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난 주동자 배중손(裴仲孫)과 고려 삼별초군은 어디 갔는가?
배중손이 죽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보이지 않는다. 후세에서 珍島에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에 그칠 뿐이다.
고려사의 삼별초의 난 관련 중요 부분을 발췌한다.
卷二十六 世家 卷第二十六 元宗 11年 5월 23일 (1270)
壬戌 宰樞會議復都舊京, 榜示畫日, 三別抄有異心不從, 擅發府庫.
재추들이 옛 도읍으로 환도를 결의했으나 삼별초가 다른 마음을 먹고 명령을 거부하다.
卷二十六 世家 卷第二十六 元宗 11年 6월1일 (1270)
六月 己巳朔 將軍 裴仲孫, 指諭 盧永禧等領三別抄叛, 逼承化侯溫爲王, 署置官府, 以大將軍 劉存奕, 尙書左丞 李信孫爲左右承宣.
장군 배중손,로영희 등이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승화후 왕온을 왕으로 삼다. 대장군 유존혁을 상서좌승으로 이신손을 좌우승선으로 하다.
卷二十六 世家 卷第二十六 元宗 11年 8월19일
丙戌 三別抄入據珍島, 侵掠州郡. 矯帝旨, 令全羅道按察使, 督民收穫, 徙居海島.
삼별초가 진도로 들어가 주군을 약탈하니 전라도안찰사에게 명을 내려 백성을 감독하여 섬에 살게하다.
卷二十六 世家 卷第二十六 元宗 11年 9월4일
辛丑 將軍 楊東茂·高汝霖等, 以舟師討珍島, 賊入長興府, 殺京卒二十餘人, 擒都領尹萬藏, 剽掠財穀.王遣使安撫.
장군 양동무 고여림 등을 시켜 전함으로 진도를 토벌하였다. 삼별초가 장흥부를 침략하여 병사 2십여 명을 죽이고 도령 윤만장을 사로잡고 곡식을 빼앗았다. 왕이 사자를 보내 타이르다.(진도 용장산성 추정)

卷二十七 世家 卷第二十七 元宗 13年 6월 29일(1272)
乙卯 遣將軍 羅裕, 將募兵一千五百五十餘人, 討三別抄于全羅道. 時賊旣入濟州, 築內外城, 恃其險固, 日益猖蹶, 常出擄掠, 濱海蕭然.
장군 나유를 시켜 병사 1550명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게 하다. 당시 삼별초가 이미 제주도에 들어가 안팎으로 성을 쌓고 험고함에 기대어 항상 노략질을 하니 인근 바다가 적막 하였다. (제주도 항파리토성 유적 추정)
卷二十七 世家 卷第二十七 元宗 14年 4월 28일(1273)
庚戌 金方慶與忻都·茶丘等, 以全羅道一百六十艘·水陸兵一萬餘人至耽羅, 與賊戰, 殺獲甚衆, 賊衆大潰. 斬金元允等六人, 分處降者一千三百餘人于諸船, 其元住耽羅者, 按堵如故. 於是賊悉平, 使將軍 宋甫演等, 留鎭而還.
김방경,흔도,홍다구등 전라도 함선 160척, 수육군1만명이 탐라에 이르러 삼별초와 싸워 대부분을 잡아 죽이니 크게 무너졌다. 김원윤 등 60명을 참하고 항복한자가 배에 탔던 1천3백여명이 되었다.

이 와당은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1273년 고려장인 제조 명문이다.
1273년 제주도에서 려-몽 연합군에 전멸당하기전 삼별초군의 일부는 이미 류쿠(오키나와)로 남행 한 것으로 보인다.
그 중에 배중손이 있었을것이다.

당시 수렵과 채취로 연명하던 수준의 오키나와(류쿠)에 13세기말 갑작스런 문명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즉 고려의 경질도기가 제작되고 건물에 고려명문 기와가 얹어 졌으며 오키나와 전역에 수많은 고려식 석성이 건설되었다.


고려의 요녕과 하북의 천리장성도 이 형태와 똑같다.

고려인 에이조왕(英祖王)은 누구인가?
卷二十八 世家 卷第二十八 忠烈王 卽位年 7월 12일 (1274)
丙戌 金方慶帥征東先鋒別抄, 啓行.
김방경이 정동선봉별초를 지휘해 일본 정벌에 나서다.
따라서 삼별초군은 일본정부에 식량과 연합하여 대항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274년 려-몽연합군의 일본규슈 정벌과 정세 판단상 삼별초군에 협력을 소극적으로 대응했던것으로 보인다.




오키나와는 류쿠왕국으로 14세기부터 조선과 각별한 조공관계를 맺는다 이후 일본은 조선을 1592년 침략한후 그 여세를 몰아 에도막부에서 류쿠왕국을 정벌한다.
원주민보다 월등한 문화를 갖고 진입한 1273년의 고려인들 그래서 오키나와는 연원적으로 고려의 분국으로 불려도 좋을것이다.
그들에게 남은 제주도 풍습과 21세기 지금도 일본으로 부터 독립을 주장한다.
심제 글.
첫댓글 고려삼별초가 현 제주도에서 항거하다 일본규슈로 옮겼다고 주장하면 재야에서는 반응을 하지 않는다. 모르는것인지 외면하는 것인지 역시 사학계와 마찬가지로 그 편협함과 옹졸함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