시되던 당시엔 이 나루의 비중이 대단했었다.
조선 연산군 때엔 노량도 외의 모든 나루를 막아 버리고 나룻배를 모두 동원, 국왕의 뱃놀이에 써서 양화도 역시 쇠퇴하였지만, 중종 초기의 기록에는 나루를 이용코자 하는 사람은 많고 배는 단지 2 척뿐이어서 배에 많은 사람과 짐을 싣고 건너는 바람에 자주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조선 후기엔 어영청으로 하여금 이 곳에 별장(別將)을 두고 관리케 하였다.양화도에서 하류로 조금 내려가면 '공암나루'[공암진.孔岩津]가 된다. 지금의 강서구 가양동 궁산(宮山) 부근에 있던 나루인데, 강 건너 고양 땅의 행주와 왕래하였다. 이 때문에 건너쪽에선 이 나루를 '행주나루'[행주진.幸州津]라 하였다. 나루가 작아 양화도 관할하에 있었고 배 5척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 곳을 '공암진'이라 한 것은 강 가장자리에 구멍바위, 즉 공암(孔岩)이 있었기 때문이다.그 밖에 잠실 근처 신천동 강가에 있었던 '새내나루'[신천지.新川津], 용산에 있었던 '용산나루'[용산진.龍山津], 여의도 옆 밤섬에 있었던 '밤섬나루'[율도진.栗島津], 마포나루에서 조금 내려간 쪽에 있었던 '서강나루'[서강진.西江津] 등이 있었는데, 이들 나루도 그 근처 사람들에겐 자주 이용되던 나루였다.
서울 외곽의 유명한 나루로는 강 상류 쪽의 '뱀개나루'[사포진.蛇浦津], '용나루'[용진.龍津], '도미나루'[도미진.渡迷津]가, 강 하류쪽의 '새곶이나루'[철곶진.鐵串津], '조강나루'[조강진.祖江津] 등이 있었다.
옛 사람들의 기쁨과 눈물을 싣고 이 배와 저 배를 번갈아 보내고 받았던 한강 가의 많은 나루터. 그러나, 지금은 삐그덕삐그덕 노젓는 소리도 없고, 물결을 타고 너울너울 저 멀리까지 퍼져 갔던 사공의 뱃노래도 없다.<자료:http://www.travelevent.net/>
5. 조선시대 한성에 있었던 나루터
<자료:엠파스백과사전>
(1) 광나루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나루터. 양진, 광장, 광진, 광진도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나루터. 양진(楊津)·광장(廣壯)·광진(廣津)·광진도(廣津渡) 등의 명칭으로도 불리었으며, 진취락(津聚落)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부산까지 연결되는 영남로의 주된 간선로는 아니었으나,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파발로가 지나서, 광나루의 교통상 기능은 지속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광진원(廣津院)이 광나루 북쪽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도승(渡丞)이 있어 사람들의 내왕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당시 좌도수참전운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이 겸직으로 이 지역의 조운을 관장하였을 정도로,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는 백제 초기 몽촌토성·풍납토성 등과 연결되는 아차산성이 있으며, 삼국시대의 서울∼부산간 교통로도 이 지역을 지나고 있어, 광나루는 고대부터 교통로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광진교·천호대교가 건설되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3번국도와 강변도로가 지나고 있어 여전히 교통이 좋은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양주목(楊州牧)에 속하였으나, 1895년 행정단위의 개혁에 의하여 한성부 양주군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고양군 독도면에 속하였다가, 1949년 면 전체가 서울로 편입됨에 따라 성동구에, 1995년에는 분구에 따라 광진구에 속하게 되었다.<자료:엠파스백과사전>
(2) 용산나루
서울 용산구 이촌동 부근에 있던 한강의 나루. 1910년.
<자료:엠파스백과사전>
(4) 동작나루(銅雀)
정선 그림. 서울 동작구 동작동 부근.1700년대.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근처 한강 남안에 있었던 나루터. 일명 ‘동작진(銅雀津)’ 또는 ‘동작도(銅雀渡)’라고 하였다. 중요간선도로가 지나가는 나루터는 아니었으나 서울에서 과천으로 가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하여 많은 사람의 이용이 있었다.
