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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서장(序章). 지기(地氣)가 들끊는 땅 제1장. 산사(山寺)를 다녀 오던 날 제2장. 일락서산(日落西山) 제3장. 우국(憂國)의 밤 제4장. 운막향(雲幕鄕)의 후예들 제5장. 운명의 그림자 제6장. 종손(宗孫)의 반역(反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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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산사(山寺)를 다녀 오던 날
◇ 두 친구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일 년 전인 무오년(1918년) 단옷날―.
오늘은 액막이 단오빔 차림으로 각종 민속놀이를 즐기던 중오절(重五節) 큰 명절, 또한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빗고 풍년 농사를 하늘에 빌던 기풍명절(祈豊名節)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월달 신축일(辛丑日)에 황룡포에 면류관을 쓴 나라님이 만백성들의 풍년농사를 위해 원구단(圜丘壇)에 친행하여 기곡대제(祈穀大祭)를 올려 주던 그때가 그리워진 겨레의 가슴마다 조국 광복을 염원하는 구국의 불심이 용솟음치고 있는 것일까?
사월 초파일 연등제를 올리고 한 동안 깊은 적막 속에 묻혀 있던 고을 안의 크고 작은 사찰마다 구름 같은 신도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모처럼 단오 불공이 장엄하게 봉행되고 있었다. 삼한 시대의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시절에 처음 쌓고, 조선 성종 때 개축한 밀양 읍성 안의 무봉산(舞鳳山) 정상부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 무봉사(舞鳳寺)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부터 연이어 밀려들었던 불공 인파는 해가 서산마루에 설핏해질 무렵에야 겨우 빠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불공 왔던 신도들이 거의 다 돌아가고, 산자락에 자욱하던 향불 냄새마저 까마득한 절벽 아래쪽에서 치켜 부는 응천강 강바람에 밀려서 거의 다 걷혀 갈 무렵이었다.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 나절의 햇살은 아직도 수면 위에서 갓 피어난 물안개처럼 숲속에 자욱한데, 신록이 꽃처럼 피어나는 이 고즈넉한 무봉사의 오솔길을 따라 산책을 하듯이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젊은이 둘이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상이 느껴지는 그들 두 사나이는 날이 저물고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어깨를 맞대고 황톳빛 비탈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기분좋게 한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일세!”
절간 쪽을 돌아보며 한 사나이가 말했다. 나뭇가지에서 가지로 옮아 다니는 산새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사위는 죽은 듯이 고요하다.
“아깝다니, 누구 말인가?”
다른 사나이도 그의 시선을 따라 방금 걸어온 뒤쪽을 힐끗 돌아다본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 위의 능선을 따라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산사 쪽으로 기어오른 오솔길이 투명하도록 여린 신록 사이로 꿈결인 듯 아스라이 뚫려 있다. 짙푸르게 우거진 산죽(山竹)의 군락 사이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길가의 산철쭉은 바야흐로 한지에 쏟아 놓은 선혈빛 물감처럼 가지마다 뭉게뭉게 농담(濃淡) 짙은 화무(花霧)를 피워 올렸는데, 짝을 찾는 산새들이 그 꽃구름 사이를 넘나들며 연분홍빛 정분을 내듯 이따금씩 재재재 뱃쫑 뱃쫑! 하고 은방울 소리를 내면서 지저귄다.
뒤따라 내려오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뒤에서 느껴졌으나 흐드러진 꽃구름 수풀에 가려서 그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자운(紫雲)이라고 밝힌 그 학승(學僧) 말일세!
청아한 젊은 목소리가 상큼한 꽃향기를 타고 저만큼 방초(芳草) 우거진 길섶 수풀께로 표현히 흘러간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산새들에게도 쉬이 흐르는 꿈같은 계절이 아쉬운 것일까? 하늘하늘한 녹둣빛 여린 수풀이 겹겹이 우거진 호젓한 산길, 나무 그늘에서 그늘로 아롱거리며 끝도 없이 이어진 좁다란 오솔길은 아름드리 수목 사이로 꿈길처럼 열렸는데, 길 따라 굽이 따라 일편단심으로 붉은 산철쭉 꽃향기 그윽하니 짝을 찾아 우짖는 산새 소리마저 꿈결인 듯 아련하다.
“자운 스님이 왜?”
의아해하는 젊은 얼굴에 호기심이 선연하다.
“첫 인상부터가 어딘지 모르게 범상치 않아서 하는 말이네! 무림의 고수 같은 늠름한 풍모에다 온유함 속에서 발하던 그 강렬한 맑은 눈빛이 퍽 인상적이었거든!”
“사람하고는 참…. 신학문을 익힌다며 일본 유학을 다녀오더니 사람이 오히려 아주 구식이 되어 버렸군 그래! 자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관상을 보고 다녔는가?”
“그런 건 아니지만…. 왜, 사람에게는 직감이란 게 있지 않는가?”
"직감? 그 사람에 대한 직감이 대체 어떠했기에 하는 말인가?"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나 할까. 무쇠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는 균형 잡힌 체형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첫인상이 잿빛 승복 속에서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네!"
"그래? 하기야 나도 자네의 그 직감에 대해서는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다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젊은이들의 얼굴에서도 주변의 산목련 같은 싱싱한 미소가 개화하듯이 화안하게 피어난다.
둘 다 이십대 후반쯤은 되었을까. 한 사람은 훌쩍 큰 키에 챙이 넓은 대갓을 쓴 쪽빛 도포 차림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 약간 작았으나 역시 훤칠한 키에 검정색 왜색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머리에는 검정색 중산모자(中山帽子, bowler hat: 둥근 테가 달린 펠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구식과 신식으로 차림새가 상반된 두 젊은이는, 그러나 오랜 죽마고우나 지기지우라도 되는 듯, 오가는 말투부터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전혀 흉허물이 없어 보인다.
“이보게, 운사(雲史)! 우리가 이렇게 어깨를 맞대고 여유롭게 한담(閑談)을 나누며 걸어 보는 게 얼마만인가?”
도포 차림의 사내는 새삼스럽게 만감이 교차하는 듯, 정다운 벗의 얼굴을 거나하게 바라다본다.
“자네와 둘이서 이 길을 걸어 보는 게 내가 예림서원 경학원을 뛰쳐나온 이후로는 처음이니까, 꽤 오래된 것 같군 그래!”
“정확히 칠 년만이네, 칠년! 그때 자네가 일본 유학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이 길을 걸으면서 한 말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네!”
“우리들의 우정에 관한 얘기 말인가?”
“어디 우정뿐이었던가?”
