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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 누가10:38-42 □
황현숙 (협성대학교・신약학)
I. 본문 번역
38 그들이 여행하던 중 그는 어느 마을로 들어 가셨는데 마르다라는 이름의 어느 여인이 그를 맞아들였다.
39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아우가 있었는데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시중을 드느라 분주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서 “주님, 제 아우가 저 혼자 시중들게 버려두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 그녀에게 저를 도와주라고 하십시오” 하였다.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온갖 걱정하며 부산을 떨고 있구나
42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 마리아는 그 좋은 편을 택했고 그것은 빼앗기지 않은 것이다 ”
II. 본문의 실상
누가복음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첫번째 부분은 예수의 활동 준비 및 갈릴리 활동기 (1:1 -9:50) 와 둘째 부분은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기(9:51 -19:28)이며 마지막 부분은 예루살렘에서의 활동기 (19:29-24:53)이다. 우리의 본문이 소속되어 있는 곳은 두번째 부분 예루살렘 여행기이다. 이 부분에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라는 말이 수시로 나온다 (9:51, 53 ; 13:22, 33;17, 11; 18:31; 19:11, 28). 그리고 특히 이 부분은 누가의 특수 자료와 예수의 말씀 자료로 되어 있다(9:51-18:14) .
이 이야기는 사랑의 이중 계명에 대한 말씀에 이어 이웃사랑의 본보기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예화 다음에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위의 단락과 교차적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계명에 대한 사랑은 그의 말씀을 듣는 것, 그것이 곧 생명을 주는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여행하시는 노정에서 일어난다.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마을이 장소로 등장하며 두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가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요한복음에서도 우리의 본문과 대조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요한 11:1이하 ; 12:1이하) 요한복음에서는 이 마을이 베다니로 지칭된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요르단강 쪽으로 3km 쯤 떨어진 곳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미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직접 가까이에 도달해 있다. 그러나 누가는 베다니라는 지명에 대한 전승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누가가 마가, 마태의 영향 아래 예루살렘이 불신의 도시로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곳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가까운 이 마을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고 본다(슐라터)
III. 본문 주석
< 38절 >
그들이 여행하던 중 그는 어느 마을로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는 이름의 어느 여인이 그를 맞아 들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계획하신 목표(예루살렘)로 향해 가시는 도중에 어느 마을로 들어서신다. 이 도입부는 내용상 중요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본들에서 몇 가지가 수정되어 있다 (VEn de. 라는 간단한 서두 대신에 많은 사본들은 VEge,neto de. evn 으로 되어 있고 또한 auvto.j 앞에 kai,가 삽입되어 있다). 이 마을에서 예수께서는 마르다라는 이름의 여인의 손님이 되는데 이 이름은 여주인이라는 뜻으로 아랍어 mar 의 여성 명사이다. 그녀는 아마도 과부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지만 그것은 단지 추측이다. (이스튼과 마샬) 이 절은 “그를” auvto,n 으로 끝나는데 다른 사본들에서는 “집안으로” eivj th.n oivki,an 가 뒤에 첨가되어 있거나 또는 “그녀의 집안으로” eivj th.n oivki,an auvthj 가 첨가되어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의미상의 변화는 없다 .