진선(津船)이 5척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 나루터 부근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 尾老里灘)과 기도(碁島)가 위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과천현에 속하였다가 1895년(고종 32) 인천부(仁川府) 과천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과천군이 시흥군에 합쳐지게 됨에 따라 시흥군의 관할이 되었다.
1936년 경성부(京城府)로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에 속하게 되었고, 1946년에 영등포구에, 1973년에 관악구에, 1980년에는 동작구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강에 여러 다리들이 설치된 뒤 나루의 구실은 없어졌고, 특히 이 부근에 동작대교가 설치되어 한강을 남북으로 연결하고 과천으로 통하는 교통로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국립묘지가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동작대교
서울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동작동을 연결하는 다리. 길이 1,330m.
<자료:엠파스백과사전>
(5) 사평나루(沙平)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 있었던 나루. 용산구 한남동과 연결되었다. 사평도(沙平渡 : 모래펄나루)의 다른 명칭으로 고대에는 사리진도(沙里津渡 : 모래펄나루)라 불렸으며 조선시대는 한강도(漢江渡)라 불렸는데, 이 한강도는 조선시대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의 하나였다.
기록에 의하면 한강도는 강북의 한강진과 강남의 사평리간을 잇는 나루라 하였는데, 사평리의 위치는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사평리가 한강진의 대안이라 하였고 한강진은 현재의 한남대교(漢南大橋) 서쪽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한강도는 현재 한남대교 부근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에서 이 나루를 지나면 충청도와 경상도 방면의 대로와 연결이 되어 교통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처음은 도승(渡丞)을 두어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피도록 하였으나 뒤에 별장(別將)으로 고쳤다. 나루에 속한 선박은 최고로 많을 때는 15척까지 있었으며 주로 관공리(官公吏)의 출입이 있었던 곳이다.
교통의 요지로서의 역할 이외 한강변의 암석에 척촌푼수(尺寸分數)를 새기고 표(標)를 세워 한강의 깊이를 측정하는 임무까지 겸하였다. 조선시대 서울로 들어오기 위한 주요관문이었던 사평나루는 한남대교의 가설로 경부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의 구실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다.<자료:엠파스백과사전>
(6) 송파나루(松坡)
서울특별시 송파구 송파동 지역에 있었던 조선 시대 한강변의 나루. 본래 이곳은 서울의 외곽을 지키는 송파진(松坡鎭)이 있어 별장(別將)이 다스렸는데, 별장은 송파나루 외에도 삼전도(三田渡)·동잠실(東蠶室)·광진(廣津)·독음(禿音) 등의 나루터를 함께 관할하였다.
이곳은 서울과 광주(廣州)를 잇는 중요한 나루터로 땔나무와 담배 등을 서울에 공급하였다. 송파는 나루터보다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더 컸다. 조선 시대에 이곳에는 270여 호의 객주집이 있어 전국의 10대 상설 시장 중의 하나로 번성하였다.
이는 서울 주변의 일반 상인들이 시전상인(市廛商人)들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피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이나 관동 지방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을 이곳에서 미리 사들여 도가상업(都家商業)의 근거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피해를 받는 시전 상인의 항의가 있었으나 광주유수(廣州留守)가 이를 막아 송파 시장은 계속 유지되었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와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송파의 시장 기능은 쇠퇴하였다.
나루터의 기능은 1960년대까지 뚝섬과 송파를 잇는 정기선이 운항되어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말 강남 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샛강의 매립과 교량의 건설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7마당 9거리로 구성된 〈송파산대놀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200여 년 전 이곳 시장 거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한강 유역의 비옥한 퇴적평야 지대로 백제의 초기 도읍지로 알려진 곳이다. 몽촌고분군(夢村古墳群)과 백제의 토성이 남아 있으며, 올림픽 경기장의 일부가 형성되어 있다. 부근의 가락동 시장은 옛날 송파 시장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다.<자료:엠파스백과사전>
(7) 마포나루
서울 마포구 마포동 부근에 있던 한강의 나루. 1910년대.