“오호라. 한쪽이 아들을 낳고 다른 한쪽이 딸을 낳으면 사돈을 맺자고 했던 그 태중언약(胎中言約) 말인가 보군 그래!”
“이 사람 말을 빙빙 돌리긴…. 물론, 태중언약도 하였지만 그것 말고 그 다음에 한 약조 말이네!”
“그럼 뭐란 말인가?”
“어허, 이 사람 좀 보게. 벌써 잊었는가? 십 년이 넘도록 동문수학하던 조선 유학(儒學)을 무정하게 던져 버리고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나에게 위로삼아, 아니 되돌릴 수 없는 정표처럼 하였던 그 약조 말일세!”
“이 사람, 나는 또 뭐라고! 몸은 떠나도 마음만은 하나로 남아 자자손손 변치 말고 이어 가자고 한 그 말 말인가? 안심하게나, 중산! 한학을 하건 신학문을 하건, 나의 근본은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변함이 없다네! 책임 있는 토반(土班)의 후예가 타국의 물을 조금 먹고 왔다고 해서 그 마음이 어디 변할 리가 있겠는가?”
“칠년이면 조금 먹은 건 아니지! 이보게, 운사. 하지만 나는 자네도 믿고 운명도 믿는다네!”
“운명?”
“그렇다네. 자네와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아이들까지 같은 운명의 끈으로 묶여 있다는 생각 말일세! 권속 많은 사대부 집안의 종가에서 태어난 문중 종손이 무엇인지, 집안 어른들의 등쌀에 못 이겨서 자네보다 훨씬 일찍 장가를 들었다가 앵도화 같은 딸을 가슴에 묻고 천일기도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던 끝에 겨우 금쪽같은 종손(宗孫)을 보았는데, 그것도 자네와 둘이서 나란히 한날 한시에 똑같이 득남을 하게 되다니. 이게 어찌 천지신명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것도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하다는 단오절 길일의 운세를 타고 나란히 태어났으니 말이네! 사돈이 되자던 태중언약은 애석하게도 깨어지고 말았지만, 우리가 똑같이 득남을 한 건 사돈지간이 되는 그 이상의 유대를 가지고 망국의 시대고(時代苦)를 대를 이어 함께 헤쳐 나가라는 천지신명의 뜻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천지신명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감개무량한 중산이라는 선비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비장감마저 묻어난다.
“천지신명의 명령이라…!”
“우리는 지기(地氣)가 태양처럼 뜨겁게 넘쳐난다는 밀양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일세!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유서 깊은 이 고을의 대표적인 토반(土班)의 후예로서 누린 것이 많았던 만큼, 밀양 유림의 뜻을 모아 우리가 함께 책임져야 할 일도 그만큼 많이 있지 않겠는가?”
“들어 보지 않아도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네!”
그러면서 운사로 불리는 사내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자기들이 함께 책임져야 할 일이란 게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리라.
“우리 둘이서 자식을 낳으면 서로 사돈이 되자며 태중언약을 한 것이 언제였던가? 그런데 사돈지간의 인연 대신 한날한시에 각기 득남의 기쁨을 먼저 누리도록 하였으니 이건 우연이 아니라, 필시 천지신명과 우리 양대 문벌의 선조님들께서 깊은 뜻이 있어서 점지해 주신 어떤 필연일 걸세! 설령, 끝내 사돈지간이 못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우리의 우의와 삶이 다음 세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게 하려는 운명적인 필연 말일세!”
꽃 같은 여식을 가슴에 묻고 남 다른 고통 끝에 얻은 농장지경(弄璋之慶)이라, 아버지로서의 기대와 책무 또한 그만큼 크고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챙이 넓은 갓에 도포 차림을 한 중산이라는 선비는 새삼스러운 듯, 감회에 젖어들며 신록 사이로 아득하게 뚫린 먼 데 하늘을 한참 동안이나 부신 눈으로 바라다본다.
그는 상남면(上南面) 동산리(東山里)에 사는 민정식(閔廷植)이라는 사람으로, 그곳의 오랜 토반(土班)인 여흥(驪興) 민씨(閔氏) 이참공파(吏參公波) 동산리 지손 종가(支孫宗家)의 차세대 당주(當主)였고, 양복 차림의 젊은이는 지근(至近) 거리에 있는 읍성의 터줏대감격인 밀양(密陽) 손씨(孫氏) 문중의 신진 사류로서 성내에 사는 손태준(孫泰俊)이라는 일본 동경 유학생 출신의 인텔리였다.
그들은 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관학유생(館學儒生)으로 숙식을 함께 하면서 한학을 익힌, 가장 촉망받던 막역지우로서 같은 또래의 아들딸을 엇갈려 얻게 되면 서로 며느리 사위로 삼자며 태중언약(胎中言約)까지 했던 각별한 사이였다. 그런데 낳고 보니 둘 다 아들이라, 그 약조는 이미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나라는 망했어도 백성들의 명절 신명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가슴 속 어딘가에 이직도 남아 있었더란 말인가. 멀리, 어디선가 이따금씩 농악패들의 풍물소리와 함께 군중들의 함성이 꿈결에서인 듯 아득하게 들려온다. 탄력 넘치는 이 지방 고유의 <밀양백중놀이> 가락에 실려 오는 함성이다. 올해도 송림이 우거진 건너편 삼문리의 응천강 모랫벌에서 고달픈 일상을 잊은 민초들의 단오놀이가 조촐하게나마 벌어진 모양이다.
“이보게, 운사! 유수 같은 게 세월이라더니 벌써 맹하(孟夏)일세. 하지만, 큰일이네 그려! 우리의 지식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된 이 마당에 저 아이들의 앞날인들 어디 평탄하겠는가?”
갓으로 그늘진 중산의 얼굴에 안개와도 같은 우수가 문득 어린다.
“우리의 지식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다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운사가 적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으나 중산의 얼굴 표정엔 아무런 변함이 없다.
“나라가 패망하고 말았는데, 우리네의 구식 학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말일세!”
중산은 동산리 여흥 민씨 밀양 이참종파 문중의 동산리 지손 종가의 종손으로서, 그리고 부친의 일을 대신하고 있는 차세대 당주로서 자신이 몸소 뼈저리게 느껴 온 오욕의 역사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비탈진 숲 속을 빙 둘러본다. 화란춘성(和蘭春城)하고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더니, 문자 그대로 꽃이 활짝 피어 성안에 가득하고 바야흐로 만물이 약동하는 호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쓰라린 역사의 생채기는 수풀 곳곳에도 어김없이 남아 있었다.
