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4.金. 수치는 상승중이지만 눈 느끼기로는 선선하며 맑음
04월29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5.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국민학교 6학년 눈으로 바라보는 1966년의 세상이란 당시 국민학교 6학년에게 물어보아야겠지만 1966년에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수많은 아이들은 모두 환갑·진갑이 지나서 이제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육십 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1966년이란 시절을 지나기는 했으나 그 뒤로 더 길고도 더 다양하며 한층 굴곡진 시간들을 보내느라고 그들은 세상에 서너 바퀴씩 휘둘린 사람들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1966년보다는 1986년이, 또 그보다는 2016년 또는 2018년이 더 필요하고 중요한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겠지요. 어떤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축복이란 망각忘却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 축복은 추억追憶이나 기억記憶이라고 말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억을 물리적양으로 환산할 때면 망각이 축복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억을 추억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서정抒情의 울림이라고 화학적 변화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억이란 세상의 풍요와 상상의 근거를 제시하는 밑천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현재 가치기준으로 본다면 1966년이란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문화·예술적으로 저급하고, 위생적으로 열악한 후진국 수준의 모습이겠지만 기억이나 추억 가치기준으로 본다면 놀라운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꿈이 약동하는 세상이었습니다. 라면에 피자나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알지 못했고 기본적으로 인심人心이 좋고 물맛이 좋으니 고추장과 된장이 맛있는데다가 햇살과 바람이 좋으니 기관지암이나 식도암, 폐암 등이 별로 없던 시기였습니다. 어느 날부터 주택가 도로와 골목길을 파고 쇠파이프를 묻는 상수도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돗물에 섞여있는 소독약 냄새와 밍밍한 물맛에 익숙해지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뽐뿌물이 여전히 좋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서는 한동안 시골에서 올라온 사촌형들과 동생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국민학교부터 대학교에 걸쳐있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였든지 아령이나 역기와 곤봉, 원반 등 운동기구가 많았습니다. 그 틈새에 끼어서 나도 운동을 하곤 했는데 아직 유산소운동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여서 거의 근력운동 위주라 아이들에게 마땅한 운동이란 줄넘기정도였을 것입니다. 마침 그럴 즈음에 힘과 대對 일본 자존심의 대명사였던 프로레슬러인 역도산과 김일이 우리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김일과 육상선수 신금단을, 그리고 니노 벤베누티와 싸워 곡절 끝에 챔피언이 된 김기수와 박신자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목청 좋게 외치면서 구두통과 아이스께끼 통을 짊어지고 다니던 아이들의 따~꺼와 께~끼가 울려 퍼지는 길거리 풍경風景도 눈에 익숙한 경치들이었습니다. 커피에 사카린를 타서 대접으로 처음 마셔본 것도 그 즈음이었고, 학교에서 나누어주던 네모난 옥수수빵과 바케쓰에 담긴 노란 옥수수죽도 기억보다는 훨씬 맛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우리들의 당대 사회상社會相을 보여주는 압권壓卷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은 쥐잡기 운동과 쥐약장수 영업방침이었습니다. 우선 쥐잡기 운동이란 쥐를 잡아 꼬리만 잘라 봉투에 담아가는 방식인데 학교에 납부한 쥐꼬리는 선생님들께서 무엇에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우리 동네 쥐약장수는 자못 유명한 바가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동네를 순회하는 쥐약장수는 ‘살라면 사고 말라면 마씨요오~ 누가 아순가 봅씨다아~’ 하며 돌아다녔습니다. 물론 아쉬운 가정집 주부들은 그 소리를 듣고 달려 나가 쥐약을 사서 집안 곳곳에 놓았는데, 아차하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쥐약을 덜컥 먹고는 눈이 벌개져서 앞뒤로 뛰어다니다가 거품을 물고 죽는 일이 종종 발생했습니다. 쥐약을 먹고 죽은 쥐는 쥐죽음이라 그랬든지 무덤덤했는데 쥐약을 먹고 죽은 개죽음은 왜 그리 불쌍해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건너온 원조용 밀가루가 지천至賤으로 넘쳐났습니다. 우리 집에서 10여분 거리에 계림시장이 있었는데, 그 시장에서 파는 밀가루 국수가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토요일이면 양푼으로 하나, 커다란 냄비로 가득 양껏 사다가 온 가족이 포식을 했습니다. 국수 가격도 무척이나 저렴해서 찜통만한 양푼으로 하나 해봐야 삼사십 원 정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맑은 콩나물국하고 빨간 고춧가루로 무친 네모난 깍두기가 맛이 있었습니다. 콩나물국에 고추장을 풀어 맵싸하게 만든 후에 밥을 말아 콩나물국밥을 한 숟가락씩 퍼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새큼하게 익어가는 깍두기를 한 입 넣어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 입안이 시원해지는 게 ‘바로 이 맛이야’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때 같이 울고 웃으면서 한 집에서 따끈따끈한 생활을 했던 형님과 동생들은 그때 시류에 따라 군인이 되고, 건축사가 되고, 선생님이 되고, 은행원이 되고, 농장주가 되고, 의사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봄소풍을 갔는데 그때 앞에 나가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 대부분이 군가인 청룡은 간다~나 맹호부대 용사들아~를 불렀습니다. 1965년도에 월남에 파병되었던 청룡과 맹호부대의 승전보가 극장 상영용 뉴스영화인 대한 늬우스를 통해 알려지면서 월남소식이나 관련된 말인 베트콩이나 꽁까이, 월남치마 같은 용어들이 유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때를 같이해서 가수 송춘희의 ‘수덕사의 여승’ 이라는 노래가 히트를 했는데,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 라는 노랫말은 지금 보아도 운치가 있는 가사입니다. 그렇지만 수덕사에는 견성암見性庵의 여승뿐만 아니라 한 명 그리고 14년 뒤에 또 한 명 더 총무원장까지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송춘희 가수도 몰랐을 것입니다. 먼저 가신 총무원장께서는 수덕사 황하루 앞 기념바위에 새겨져있는데, 뒤에 오신 총무원장은 어디에 새겨지게 될는지 아마 잘 모르실 것입니다. 큰스님은 크게, 작은 스님은 작게 뿌린대로 걷을 테지만 마치 송춘희 가수가 몰랐던 것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