<자료:엠파스백과사전>
(8) 양화진
양화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인데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권2 산천조에 의하면 "양화도는 서강나루에 있는데 처음에는 나루지기인 도승(渡丞)을 두었으나 후에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고 관방조(關防條)에는 "양화진은 1754년에 설치한 것으로 어영청 소속으로 별장이 있고 아장(牙將)이 200명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외 각종 문헌에도 양화나루에는 나루지기가 있으며 방어를 위한 진(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松坡鎭)한강진(漢江鎭)과 함께 서울 3진(三鎭)으로 요충지였다.
잠두봉 서쪽의 양화대교 동쪽지점인 양화나루를 큰나루라 하였으며 맞은편은 안양천이 유입되어 합류되는 지점을 연결하였다. 이 나루는 바다와 통해 있으므로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공세(貢稅)와 미곡을 서강의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 전용항구였다.
조선초에는 용산강을 한강 으뜸의 항구로 쳤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하류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1591년의 기록이나 1636년의 기록에서는 수위가 얕아져 양화나루 이상은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양화나루는 병인박해 결과 가져온 프랑스함대가 하중동까지 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으며 개항 무렵에는 서양의 배가 자주 정박하였고 일본과 중국·독일 소속의 상선이 서울과 인천사이를 정기운항하는 기착지로 되었다. 이에 따라 지금의 양화대로는 개항 이후 서양 문물의 서울 진입로가 될 수 있었다. <자료:http://nuri.mapo.seoul.kr/>
(9) 뚝섬나루
서울 성동구 성수동 부근의 한강 나루. 1950년대.
<자료:엠파스백과사전>
목계나루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동계길 29-1
목계나루의 역사
목계는 예로부터 수운과 육로의 요충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의 문물이 집산되던 곳이다.
목계나루는 1930년대 서울과 충주 사이에 충북선 철도가 놓이기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 물류교역의 중심지였으며,나라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수곡선 20여 척이 서로 교차할 수 있을 정도의 내륙항 가운데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다.
충청도는 물론이고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일부의 지역과 연계소통하며 성황을 이루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 나루이다.쌀이나 소금 등을 실은 배가 수시로 드나들고, 배가 들어와 강변장이 설 때면 각지에서 장꾼과 갖가지 놀이패와 들명이들이 왁자하게 몰려 난장을 벌이고 북새통을 이루었다. 조선 후기의 5대 하항중 하나라 해서 오목계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800여 호에 이르는 주민들이 상업 활동에 전념 할 정도로 번성했으며 다양한 유무형의 문화유산이 현재 계승되고 있다.
6. 경기도지역
(1) 두지나루 : 연천군 고랑포로 가던 나루터로 현재는 임진강 황포돛배가 운항하는 승선장으로 활용되고 있음.
(2) 임진나루 : 임진도 임진강 유역의 대표적 나루로 관북과 관서지방으로의 분기점이 되었으며 임진진을 두어 관리하였으며 중앙정부의 총융청에 소속됨, 파평면 율곡리 화석정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선조의 의주파천의 길목 이었음.
(3) 낙하나루 : 『대동지지』 장단조에 낙하진이란 명칭이 중복되어 보이는데 덕진 하류에 있으며 교하와 통하는 길이라 하였음, 현재 탄현면 낙하리 임진강변에 위치하며 장단면 석곶리로 통하였음.
(4) 이산포 나루 : 삼국시대부터 한강으로 이어진 큰 나루 강 건너 통진 나루와 교류가 활발했으며 나루터가 있는 마을에 작은 산 2개가 있다고 하여 이산포라 불렀음.
(5) 행주나루 : 고양지역의 대표적이 나루터로 서울로 들어가던 배들이 물때를 기다리며 머물던 큰 나루터로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다 삼국시대로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용되된 나루터였음.
(6) 해포나루 : 한강이 있는 행주산성에서 창릉천을 따라 약 1Km 상류에 위치한 옛날 나루터로 작은배가 들러와 거래가 이루어졌으나 한강에 제방이 막혀 점차 사라짐.
(7) 토막 장자마을 남서쪽 한강변에 토막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나무토막 여래개를 모아 만든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토막나루라 불림.