아득한 그 옛날 서기 3세기 경에 변한(弁韓) 12소국 중의 하나였던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 시대에 처음 쌓고 조선 성종(成宗) 때에 개축했다는 유서 깊은 이곳 밀양 읍성의 성벽들은 왜놈들이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응천강 철교의 교각용 석재로 이용하는 바람에 남문에서 서문 사이는 모조리 헐려 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고, 그나마 무사했던 이곳 무봉산 기슭의 성벽마저도 왜인들이 공사(公私)를 가리지 않고 암암리에 빼내어 쓰는 바람에 형편없이 허물어져서 성벽 속에 채웠던 잡석만이 산비탈 곳곳의 잡초 더미 속에 피압박 민족의 주검처럼 처참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신학문이 들어왔다고 해서 자네의 그 해박한 한학이 반드시 퇴색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위로 삼아 이렇게 응수한 운사도 딴은 공감이 되는지 길게 한숨을 내쉰다.
“…하기사, 나라 꼴을 생각하면 피통이 터질 일이지만, 그래도 이럴 때일수록 더욱 심기를 굳건히 하고,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미래를 도모해야 하지 않겠나? 나의 신학문과 자네의 한학이 합쳐지면 아무도 우리를 무시하지는 못할 걸세! 우리 둘이 아직은 서로 사돈으로 맺어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앞으로 그렇게 될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오지 않겠는가?”
“글쎄, 우리의 뜻대로 과연 그렇게 잘 되어 줄까…?”
무상한 게 세월이라, 중산은 영 믿지 못하겠다는 투다.
“그래서 사돈이 못 되었어도 아이들끼리 친형제처럼 운명을 같이하며 상부상조하며 살아가게 하려고 오늘 이렇게 축수 불공도 나란히 함께 올리지 않았는가, 이 사람아. 우리야 우리들이지만, 저 아이들한테 무슨 죄가 있는가 말일세!”
“지당하신 말씀이네! 왜놈들의 서슬 푸른 무단 정책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속속 불거져 나오는 판국이니…. 정말이지, 나는 앙천맹서(仰天盟誓)컨대 이런 식민 치하의 욕된 모습을 우리 아이들한테까지 결코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네!”
“그거야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생각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더구나 우리는 안동과 쌍벽을 이루는 유서 깊은 유향(儒鄕)이자, 왕성한 지기(地氣) 때문에 충의 열사가 넘쳐났던 밀양 고을의 뿌리 깊은 선비 집안의 후예들이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 상남면 ․ 상동면 ․ 하남면의 여흥 민가들은 임진왜란 때 왜구들한테 멸문지화(滅門之禍)나 다름없는 참화를 당한 구원(舊怨이 있는 데다, 부귀와 권력을 누렸던 황실의 오랜 외척으로서 나라에 진 역사적인 빚도 있고 해서 하는 말일세!”
중산의 말소리엔 비장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어떤 힘이 실려 있었다.
“자네의 가문이 왜놈들한테 당한 빚이야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그런 것은 아이들이 커 가는 것을 보아 가면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대처해야 하지 않을까?”
운사의 말투는 중산의 그것과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온유하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나라 꼴이 나아질 것 같은가? 그래도 우리 둘이 사돈을 맺게 되었더라면, 그야말로 혈맹의 관계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네.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이들의 장래 문제도 함께 논의할 수 있었을 것이고….”
중산은 그게 못내 아쉬운 듯, 말끝을 흐리면서 운사를 바라본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친구 사이라고는 하여도 엄밀히 따져보면 그들은 오래 전부터 상호 신뢰하는 혼반(婚班)의 인연을 맺고 있는 사이였다. 윗대에 벌써 두 가문 사이에 통혼한 선례가 몇 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더라면 이 밀양 고을 최초로 양 대에 걸쳐 일본 유학생 부부가 탄생하는 진기록이 세워지게 되었을 걸세, 아마도!”
운사의 얼굴에 여유롭게 웃음기가 번진다.
“글쎄,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내가 아들을 낳고, 자네가 딸을 낳았어도…? 관건은 누가 아들을 낳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욕심에 따라 결정될 일은 아닐세 그려!”
중산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부드러웠다. 그러나 억양이 높은 운사의 말투에 비해 한결 곧은 목소리였다.
“하기야, 칼자루는 어차피 아들을 낳는 쪽에서 쥐게 되겠지만, 그래도 나는 내 사위가 일본 유학생이 되어서 서구 문물을 더 많이 배워 오기를 원했을 걸세!”
<세루>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맨 운사는 그러면서 슬쩍 뒤를 돌아다본다. 그들보다 이삼십 보쯤 뒤쳐진 곳에는 그 역시 제각기 물색 고운 한복과 왜색의 양장 차림을 한 젊은 귀부인 둘이 초롱꽃 무늬의 불란서제 양산을 함께 쓴 채 무언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면서 산철쭉이 우거진 연둣빛 신록 속의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각기 상전의 아기를 안은 유모와 작은 보자기를 손에 든 그만그만한 하녀 둘이 조심조심 산기슭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소위 말하는 개화 지식인들의 절충주의, 합리주의라는 겐가?”
중산이 정색을 하고 물었으나 운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웃기만 한다.
“운사 자네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자신감이 솟아나는가 보이! 나는 자네의 그런 면이 언제나 부럽기만 하다네.”
중산은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아름드리 거목을 이룬 서어나무, 고로쇠나무, 물푸레나무들의 신록 사이로 아슴푸레 뚫려 있는 먼 데 하늘을 아득히 바라다본다. 여말 ․ 선초의 대학자인 양촌(陽村) 권근(權近) 선생이 밀양 읍성의 동남쪽 성곽 안쪽에 위치한 이곳 무봉산 기슭의 영남루(嶺南樓)에 올랐다가 지었다는 칠언율시(七言律詩)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次密陽城嶺南樓韻[(차밀양성영남루운): 밀양성 영남루 시에 차운함]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에서 운자를 따서 시를 지음
高樓百尺控長天(고루백척공장천) 백척 높은 다락이 긴 하늘을 끌어당기니
風景森羅几案前(풍경삼라궤안전) 책상머리에 풍경이 삼라(森羅: 숲의 나무처럼 벌여 있는 많은 사물)하였네.
川近水聲流檻外(천근수성류함외) 시내가 가까우니 물소리가 난간 밖에 지나가고
雲開山翠滴簷邊(운개산취적첨변) 구름이 개니 산의 푸르름이 처마 끝에 듣네!
千畦壟畝禾經雨(천휴농묘화경우) 천휴(1휴는 50묘) 밭이랑에 벼가 비를 겪었고,
十里閭閻樹帶煙(십리여염수대연) 십릿길 마을 거리의 나무는 연기를 띠었구나!