< 39절 >`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아우가 있었는데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다. 이 두 자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요한복음 12장 이하에서 마르다는 역시 이곳에서처럼 잔치 일을 돌보고 마리아는 예수께 값비싼 향유를 붓는다. 그러나 누가복음 7:36-50 에서 울며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자는 죄인인 한 여인으로 나타난다. 도유 사화는 마태26:6-13, 마가14:3-9, 누가7:36-50 그리고 요한12:1-8에 수록되어 있다. 원래 도유 사건은 어떤 여인에 의해 한 번 일어난 사건인데 전승 과정에서 변화를 겪게 되어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고 있다 (정양모, ⌈마르코 복서⌋,115). 또한 누가복음 8장 2절에서는 귀신 일곱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보았고 (마가 15:47), 맨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고 (마가16:1), 부활하신 예수를 본 여인이다 (요한20:11-18). 카톨릭 전승은 우리의 본문에 나타나는 마리아를 요한복음11:2와 12:1 이하에 근거하여 도유 사화와 귀신 들렸던 자로 나타나는 막다라 마리아와 같은 여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승의 여러 과정을 감안할 때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버린다. 또한 누가복음의 도유 사화 7:36-50에서 이 여인은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로 지칭되고 있는데 얼마 안 가서 우리의 본문에서는 도유 사화와는 전혀 관계없는 듯한, 한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듯한 여인으로 소개된다. 아무튼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스승으로 소개되고 마리아는 학생이다. 그녀는 그 당시 스승과 학생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흔한 자세대로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다 (비교. 가말리엘의 발치 para. tou.j po,daj Gamalih.l 행22:3) 슐라터는 여기에서 식사 때의 상황을 연상하고 있다. 예수께서 식사 때에 식탁을 대하고 있고 여주인이 전적으로 시중을 들어야 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특이하게도 이 선생은 한 여인을 제자로 허락해 둔다. 그 당시 유대교 랍비들은 여인들이 배우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여인들 앞에서 토라를 해석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관습에서 마리아가 식사 시중을 들지 않고 스승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일 수 있다.
이 구절에서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중요한 호칭이 나온다. 예수를 o` ku,rioj (주) 라고 칭하며 “그의 말씀을 들었다” h;kouen to.n lo,gon auvtou 라는 표현은 이미 부활 이후의 교회 전승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교육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헬레니즘 공동체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주”라는 호칭은 예수께서 높여진 이후의 헬레니즘 공동체에서 고백한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호칭이 편집 작업에 의해 수정되었을 가능성도 열어 놓는다.
< 40절 >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시중을 드느라 분주했다. 그래서 그녀는 가서 “주님, 제 아우가 저 혼자 시중들게 버려두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 그녀에게 저를 도와주라고 하십시오” 하였다.
이 절에서 이 이야기에서 중심 되는 긴장이 표출된다. 마르다가 부산하게 활동하는 것과 마리아가 조용히 말씀을 듣는 것이 대조되면서 표면상의 충돌이 마르다 편에서 제기된다. 마르다의 행동은 여주인의 의무를 이행한 것이다. 이미 그녀는 그녀의 동생에게 자신을 도와 자신들의 자매가 책임져야 할 손님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요청했을 것이다. ⌈디아코니아⌋ diakoni,a 는 음식 준비와 같은 집안에서의 봉사를 가리키며 식사 때에 시중을 들며 대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peri. pollh.n diakoni,an 은 예수 및 그의 제자들, 즉 손님들의 수를 감안하게 하며 그녀의 힘겨움의 크기를 분간하게 한다.
마르다는 예수께 다가가 불만을 토로하며 그가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한다. 예수께서 그녀의 동생에게 그들의 시중을 들도록 명령할 것을 청한다. 왜냐하면 동방의 관습대로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할 권리가 손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 마르다는 지금 그녀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신념을 그녀의 사고의 틀 안에서 관철시키고자 한다. 여인들이 자신들에 의해 초대된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이 당연함 안에 들어오지 않는 마리아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비난에 대해서 마르다는 자신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동조해 주실 것과 동시에 더 나아가서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고쳐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39절과 40절에서 두 자매의 행위가 대조되면서 최고조의 긴장에 이른다.