(8) 미음나루 : 안동김씨 후손의 호를 따서 붙여진 나루터로 한강 광나루에 버금가는 곳으로 『동국여지승람』에 “미음진의 주위 동쪽 70리에 있어 광주로 통한다” 라고 되어 있으며, 평구역에서 광주로 이르는 남북교통로의 요지.
(9) 용진나루 : 골용진 조안면 송촌리 양평대교 좌우에 있던 나루로 양주(조안면)와 양근(양평)을 연결하는 나루, 용진은 조선시대 수군참군이 있었던 장소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배들을 관리 감독하던 곳.
(10) 내미련나루 : 화도읍 금납리와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를 연결하던 나루로 1960년 중후반까지 배가 다녔으며, 큰물이 날 적마다 금남리를 휩쓸 듯이 내밀어“내미련”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음.
(11) 금남리나루 : 화도읍 금남리와 양평군을 연결하는 나루터로 이용되고 있으며, 금남3리 “하버클럽 파라” 팻말이 보이는 도로변의 강변에 그 터가 남아있음.
(12) 사기막나루 : 사기막 과거 가평군 외서면의 사기막마을과 왕래하던 수상교통으로서 현재 북한강변 구암수상스키장이 위치하고 있음.<자료:경기도청>
7. 강원도지역
(1) 청령포나루
조선시대 유폐된 단종이 마을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동강의 통로였다.
영월 팔경의 하나로 풍치가 빼어나기로 소문난 청령포는 단종의 한을 안은채 지금은 영월지방 최고의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 뿐만아니라 유배역사의 한 장을 짚어 보려는 의식있는 여행들을 끊임없이 불러모으는 역사의 장이 되고 있기도 하다.
청령포는 영월시내에서 승용차로 십여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한강의 상류인 서강의 한복판에 마치 섬처럼 동서 북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절벽과 산으로 막혀있어 귀양지로서는 이를데 없는 지세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청령포에 들어가기 위에서는 청령포 앞의 작은 나루에서 배를 타야 하는데, 이용객이 있을때마다 수시로 사람을 태워 나른다.
작은 나룻배를 타고 청령포 안으로 들어가면 한 여름에도 선선한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한껏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그늘 아래에는 아직도 단종의 행동을 제한했던 금표비와 단종 유배비가 옛모습 그대로 자리잡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으며, 단종의 애타던 모습을 보고 들었을 것이라 해서 이름지어진 '국가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349호인 관음송'이 보호되고 있다.
또 관음송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단종이 아침저녁으로 올라 서을을 바라다 보았다던 노산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영월 서강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같다.뿐만아니라 노산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청령포 옆의 넓은 백사장은 야영과 수영을 할 수 있어 여름철 나들이 장소로는 더할 데 없는 곳이다. <자료:야후!거기>
8. 충청남도지역
곰나루
충남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금강의 나루터. 공주의 옛이름으로 고마나루라고도 하였다.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에 있는 금강의 나루터. 시내의 서북쪽 4㎞ 지점에 있다. 공주의 옛 이름으로 고마나루라고도 하였다. 이 지명은 그곳에 사는 한 어부가 인근 연미산의 암콤에게 잡혀가 부부의 인연을 맺어 두 명의 자식까지 두었으나, 어부가 그곳을 빠져 나와 도망치자 암콤이 그것을 비관하여 자식과 함께 금강에 빠져 죽었다는 데서 유래되고 있다.