匹馬南遷過勝地(필마남천과승지) 필마로 남으로 와서 경치 좋은 곳을 지나니
可堪登眺忝賓筵(가감등조첨빈연) 올라와 바라보며 손님 자리에 낄 만도 하네 그려!
옛 선비는 가셨어도 영남루에 올랐다가 남기신 그분의 고결한 시심(詩心)은 오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생생하게 남아 온 산자락에 그윽하게 어려 있는 듯도 하였다.
중산은 옛 선현(先賢)의 묵향(墨香) 깊은 체취를 정결한 신록 속에서 느끼면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하니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이라 더니, 나라는 망했건만 이날따라 청태(靑苔) 낀 성곽 안의 무봉산 신록은 더욱 푸르고, 쪽빛 하늘도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높고 청명하였다.
옛날, 세종 임금 때 한글 창제에 참여하기도 했던 범옹(泛翁) 신숙주(申淑舟) 같은 이도 이곳 영남루에 올라, “신라 고을 60여 관청에 누(樓), 사(寺), 대(臺), 관(館)이 없는 곳이 없으나 홀로 이 다락만이 영남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그 경치의 아름다움이 영남에서 으뜸이기 때문임을 이제야 알겠노라.”고 하였다던가?
그러나, 그 영남루를 에워싼 사방 천지에 이렇듯이 신록이 눈부시게 우거지고, 멀리 응천강 건너편의 백사장 쪽에서 단오절 풍악 소리가 낭자하게 들려오건만, 분명히 상하 관민(上下官民)이 하나 되어 두루 흥겨웁던 지난날의 그 대단한 조선 단오 명절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도자 없는 오합지졸들끼리 무얼 한단 말인가. 이건 아니야. 모두가 다아 허깨비 놀음일 뿐이야!'
하루가 다르게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고, 극단적으로 보수적이던 양반 사대부 집안에서도 친일 개화파 인사가 속출하는 판이었다. 혹자는 이 시대를 일컬어 말세라고도 했고, 혹자는 싫건 좋건 간에 신․구의 양대 조류가 혼재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이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개화 격변기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중산은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식민지 시대를 결코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쉽사리 적응할 수도 없었다.
망국의 한을 품고 비명에 가신 승당(承堂) 할아버지와, 벼락 맞은 고목처럼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홀로 남아서 외로이 가문을 지키고 계시는 후원의 용화당(龍華堂) 할머니….
요즘, 조석으로 용화 할머니께 혼정신성(昏定晨省)으로 문안 인사를 여쭐 때마다 중산은 자기가 열 네 살 되던 해인 지난 을사년 늦가을 어느 날 저녁, 벼슬도 버린 채 홀연히 서울살이를 중단하고 황황히 낙향하셨던 승당 할아버지의 그 벼락 맞은 고목 같은 모습을 떠올리곤 하였다.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시절, 착검을 한 일본군의 협박과 그들의 조종을 받은 을사오적(乙巳五賊)들의 매국적 흉계로 인하여 합방의 전 단계인 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을 때, 궁내부(宮內府) 칙임관(勅任官)으로 나라님을 가까이서 모시던 노신하로서, 그리고 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황실의 한 외척으로서 느꼈던 그분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셨을까.
비분강개로 망국의 한을 견디다 못해 낙향하시던 그 길로 가족들의 만류도 한사코 뿌리친 채 재악산(載嶽山)을 배산으로 하고 자리잡은 호국사찰 표충사(表忠寺) 인근의 첩첩한 금강동(金剛洞) 골짜기로 잠적하셨던 승당 할아버지―.
중산은 첩첩한 산중 토굴 움막집에서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보를 접하자마자 마침내 할복 순절로써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으셨던 승당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남다른 비애에 젖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망국의 한을 품고 그렇게 분연히 세상을 등지셨던 할아버지의 용력(勇力) 못지않게 위풍당당하신 모습으로 비어 있는 엄부(嚴父)의 자리를 담대한 여장부의 기개로 채워 가며 수많은 가솔(家率)들과 가문을 의연하게 이끌어 오시던 여황 같던 할머니의 기상마저도 이제는 예전 같지가 않으신 것이다.
고집스럽도록 엄연한 오랜 가풍에 따라 아직도 옛날 선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외양처럼, 중산은 그 사고방식이나 생활 태도에 있어서도 여전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그늘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급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려고 해도 철옹성 같은 가풍 때문에 사고의 진전에는 한계가 있었고, 운신의 폭은 언제나 옛날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왜색 풍의 외양을 하고 다니거나,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친일 인사가 되는 것이 아닌 줄을 뻔히 알면서도 중산은 왠지 그런 사람만 보게 되면 이방인을 대하는 것처럼 서먹서먹해지고,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곤 하는 것이었다. 방금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운사에게 부럽다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좋은 뜻으로 뱉어낸 말만은 아닌 것이다.
그와 오랜 친구인 운사도 그러한 중산의 의중을 잘 읽고 있는 듯,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응수하는 것이었다.
“부러워할 게 뭐 있겠나? 자네보다 엄격하지 못한 내 성격 탓인 것을. 유사 이래로 왜놈들이 시시때때로 우리 민족에게 가해 온 수많은 만행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려서 하루도 마음 편안하게 살 수가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하기야…. 망해 버린 나라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무난하게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은 자네가 말하는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딴은 가장 무난할지도 모르지! 현실은 현실로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다음 일을 도모하면 될 테니까 말일세!”
중산은 아이들의 장래에 관한 태중언약이 무산된 채 각기 다른 길을 걷게 된 자기들 둘 사이가 못내 아쉬운 듯, 다시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슬며시 걸음을 멈추고 만다. 어디선가 흥겨운 장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 흥겨운 장구 소리는 발밑으로 까마득하게 떨어진 절벽 아래의 응천강(凝川江) 건너편 송림 가의 백사장에서 아까부터 들려오던 민중들의 그 농악 소리가 아니었다. 한량들이 끼고 노는 기생들의 춤사위에나 어울릴 법한, 그 흥을 타고 뚜당땅거리는 몸에 휘감기는 듯한 장구 소리는 그들이 한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저 길 아래의 영남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분명하였다.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자기네의 식민지 경영에 협조하라고 갖은 협박과 공갈로써 기부금을 뜯어 가면서도 오히려 큰소리를 땅땅 치며 잔뜩 주눅이 들게 만들더니만, 드디어 단오 맞이 관제(官制) 관민 합동 연회의 마무리 단계인 여흥이 시작된 모양이로군!”