< 41절 >
그러자 주님께서는 대답하여 그녀에게 말씀하셨다 .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온갖 걱정을 하며 부산을 떨고 있구나”
이 절은 42절과 함께 서로 다른 여러 가지 본문을 갖고 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라는 이중 호칭은 팔레스틴적이다 (누가 22:31 ; 사도 9:4 ; 누가 6:46). ⌈메림나스⌋ merimna/|j 는 종종 불신앙 때문에 갖게 되는 세상적 태도를 표명하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관심을 갖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다. ⌈토뤼바제⌋ qoruba,zh| 는 ‘문제를 일으켜 걱정하다’를 뜻하나 드문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현 존재 상황을 밝히 드러내 보인다. 상대방의 행위를 비난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마르다에게 예수께서는 그녀의 현재의 삶을 밝히 드러내는 계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 42절 >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니라. 마리아는 그 좋은 편을 택했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 절도 역시 41절처럼 여러 가지 다양한 독법을 갖고 있다.(참조 e`no.j de, evstin crei,a: P45 A C Q Syrcur; ovligwn de, evstin crei,a: Syrhierarm ; ovligwn de, evstin crei,a hv. e`no,j : B Orig. D 사본은 42a절이 삭제된 짧은 본문을 갖고 있다. 확대된 본문이 교훈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짧은 본문이 더 원래의 것에 가까울 것이다.)
예수께서 마르다의 행위를 대해서 새로운 차원의 해석을 시도한다. 너는 너 자신 스스로 너무 많은 수고를 한다. 그 수고는 사실 거의 필요하지 않고 한가지만이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마르다에게서 보호한다.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청종함으로써 좋은 부분을 선택했다. 이것은 그녀에게서 뺏어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형). ⌈아우테스⌋ auvvth/j 는 ⌈메리스⌋ me,rij 와 연관되어 있고 그 선택한 것으로부터 그녀는 빼내어져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리아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며 이것을 예수께서는 확증해 주신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봉사 활동과 말씀을 듣는 것 사이에 갈등과 알력이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이미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예수의 말씀에서 찾고자 했을 것이다.
IV. 전통적 해석
바클레이는 그의 주석서에서 이 단락을 두 성격의 충돌이라는 제목 하에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 이야기만큼 성서에서 언어를 절약하면서 등장 인물의 특성을 생생하게 부각시킨 것은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함께 이곳에서만 나타나는데 두 자매의 성격에 대한 묘사는 요한복음과 일치한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활동적이며 또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조용한 사람도 있다. 각자가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활동적인 사람은 자리에 앉아서 사색하고 명상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차이는 옳고 그르다는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마리아도 필요하며 마르다도 귀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초점은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역할을 인정하는데 있다.
이 본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해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구원 사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향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내적 긴장 가운데에 자신의 의지를 펼치고 있다. 그를 맞이한 마르다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선의 것을 그녀의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를 위해 드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위해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한 마르다 자신에게도 어떤 의미가 있는가 ?
지금도 교회의 궂은 일을 뒤에서 묵묵히 도맡아서 담당하는 일꾼들이 많다. 특히 그러한 일들은 이 이야기에서의 마르다처럼 여성들의 점유물이다. 또한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과 봉사에 의해 교회의 구석 구석이 유지되고 선교 사역이 결실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서 수행되는 우리의 모든 수고와 봉사의 동기를 다시 한번 되묻게 하고 있다. 무엇을 위한, 무엇을 목표로 향한 봉사인가 ? 마르다는 그의 주님이신 예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으며 그녀의 노력이 모자라 자신의 자매까지도 그녀의 일에 동참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그녀가 하는 일들의 중심은 예수가 아니었다. 사실 그녀가 노력하고 수고하는 일들은 많은 염려와 근심을 야기시키는 일이며 이 일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죽으러 가는 예수의 구원 사업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 그 봉사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따라서 쓸데없이 분주하고 세상적인 일에 염려하는 마르다는 예수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갖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육체적인 떠들썩한 세상적 행위가 아니라 영적인 일임을 강조하다. 예수의 발치에 앉아 예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행동은 진정한 제자가 누구인가 대해 가르치고 있는 한 말씀 (누가 8:19-21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 누가 9:57 -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 따라서 이 말씀은 바쁜 일상의 삶 가운데 침묵하여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도 모르고, 선한 행위나 봉사 활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는 것을 잊어버린 채 선행을 위한 당위성에 쫓겨서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삶의 정황을 밝혀 주고 있다. 이러한 정황 가운데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항상 깨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의 평정을 찾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다. 필요한 것 한가지 그 좋은 선택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말씀임을 감지해야 할 것이다. (비교 10:25)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이며 따라서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누가 12:31;마태 6:33)
V. 새로운 선포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육적인 일 (또한 세상적인 일) 과 영적인 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 또는 활동적인 (동적인) 성격과 정적인 성격의 대조에 초점을 맞추며, 마르다가 향한 행위에 대비시켜 마리아가 선택한 일에 가치를 높이는 쪽으로 해석해 왔다.