백제어에는 동물명을 따온 지명이 많은데, 특히 곰〔熊〕을 딴 지명이 많고, 곰나루도 한자로는 웅진(熊津)·웅천(熊川)으로 쓰인다.이곳에 구전되는 곰설화는 우리 개국신화인 단군신화와 같이 곰 토템사상을 보여주는데, 백제인이 곰을 신성한 원시 종교의 대상으로 여겼던 민간 신앙적 사유가 보인다. 삼국 시대에 이곳을 통하여 중국과 문화를 교류하는 등, 근대적 교통의 발달 이전까지만 하여도 군산·강경 등지의 소금·건어물 등 지방 특산물이 집산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백제의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을 받아 피살되고 수도 한성이 함락되자, 개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주왕은 천연적 요새지이고 수륙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으로 천도하여 백제가 다시 흥하기를 꾀하였다.이로써, 문주왕 이후 성왕대까지 64년간 이곳은 백제의 왕도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한 뒤 당나라에 의하여 도독부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 백제의 영화와 숨결을 알려주는 무령왕릉 등 귀중한 유물·유적이 산재한다. 또, 아직도 일본에 이와 유사한 지명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고대 한일 관계에서 우리 문화, 특히 백제 문화가 끼친 영향을 증명해 준다.근대적 교통의 발달과 함께 수운을 중심으로 한 이곳의 교통 요지적 기능은 상실되었고, 금강교의 준공(1933.11.)과 더불어 서해안 지구로 통하는 도강(渡江)취락적 기능마저 상실되었다. 그러나 이 일대는 넓은 백사장과 울창한 노송의 자연 경관과 함께 많은 문화재의 보고로서 점차 관광 도시로서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자료:엠파스백과사전>
(2) 강경포
충남 논산시 강경읍. 전라북도와 연결하는 금강의 나루.
<자료:엠파스백과사전>
(3) 한진나루
충남 당진군과 경기 평택시를 연결하는 삽교천의 나루.
<자료:엠파스백과사전>
9. 전라도 지역
(1) 벽파진
전남 해남군과 육지를 연결하는 나루.
<자료:엠파스백과사전>
10. 경상도 지역
(1) 개진나루
경북 고령군 개진면. 고려시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운반한 나루로 전한다.
<자료:엠파스백과사전>
(2) 대암나루
대구 달성군.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 중의 하나다.
<자료:엠파스백과사전>
(3) 화개나루
경남 하동군과 전남 구례군을 있는 섬진강의 나루.
<자료:엠파스백과사전>
지역 | 하천 | 나루터 및 포구 | 창고 | 비고 |
나주 | 亭子川 松只川 長城川 鶴橋川 鵲川 | 錦江津 會津江津 水多津 竹浦津 吾山津 夢灘津 鍾南津 | 榮山倉 西倉 南倉 三鄕倉 船所倉 | |
장성 | 可川 文筆川 黃龍川 九登川 | |||
정읍 | 䲭川 木梯川 金川 北川 | |||
옥과 | 方梯川 仙脚川 | |||