신음을 토하듯이 중산이 내뱉는다.
“성안의 청루나 요릿집에서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보이!”
민심을 들끓게 한, 고을 안의 유력한 토호 유림들과 지역 유지들을 강제로 참여시킨 정략적인 관제 관민 합동 연회라 운사도 잘 알고 있었는지 영남루 쪽을 내려다보며 귀를 세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 멀리서 풍물 소리가 들려온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아까 무봉사 절간을 나설 때부터 군중들의 요란한 함성과 함께 이따금씩 농악꾼들의 흥겨운 풍물 소리가 시원한 바람결에 실려 오곤 하는 것도 단오절이면 으례껏 접하게 되는 이 고을의 오랜 명절 분위기인 것이다. 그러니 보나마나 지금 고목이 우거진 발아래 응천강 건너편의 삼문리(三門里) 강변 솔숲 백사장에서는 황소를 상품으로 걸어놓고 마을끼리 겨루던 그 씨름판이나 소싸움 대회를 비롯한 국궁대회가, 그러나 오늘은 힘없는 민초들 끼리 그들만의 반쪽 잔치로 형편없이 축소되어 김이 빠진 나머지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으로 벌어지고 있을 게 뻔하였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삼대 명절 중의 하나인 오월 단오절이다. 일 년 중 양(陽)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게 겹친다는 이 단옷날은 마을마다 부락마다 양반가에서는 차례를 올린 뒤, 붉은 색의 단오 부적을 붙이거나 단오선(端午扇)을 나누며 차륜병(車輪餠)이라고 하는 수레바퀴 모양의 쑥떡과 화채 같은 초여름 음식을 즐기면서 조용히 보내지만, 농사를 짓는 민가에서는 보다 다양하고 요란하게 단오 명절을 쇠는 것이다.
일찌감치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빗은 다음 붉고 푸른색의 옷을 입고, 창포 뿌리를 잘게 잘라 만든 비녀에는 수(壽)․복(福) 두 글자를 새기고, 액(厄) 막음의 뜻으로 그 끝에 붉은 색칠을 하여 머리에 꽂아 단오장(端午粧)을 하고 하인들이 매어 놓은 후원 깊숙한 나무 그늘에서 추천(鞦韆)을 은밀히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반가의 여인네들과는 달리, 여염(閭閻)의 부녀자들은 마음껏 몸단장을 하고서 아예 집 밖으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구 밖의 정자나무 그늘에서 그네를 타거나 산과 들에서 약쑥과 익모초를 채집하며 집에서 준비해 가지고 간 음식들을 나누어 먹으면서 하루해를 보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민가의 남정네는 물론이요, 양반가의 머슴과 하인들도 일손을 놓고 단오 행사에 나가 한바탕 명절 기분을 만끽하고는 강가로 나가 천렵을 하거나, 저들끼리 씨름이나 풀싸움 같은 들놀이를 하면서 하루를 즐길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단오 명절의 오래 된 풍습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단오 명절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옛날의 일이었다. 왜놈들이 민중들이 한데 어울리는 군중집회를 금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는 명절 쇠기도 예전 같지가 않아서 옛날부터 일반 민초들과 모모한 고을 안의 한량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가운데 관민 합동으로 <밀양 백중놀이>와 더불어 국궁(國弓) 대회며 소싸움대회, 씨름 대회가 거창하게 열리곤 하던 강 건너 삼문리 모랫벌에서는 아침나절부터 일반 민초들만 참여한 가운데 맥 빠진 백중놀이와 마을 대항의 씨름판이 벌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처럼 오늘 하루 자유의 몸이 된 머슴, 하인배들은 벌써부터 반쪽짜리 행사에 흥을 잃고 배다리 아래의 진장 쪽 모랫벌에 몰려가서 저들끼리 천렵을 하고 있는지, 모래알 같은 사람의 그림자가 멀리 응천 강변을 따라 점점이 가물거리는 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오늘같이 뜻 깊은 날에 저런 꼴을 보게 되다니…!”
중산은 응천 강변에서 시선을 돌려 오솔길이 구불구불 흘러내리는 발밑 능선 아래의 영남루 쪽을 눈 여겨 바라보다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귀골 풍의 얼굴에 일순 어두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간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천년 고목들이 들어찬 푸르른 수풀 사이로 만경창파를 헤치고 수면 위로 떠오른 고래 등처럼 시커멓게 드러난 영남루의 거창한 기왓골과, 정략적인 관제 주연이 한창 베풀어지고 있는 그 아래 누대 위의 연회장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빤히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다.
밀양 읍성 일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영남루 누각 위에서는 지금 왜놈들 일색인 이 지역의 관원들과, 아직도 영향력이 만만치 않은 군내의 모모한 조선인 토반 호족들을 망라한 유지급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언필칭 왜놈들이 써 먹는 말대로 단오 맞이 관민 합동의 친목 연회가 한창 베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명절도 명절이지만, 모처럼 일 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하다는 단옷날을 택하여 부부 동반으로 목욕재계까지 해 가면서 어린 종손을 위한 축수 불공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런 눈뜨고는 차마 못 볼 장면을 목도한다는 것이 중산에게는 왠지 호사다마(好事多魔)처럼 불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고을 안의 내로라하는 모든 유지급 인사들에게 협조 공문까지 일일이 보내가며 군 청사 이전 건립 기념 단오절 연회에 참석하라고 노골적인 협박까지 했다고 하더니만, 과연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장면일세 그려!”
중산을 따라 영남루 쪽을 잠자코 바라보던 운사도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 마디 거들었다.
“저들은 언필칭 한일 선린 우호 관계 운운하며 걸핏하면 저렇게 지방 유지들을 상대로 거액의 기부금을 강요하며 애써 불러 모으곤 하지만, 그 속셈이야 뻔하지 않는가? 이번 일만 해도 그렇지! 일부러 민족의 큰 명절인 단옷날을 택하여 저런 연회를 열기로 한 것도 사실은 민족정신을 결집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술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일세!”
군청에서 주관하는 관민 합동 연회는 원래 일본 명치(明治)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에 열리는 게 관례였다. 그런데 올해엔 한민족의 큰 명절인 단옷날에 이렇게 별도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네 그려. 해마다 열렸던 양반들의 국궁대회(國弓大會)는 물론, 민초들의 씨름대회와 추천대회(鞦韆大會)마저 예전처럼 열리지 못할 거라고 하더니만….”
“어디 그 뿐인 줄 아는가? 앞으로는 민중들이 한데 뭉치는 <감내 게줄 당기기>와 같은 민속놀이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일제 당국에서 금하기로 한 모양일세!”