사도행전 6장 2-4절의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재정 출납을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 에서 나오는 것처럼 말씀을 듣고 전하는 것이 최선의 신앙인의 자세로 부각되어 있다. 물론 우리의 본문도 마리아의 선택을 통해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필요한 으뜸 되는 한가지임을 강조한다. 마르다는 마리아에게서 이러한 최선의 선택을 탈취하고자 하며 자신의 봉사 활동을 대치시키며 따를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본문을 좀 더 깊이 숙고해 보면 이러한 선택의 대립 구조 너머에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전하시고자 하는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바로 마르다의 처신이다. 이야기에서의 대립 구조는 외형상으로는 봉사 활동과 말씀을 듣는 것, 마르다와 마리아의 성격적 대립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내용상 엄밀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의 초점은 마리아가 선택한 것과 마르다가 선택한 것 중,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 라고 하는 양자 택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삶의 정황, 즉 그녀가 선택한 행위, 그것을 인정해 주시 않고, 자신의 선택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방을 비난하고 있는 마르다의 비난을 불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습관으로 아우의 처신을 부당한 것으로 공공연히 비판하고 그 비판에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르다의 생각은 주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의 형식적인 교차대칭구조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선택한 세상적 영적 행위에 있지만 내용상의 대립 구조는 바로 상대방에 대한 마르다의 비난과 그 비난을 받는 대상에 있다. 오늘날도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는 문제, 기도와 활동, 봉사 활동과 말씀의 경청 및 말씀의 전파, 일상생활과 신앙생활, 신앙의 성숙과 사회 정의 참여, 육체적 삶과 영혼의 삶의 대립 등이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내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메세지는 이러한 이원적 삶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옳다는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기본적인 관계에 있어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모든 것을 획일화시킨다. 영적 생활은 이래야 한다든지, 신앙생활은 이래야 한다든지, 너무나 많은 규범으로, 기준으로 상대방을 정죄하고자 한다. 그 중의 대표적인 인물로 마르다는 마리아를 정죄하고 있다. 손님이 왔을 때 여자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그녀는 자신 생각의 정당성을 요구한다. 이러한 생각은 바로 자기 자신을 행위의 척도로 삼는 것이다. 나처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식의 자기 판단을 예수님께서는 경계하고 계신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서 그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당시의 유대교 관행을 거스르는 것이다. 예수께서 인간들을 대하시는 모습은 이러한 모든 구조적인 관습과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 넘어 인간 개개인을 온전한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화되고 획일화된 사회에서일수록 신앙인의 삶은 개인 다양성을 존중하고 북돋아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이 한 몸이라는 말은 각 개인이 똑 같아야 한다는 각 개인의 개인 획일화가 아니라, 각기 다른 각 개인의 개성의 전체적 조화를 의미한다. 같다라는 의미에서의 하나란 없다. 모두가 다 똑같다면 그것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다. 모두가 다 다르면서 다양한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 그것은 하나일 수 있다 (고전12). 각 개인의 다양한 개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며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할 때 그 사회는 건전해지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선택한 최선의 것이 어느 것이든 마리아에게서처럼 빼앗겨지지 않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언제나처럼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우리가 받게 되는 수많은 비난들, 즉 마르다가 하는 비난들, 종교적이건 세상적이건 간에 그 비난들에서 마리아에게서처럼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모든 다양한 삶을 인정하고 한쪽으로만 치우쳐 가는 사고를 경계하며 어느 누구에게나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깊은 사랑과 그 사랑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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