창평 | 盤石川 甑巖川 高山川 竹䋬川 金鷄川 | |||
동북 | 梨存川 | |||
화순 | 十川 冷川 道川 䋐所川 三川 伐古川 | |||
능주 | 車木川 | 東倉 | ||
남평 | 支石江 | |||
강진 | 鵲川 錦江 | 九十浦 | ||
남원 | 鶁子江 ○川 | 東倉 西倉 | ||
임실 | 烏原川 鶁川 葛潭川 雲巖川 | |||
곡성 | 大荒川 描川 | 鶁子津 鴨綠津 | 社倉 | |
구례 | 鴨綠江 ○水江 所兒川 | 鴨綠津 ○子津 文江津 杮木津 | 海倉 | |
광양 | 蟾津江 東川 西川 | 草南浦 骨差浦 蟾居浦 車衣浦 巨乙亡浦 善薩浦 穿浦 頭耻津 錢卓津 | 海倉 船所倉 | |
완산 | 鴈川 南川 三川 大也所川 | 新倉津 | ||
금산 | 錦川 古川 新川 猉嘶川 後川 廣石江 | |||
진산 | 郡川 | |||
고산 | 龍巖川 龍鷄川 | |||
여산 | 篤子川 | 羅巖倉 司倉 | ||
익산 | 扶桑川 (萬鏡江) | 春浦 | ||
용안 | (錦江) | 倉山浦 金頭浦 | ||
흥덕 | 蟹川 烏川 | 仙雲浦 沙津浦 | ||
고창 | 竹川 叅橋川 | |||
영광 | 道鞭川 板下川 鶴橋川 藁橋川 | 法聖浦 | 法聖倉 海倉 西倉 | |
무장 | 羅斥川 三川 飛川 | 細十浦 黙堂浦 今勿礖浦 景浦 高田浦 塩浦 古里浦 仇市浦 石橋浦 冬栢亭浦 | ||
부안 | 海倉 | |||
고부 | 訥堤川 雨日川 鵲川 鬱橋川 猪川 | 海倉 | ||
광주 | 黃龍川 南平川 巾川 忝川 | 碧津 生鴨渡 仙巖渡 幷火老津 穴浦 | 西倉 | |
담양 | 原栗川 北川 大橋川 薪川 | |||
순창 | 赤城川 伊川 淄川 巖川 | 赤城津 | ||
승평 | 玉川 | 白也串 洛水津 潺水津 廣津 成生津 掘浦 龍頭浦 東山浦 萬興浦 其叱乙浦 呑潛浦 城倉浦 助音浦 馬頭浦 龍門浦 称浦 沙岸浦 長省浦 柳浦 | 海倉 富有倉 石堡倉 | |
낙안 | 東川 西川 開谷川 白亭川 | 場巖浦 眞石浦 大浦 斷橋浦 | 海倉 船所倉 | |
흥양 | 鍾川 | 八浦 礜會浦 長先浦 狗浦 古邑浦 | 楊江倉 松串海倉 松林倉 船所倉 | |
장흥 | 海倉 | |||
벽사 | 亭于川 | 非陽浦 龍頭浦 倭津浦 | 倭津倉 船所倉 | |
무주 | 赤川 | 豊倉 西倉 北倉 | ||
진안 | 東川 西川 | 新倉 | ||
용담 | 壽成川 達溪川 朱子川 程子川 | 伊浦 | ||
장수 | 狐川 南川 楓川 食川 飛川 | 西倉 溪倉 北倉 | ||
운성 | 廣川 東川 楓川 | 羅浦倉 | ||
함평 | 大橋川 | 酒缸浦 道里浦 | 海倉 | |
무안 | 沙湖江 注龍江 登山江 | 海倉 船所倉 | ||
영암 | 德津浦 | 海倉 西倉 玉泉倉 梨浦倉 | ||
해남 | 石川 | 碧波津 大津 周梁 鳴梁 別津浦 三寸浦 亐音吐浦 笠巖浦 淙川浦 漁城浦 竹城浦 | 海倉 船所倉 | |
진도 | 浴實川 | 海倉 社倉 | ||
함열 | 南堂浦 熊浦 㝊浦 | 聖堂倉 社倉 | ||
임피 | 羅浦 西浦 | 海倉 羅里浦倉 | ||
옥구 | 龍塘江 | 社倉 | ||
김제 | 狐浦 長信浦 | 海倉 | ||
금구 | 母岳川 新增邑川 | |||
태인 | 入川 南川 |
지역 | 하천 | 나루터 및 포구 | 창고 | 비고 |
충주 | 南漢江 | 浦灘津 辰浦 早遯津 北津 金遷津 玉江津 河潭津 山溪津 靑龍津 德恩津 仰巖津 撻川津 | 可興倉 北倉 南倉 | |
괴산 | 南川 北川 | |||
연풍 | 伊火川 鷄立川 | |||
영춘 | 義豊川 南川 伐海川 大谷川 車衣谷川 加也川 任縣川 | 南津 北津 | ||