“설마 그럴 리가…?”
“아닐세! 나도 들은 바가 있어서 하는 소리라네. 그리고 이런 날, 하고 많은 연회 장소를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사방 천지 사람들이 다 바라다 볼 수 있는 저렇게 높다란 누대 위에서, 그것도 저토록 요란스럽게 잔치를 베푸는가 말일세!”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영남루 쪽을 바라보던 운사의 시선이 중산한테로 옮아간다. 그러나 중산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낭자하게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영남루 난간 위에 가 있었다.
“저들이 단오와 같은 큰 명절날을 일부러 골라서 왜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 가면서 저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저들의 말대로 한일 선린 우호 관계를 위해서…? 천만의 말씀이네! 내로라하는 이 지방 유지들을 저렇게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아 꼼짝 못하게 발을 꽁꽁 묶어 놓는 것보다 손쉬운 동족 상하 간의 이간․와해 전술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무지한 민초들의 각종 민속놀이에 적지 않은 자금을 대어 주며 여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온 유력한 지도급 인사들을 저렇게 한 자리에 꼼짝 못하게 묶어 놓았으니 어찌 되겠는가? 민초들의 민속놀이는 고사하고 유생들의 국궁대회인들 맥이 풀려서 제대로 열릴 수 있겠는가 말일세! 양반 사대부들은 사대부들대로 허리가 잘려 버린 불구 상태로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터이고, 민초들은 또 그들대로 수장을 잃은 호합지졸 꼴로 천렵과 술추렴으로 단오놀이를 대신하면서 신명도 없이 저렇게들 강가에 몰려 나와 울분을 곱씹으며 가물거리고 있겠지. 왜놈들의 속셈이 어디 그 뿐이겠는가? 이 지역 민중들에게 하늘같은 양반 사대부들을 저렇게 하나같이 친일 매국노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민족 심리를 분열시켜 가지고 동족 간의 갈등을 조장해 보려는 심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말일세!”
열띤 중산의 분노에 운사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본다.
“역시, 자네의 얼음장 같은 냉철한 안목과 그 예리한 통찰력은 여전한가 보이! 나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럴 듯도 하네 그려!”
“딴은 그럴 듯도 한 정도가 아니라니까, 이 사람아! 응천강 가에 민초들이 저렇게 몰려들어 민속놀이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도자 하나 없이 저들끼리 무슨 일을 도모할 수가 있겠는가? 그야말로 장수 잃은 오합지졸 꼴이지! 그런데 왜놈들의 흉계와 야욕은 끝이 없는데, 우리한테는 아무 대책이 없으니 이야말로 큰 일이 아니고 무엇이냔 말일세! …자네가 놈들의 심장부인 동경 한복판에서 저들의 신학문을 배우고 있는 동안에 나는 우리 삼천리강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위 말하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실상들에 대해서 들을 만큼 들었고, 분통이 터지고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직접 겪을 만큼 겪어 왔단 말일세!”
그러면서 중산은 책망이라도 하는 듯이 운사를 이윽히 바라본다.
“이보게, 중산! 이제 생각해 보니 나의 유학 생활이 자네에게 막대한 심려를 끼치지 않았는지 심히 걱정이 되네 그려! 혹시라도 예전보다 많이 달라진 나의 이런 외양이 자네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면 용서하시게. 하지만, 이 손태준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을 위해서 죽었으면 죽었지, 자네의 그 뿌리 깊은 민족주의를 욕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과히 염려하지는 말게나!”
운사는 심기가 불편해진 중산에게 어떤 확신이라도 시켜 주려는 것처럼 그의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굳게 힘을 준다.
“예끼, 이 사람아! 내가 자네를 두고 의심을 하다니, 그런 망발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한 마디 던져 놓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중산은 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하기야…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네만, 솔직히 말해서 의심은 아니지만 자네와 같은 해외 유학파들에 대해서 염려가 되는 바가 없지는 않다네! 그게 뭔고 하니, 신학문도 좋고 일본 유학도 다 좋은데, 해외 유학파들의 현실과 타협하는 듯한 그 우유부단한 온건주의는 솔직히 말해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니 말일세!”
“사람하고는 참…. 누가 승당 선생의 자손이 아니랄까봐서? 하지만 나를 너무 나무라지 말게, 이 사람아! 우리 해외 유학파들 중에도 자네와 같은 강골은 많아! 그리고 날카로운 무쇠 창과 명검만이 적의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라, 때로는 부드러운 그물이나 통발로도 더 크고 많은 물고기들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좀 알아주시게나!”
그들이 이렇게 현실 대응 방식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걷다 보니 어느 새 국화원(菊花園) 마당까지 와 있었다.
‘국화원’이란, 영남루 앞의 드넓은 마당을 일컫는 말로서 천연의 황톳빛 사암(砂巖)이 인공으로 깎은 듯이 반듯하게 깔려 있는 마당 바닥에 국화 모양의 아름다운 석화(石花) 문양이 은하수처럼 점점이 박혀 있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이었다.
누구나 국화원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선 그 눈부시게 아름답고 기이한 천연의 석화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지만, 중산과 운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누대 위의 연회장부터 먼저 올려다본다. 원형으로 다듬은 화강암 초석(礎石)을 발판 삼아 도열한 스무 개의 거창한 진사(辰砂) 빛깔의 두리기둥들이 늠름하게 떠받치고 있는 높다란 누대 위에서는 바야흐로 국책 관제 연회(國策官制宴會)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는지, 요란한 주악 소리와 함께 흥겨운 춤사위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고을 안의 기생이란 기생들은 다 불러낸 것이리라. 화려하게 몸단장을 하고 군무를 추는 계집들의 수만도 기십 명은 족히 되어 보였고, 풍악을 울리는 남녀 악공들의 수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한일 합방이 된 지 거의 십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유림을 중심으로 하여 결집되고 있는 이 지역의 배타적인 민족 정서를 와해시키기 위하여 국책사업으로 베풀어지고 있는 행사인 만큼 초청 인사의 수만도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백 명이 훨씬 넘어 보였고, 상 차림새도 흥청망청 먹고 마실 만큼 아주 융숭해 보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이후, 원만한 식민지 통치의 활로를 모색해 온 일제가 자기들 나름대로 어떤 원칙을 세워 놓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러한 억지 잔치가 과연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 효과가 나타나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리고 연회에 참석하고 있는 인사들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나 마음을 열어 놓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 더러운 꼴을 안 보게 진작부터 동문 쪽의 고갯길로 내려갈 걸 그랬네 그려!”