제천 | 屯池川 | 周浦 | ||
청주 | 鵲川 輞川 靑川川 大橋川 | 梧根津 | 靑川倉 薪院倉 北倉 | |
천안 | 邑前川 大川 | 市浦 丹場浦 靑池浦 | ||
옥천 | 虎灘津 赤登津 化仁津 | |||
문의 | 南川 | 筏田津 道谷津 利遠津 黙潭津 | ||
목천 | 伏龜亭川 山方川 葛田川 升天川 萬化川 華淸川 | |||
보은 | 龍川 | |||
영동 | 高塘江 松江 深川 東川 楓川 | |||
청산 | 南川 | |||
공주 | 錦江 三岐江 日新北川 柳浦川 銅川 省川 大田川 | 今尙津 羅城津 錦江津 山城津 熊津 半灘津 | ||
임천 | 錦江 場岩江 | 仇郞浦 古 多津 浪淸津 菁浦津 南塘津 上之浦津 | 海倉 | |
한산 | 錦江 | 上之浦 朽浦 㩺浦 瓦浦 芽浦 鎭浦 | 江倉 | |
전의 | 生拙川 西部川 北部川 多雲川 | |||
정산 | 金剛川 | 汪津 | ||
회덕 | 甲川 | 利遠津 | ||
진잠 | 溪龍川 w大屯川 新院川 | |||
연산 | 布川 居士里川 增北川 豆 麻川 汗三川 | 草浦 | ||
니성 | 大川 石橋川 | 草浦 | 海倉 | |
부여 | 白馬江 金剛川 | 古省津 大王浦 光之浦 良丹浦 | 海倉 | |
석성 | 白馬江 甑山川 | 觀音浦 湖津 江倉浦 水湯浦 猪浦 | 江倉 | |
연기 | 東津 | |||
홍주 | 金馬川 | |||
서천 | 吉山浦 芽浦 龍堂津 長巖津 | 海倉 | ||
서산 | 海倉 | |||
태안 | 楓川 | 海倉 | ||
면천 | 泛川浦 | |||
온양 | 布川 加里川 | |||
홍산 | 稱造川 金川 臨水○川 | |||
덕산 | 揷橋川 薪橋川 | 九萬浦 頓串浦 | 海倉 | |
청양 | 於乙項川 西川 鵲川 | |||
비인 | 鍾川 | 海倉 | ||
남포 | 大川 | 靑淵浦 | 海倉 | |
결성 | 十許川 廣川 龍臥川 | 海倉 | ||
보령 | 院隅川 蟻坪川 㐲兵川 龍頭川 玉溪川 大川 | 海倉 | ||
아산 | 船橋川 谷橋川 蓬湖川 | 大甮浦 介浦津 貢津 白石浦 唐浦 市浦 屯浦 蟾浦 驛坪浦 牛坪浦 | 貢津倉 | |
신창 | 彌勒川 | 獐浦 大浦 加野浦 丹也浦 | 浦倉 | |
예산 | 無限川 | 大興倉 靑陽倉 禮山倉 浦倉 | ||
해미 | 大母川 邑川 | 良林浦 淵橋浦 | 海倉 | |
당진 | 彩雲浦 | |||
황간 | 長川 石川 |
지역 | 하천 | 나루터 및 포구 | 창고 | 비고 |
대구 | 琴湖江 新川 | 東安津 達川津 | 江倉 | |
경주 | 伊川 蛟川 西川 堀淵川 東川 | 兄山浦 八助浦 | ||
안동 | 琴召川 花川 斜川 禿川 | 映湖津 犬項津 | ||
진주 | 南江 矗石江 菁川 | 雲堂津 召南津 | ||
성주 | 馬浦川 伊川 伽川 小伽川 | 東安津 沙門津 茂溪津 | 東安倉 | |
청송 | 南川 安德西川 椒川 | |||
동래 | 汎魚川 絲川 | |||
창원 | 主勿淵津 兄耳浦 沙火浦 馬山浦 餘音浦 | |||
상주 | 北川 南川 洛東江 영水 錦水 | |||
함양 | 濫溪 瀶川 㵢溪 嚴川 西溪 | 義倉 德倉 任倉 | ||
영천 | 南川 西川 北川 泛魚川 茲乙河川 匙川 | 慈(川)倉 東倉 南倉 西倉 北倉 | ||
금산 | 甘川 直指川 | |||
의성 | 長川 下川 黃山川 鳳凰川 | 佳音倉 召文倉 安平倉 玉山倉 | ||
영덕 | 玉溪 五十川 浦內川 三江 | 骨谷浦 南驛浦 | ||
고성 | 三千浦 唐浦 蛇梁浦 舊所非浦 | 統營倉 別餉倉 | ||