슬며시 걸음을 멈춘 운사는 중산을 돌아보며 소태 먹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중산은 안으로 타는 듯한 눈길로 여전히 누대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가 저 자리를 피해서 갈 이유가 무에 있는가? 오히려 피해야 할 쪽은 저쪽이 아닌가!”
“그래도 억지 춘향이가 된 고을 어르신들께서 좌불안석(坐不安席)으로 겪고 계실 고초도 좀 생각해 드려야 하지 않겠나? 노구(老軀)를 무릅쓰고 저 자리에 앉아서 겪고 계실 그분들의 육체적, 정신적인 고생인들 오죽하겠는가 말일세!”
“그러고 보니 교동(校洞) 손씨(孫氏) 문중의 당주이신 자네 춘부장(春府丈)께서도 병을 핑계 삼아 끝까지 버티시다가 결국 총을 멘 왜놈 순사의 호위를 받으며 죄인처럼 저 더러운 연회에 끌려가서 일석을 차지하고 계실 터이니, 그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렷다?”
모처럼 운사를 쳐다보는 중산의 얼굴에 한 줄기 웃음기가 번지고 지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입가에 깊게 골이 패는 고뇌에 찬 웃음이었다. 고을 안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인 토반 문벌이라는 이유만으로 왜놈들의 집중적인 협박과 공갈에 끊임없이 시달림을 당하며 동족간의 갈등에 이용되고, 동시에 친일 공작의 표적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명문 호족의 일원인 자기네도 똑같이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돈께서 남의 말을 하고 계시는구먼! 그렇게 말하는 동산리 여흥 민씨 문중에서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텐데 그래?”
중산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무심하기만 한 운사의 모습을 씁쓸한 미소를 띤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한다.
운사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진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중산의 그것보다는 한결 장난스럽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
“성 안에 사는 밀양 손씨와 밀양 박씨는 이곳이 관향(貫鄕)인 터줏대감들이니 그렇다 치고, 왜 멀리 읍성 밖의 외지에 사는 우리 여흥 민가들까지 성 안으로 불러내려고 그 야단이냐 이 말일세!”
그들은 뒤쳐진 부인네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며시 걸음을 멈춘다. 국화 무늬가 있는 돌뜰이라 하여 국화정(菊花庭)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드넓은 영남루 앞마당-. 길게 드리워진 영남루 그림자가 초상집의 차일인 양 처량하게 뒤덮고서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저쪽 마당 끝에는 민족의 성전인 천진궁(天眞宮)이 서산으로 기우는 창백한 저녁 햇빛을 받으며 망국민의 한을 조상(弔喪)하듯 쓸쓸하게 서 있었다.
“왜놈들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았다는 승당 선생의 혈손인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과연 오래 살고 볼 일일세 그려! 저들이 어떤 놈들인데 그런 소리를 하는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래로 조선을 공략하기 위해 일찌감치 팔도의 지형지세며, 각종 문화재와 삼림, 지하자원의 분포 상태에다 명문 호족들의 족보까지도 샅샅이 연구해 두었다는 저놈들인데, 동산리에 사는 그 유명한 오우(五友) 선생의 후손들을 어찌 모르겠는가? 어림없는 일이지! 더욱이 을사 보호 조약 체결 후에 망국의 한을 품고 입산하셨다가 끝내 의거 순절로써 조선 선비의 기개를 보이고 생을 마감하셨던 자네 조부님의 일까지도 빤히 꿰뚫고 있을 저놈들일 텐데 말일세!”
“딴은 옛날 임진왜란 때 자기네 조상들이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던 우리 상동면의 매화리, 하남면의 파서리, 상남면의 동산리 여흥 민가 문중의 후손들이 아직도 이렇게 두 눈이 시퍼렇게 살아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으니 알고도 모르는 척 하고 그냥 내버려 둘 그놈들이 아닐 테지! 그래서 지금도 우리 아버님께서는 주무시다가도 왜놈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벌떡 일어나시어 부르르 치를 뜨시거든! 물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저런 자리에 나가실 생각은 아예 꿈에도 하지 않을 듯이 말이네!”
가슴에 맺힌 오랜 원한처럼,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아가는 백의민족의 어혈인 양 드넓은 황톳빛 마당 바닥에 점점이 박혀 있는 국화꽃 모양의 기이한 천연 문양을 당혜(唐鞋)를 신은 발길로 쓰라린 가슴을 내리 쓸 듯이 조심스럽게 문질러 보면서 중산은 다시금 깊은 감회에 젖어든다.
“어련하시려나! 왜놈들의 꼴이 보기 싫어서 당주 일까지 자네한테 떠넘긴 분이시니 그렇다 치더라도 민씨 왕국의 촉탁 외무대신 격인 죽명(竹鳴) 선생이 성내에 엄존해 계시는데, 연로하신 종가의 당주께서 친히 거동하실 필요가 무에 있으시겠는가?”
운사의 말투에는 그런 와중에도 짓궂은 장난기가 숨어 있었다. 어쩌면 어두워진 중산의 기분을 생각하여 일부러 그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중산은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죽명 선생이라는 바람에 오히려 불시에 허를 찔린 듯이 얼굴의 근육이 움찔하고 경련을 일으킨다.
각종 관공서가 들어선 저 아래의 성내 한복판에 <혜민당(惠民堂)>이란 한의원을 열고 있는 죽명(竹鳴) 민영국(閔泳國) 선생은 동산리 여흥 민씨 가문에서는 전무후무한 개화파 인물로서 중산에게는 막내 숙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약관의 어린 나이로 식년시에 합격하여 부산항 개항과 함께 부산진의 두모포[(豆毛浦): 고관(古館)이라 불리는 지금의 수정동] 에서 개관한 뒤 관세 부과에 불만을 품은 일제의 압력으로 문을 닫았다가 개항한 지 7년만에 청나라의 도움으로 초량 왜관 앞 용미산 포구의 신항에 다시 문을 연 부산 해관의 감리관으로 파견되어 봉직하고 있었던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에 연루된 조야 인사들과 교류했다는 이유 때문에, 당시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로 있었던 부친 승당 어른의 노여움을 싼 나머지 가문의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 오래 전에 문중에서 축출된 바 있는 비운의 개화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운사는 지금 그 죽명 선생도 동산리 민씨 문중을 대표하여 저 어용 연회에 참석하고 있을 것이란 점을 상기시키면서 은근히 농담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산은 운사의 말에 대해 구차하게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만한 일에 기가 꺾일 중산도 아니었다. 왜냐 하면, 운사야말로 예전부터 그런 죽명 선생을 두고 용기 있는 대표적 진보주의 신지식인이라며 흠모한 나머지, 끝내는 그분의 조언을 들어가며 일본 유학 길에 나섰다가 이 고을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일찌감치 양의(洋醫)가 되어 돌아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자네의 말이 틀림없을 걸세! 저런 어용 연회야말로 죽명 숙부님처럼 용기 있는 풍운아들께서 직접 참석해야 할 자리가 아닌가 말일세!”