선산 | 洛東江 甘川 蔚洲川 | 余次里津 緋山津 陶淵津 太祖津 江倉津 | 海平倉 | |
인동 | 洛東江 北川 淨塵川 숙巖川 | 漆津 | 中旨倉 若木倉 | |
칠곡 | 琴湖江 泗水 所耶江 八莒川 | 江倉 八莒倉 牛巖倉 | ||
하동 | 蟾津江 橫川 | 蛤津 | 古縣倉 | |
울산 | 太和江 語連川 堀火川 面夜江 | 猪內浦 魴魚津 | ||
김해 | 虎溪 黃山江 三义江 薪橋川 龍塘江 | 主浦 磊津 德橋浦 佛巖津 大山津 舂津 | 雲倉 海倉 蒜倉 | |
영해 | 赤川 大川 | 柄谷浦 網谷浦 高城浦 大津 | ||
밀양 | 海陽江 ○川 來進川 | 守山津 鈒浦 龍津 | 外西倉 守山倉 三浪倉 北倉 金谷倉 南倉 漕倉 | |
거제 | 九川 光山川 屯德川 新川 | 海倉 漕倉 | ||
거창 | 瀯川 阿月川 會川 加祚川 | |||
청도 | 紫川 雲門川 楡川 | 上東倉 下東倉 | ||
초계 | 黃沌江 溪水 | 黃步院津 押洞津 三鶴津 甘勿倉津 | ||
경산 | 黃栗川 南川 五木川 | |||
남해 | 凍川 大川 巴川 | 漕倉 別餉倉 | ||
순흥 | 東川 竹溪 赤德南川 遇溪 | 東倉 | ||
개녕 | 甘川 | 山倉 | ||
예안 | 汾川 溫溪 | |||
영일 | 兄山江 | 注津 浦項津 林谷津 | 浦項倉 | |
장기 | 東川 西川 灘川 | 海倉 | ||
영산 | 岐音江 桂城川 | 買浦津 同步浦 雩浦津 松津 | ||
예천 | 瀼川 沙川 大谷灘 | 司倉 | ||
榮川 | 臨川 沙川 藏嚴川 | 영주 | ||
흥해 | 南川 北川 曲江 | 沙浦 漆浦 | 浦倉 | |
풍기 | 南川 北川 殷豊東川 殷豊西川 | 殷豊倉 | ||
양산 | 黃山江 | 孤浦 內浦 伽倻津 火猪浦 仇邑浦 東院津 仇法津 | 甘同倉 | |
함안 | 大川 別川 聲川 (南江 洛東江) | 道興津 昻巖津 石浦 大浦 桑木浦 松川浦 無限浦 都吐谷浦 | 西倉 | |
곤양 | 金城江 唐川 | |||
합천 | 倻川 南汀川 澄心川 | |||
자인 | 觀瀾川 烏休川 | |||
영양 | 大川 將軍川 靑사川 | 靑사倉 | ||
칠원 | 大川 西川 | 麻田浦 龜山浦 于叱浦 | 海倉 | |
문경 | 所耶川 加恩川 | |||
안의 | 東川 渭川 | 東倉 玉山倉 | ||
진해 | 東川 西川 | |||
진보 | 新漢川 巴川 虎鳴川 | |||
함창 | 串川 猪谷川 利安川 | |||
지례 | 甘川 | 西倉 南倉 | ||
고령 | 伽川 龍潭川 開山江 | 江倉 | ||
현풍 | 洛東江 龜川 車川 | 沓谷津 馬丁津 寡乙浦 | ||
단성 | 梁川 丹溪川 | 新安津 | 司倉 丹溪倉 | |
군위 | 幷川 南川 東川 畵巖川 | |||
의흥 | 南川 垂溪南川 | |||
신녕 | 西川 慈乙阿川 | |||
창녕 | 勿琵川 南川 藿川 兎川 洛江 | 甘勿倉津 梨旨浦 牛山津 蔚津 馬首院津 朴只谷津 | 西倉 | |
장기 | 長田川 古村川 鷺井川 淸江川 | 無知浦 伊乙포 加乙浦 冬栢浦 公혈浦 碁浦 禿伊浦 月來浦 火士乙浦 | 海倉 | |
삼가 | 深川 水晶川 | |||
화안 | 南川 | |||
의령 | 岐音江 黙丁川 世干川 | 鼎巖津 亐叱浦 朴津 | ||
하양 | 南川 | 司倉 | ||
용궁 | 沙川 省火川 箕川 | 河豊津 | ||
봉화 | 買吐川 道義川 | 司倉 | ||
청하 | 介浦 二岐路浦 ○穴浦 古松羅浦 桃李浦 | |||
언양 | 南川 鷲城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