용기 있는 풍운아(風雲兒)―. 물론 이것은 죽명 숙부와 운사를 한데 묶어서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니, 이거 왜 이러나? 내가 쏘아 보낸 화살로 당장 이렇게 맞받아치다니!”
이렇게 농담을 하면서 한 바탕 웃어넘긴 운사가 이번에는 정색을 하고 묻는다.
“하지만, 범을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말도 못 들었는가, 중산?”
“호랑이 굴…?”
되묻는 중산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가 머문다.
“그렇다네! 바로 그 속담 그대로일세! 내가 판단하기에 죽명 어른께서는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오신 것이 분명하단 말일세!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으시고 말이네. 말이 났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왜놈들을 상대해야 하는 문중 일이 있을 때마다 좌우의 눈총도 아랑곳하지 않고 문중을 대신하여 발 벗고 나서시는 그 일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쉽지 않아. 우리처럼 범속한 사람들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 집안에서는 근 이십 년 전에 죽명 어른께 내린 <수화불통(水火不通)>의 조처를 아직도 풀지 않고 있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더구나 온 부중(府中)의 불쌍한 민초들이 구세주처럼 우러러보는 그분을 두고서 말이네!”
그러나 중산은 모처럼 목청을 돋구며 몰아세우는 운사의 그런 지적을 받고도 한 동안 아무 말이 없다.
‘수화불통(水火不通)’이란, 일찍이 승당 어른이 자기의 영을 어긴 막내아들을 문중에서 내칠 때 사용한 용어로서 ‘물과 불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갑신정변에 연루된 친일 개화파 피붙이들과 교류가 있었던 죽명 어른의 행위는 그것을 금하는 문중의 규율에 위배되므로 같은 혈족으로서 더 이상 서로 화합할 수 없다는 이단(異端)의 논리였다.
중산은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라 그 상황을 잘 알 수가 없었지만, 어른들의 그런 추상같은 단죄 의식이 지금도 남아 있음을 시시때때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규율을 엄히 지켜 온 오랜 가풍과,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지원했던 자기네 가문의 정치적인 논리와, 문중 어른들의 대쪽 같은 자존심에서 나온 것임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운사가 그 문제를 거론하는 자체부터가 심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자신의 가슴 속 응어리나 되는 것처럼 무수히 박혀 있는 영남루 마당 바닥의 국화석 무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면서 중산이 모처럼 스스로 기를 꺾으면서 나직하게 읊조리는 것이다.
“사실, 나도 곤혹스럽다네! 하지만 그런 조처를 내리신 할아버님의 뜻이 변질되지 않는 한 그게 그리 쉽게 해금(解禁)될 리가 있겠는가?"
“죽명 어른의 행위가 반민족적 이단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게 오래도록 밝혀져 왔는데도 말인가?”
“어쨌든 그 어른께서 갑신정변에 가담한 일부 친일 인사들의 혈족과 교류하신 것은 사실이 아닌가?”
이렇게 대꾸하던 중산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운사의 의중을 뒤늦게 읽은 것이었다.
“자네, 혹시 우리 숙부님께서 부중의 빈민들한테 의료 시혜를 베풀면서 살아 오셨다고 해서 그러는 게 아닌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야말로 언감생심(焉敢生心)일세 그려! 개화 지식인인 자네한테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만, 솔직히 말해서 지금도 우리 집안의 어르신들께서는 그 어른이 천민들의 살가죽을 찢어 고름이나 짜고 다니는 것부터 아주 마땅치 않게 여기고 계시다네! 그런데, 그것으로 해금의 논리로 삼다니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일세 그려!”
죽명 선생의 의료 시혜 사업을 폄하하며 내뱉는 중산의 말에 운사는 오히려 발끈하여 목청을 높인다.
“어허, 이 사람이!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자네같이 점잖고 명철한 사람이 아직도 그런 험하고 케케묵은 언사를 함부로 입에 담는단 말인가? 자네도 잘 알다시피 지금은 빈부귀천의 신분을 가리던 그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 아니란 말일세!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예리한 안목을 가진 자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정말 안 되고말고!”
한 바탕 열을 올리던 운사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과하다 싶었던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양의들한테는 마땅히 지켜야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 하는 불문율이 있다네! 이 선서에는 치료에 관한 학문 또는 지식으로서의 의학(醫學)과 기술 혹은 행위로서의 의술(醫術), 그리고 덕목이나 윤리로서의 의덕(醫德)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단 말일세! 말하자면 이론적 측면으로서 의학과 실천적 측면의 의술, 그리고 도덕적 측면의 의덕이 삼위일체가 되고 있단 얘길세. 본시 인간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천부인권(天賦人權)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래서 인간의 목숨은 빈부귀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다 하늘처럼 소중하고 귀하다고 하는 평등정신 말이네! 그리고 모름지기 그런 정신적 바탕 위에서 환자의 질병을 돌보는 것이 의생(醫生)의 본분이거늘, 어찌하여 인명을 귀히 여기고 봉사하는 그런 의로운 사업에 헌신하시는 분을 두고 아주 천한 일이나 하는 것처럼 그렇게 험한 말로 폄하(貶下)할 수가 있단 말인가?”
“갑오개혁이 공포된 뒤로 노비 제도가 철폐되고 시대가 많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어찌됐건 간에 의생 노릇은 예로부터 중인(中人)이나 천민들이 도맡아 해 왔던 천한 일인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 아닌가?”
“어허, 이 사람이 그래도 그런 험한 말을…!”
“허허, 사람하고는 참…. 이 보시게 신식 양반! 너무 흥분하지 마시게나. 동경까지 가서 수년 동안 양의학을 배우고 돌아온 자네를 염두에 두고서 한 말은 결코 아니니까 말이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연로하신 우리 문중 어르신들의 뜻이 그저 그렇다는 것일세!”
운사가 의외로 완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일까. 중산은 일부러 농담조로 받아 넘긴다.
“아무리 어르신들의 뜻이 그러하기로서니 자네마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사람아!”
“자네의 말뜻을 내 모르는 바 아닐세! 그리고 그 어른께서 부중 빈민들에게 의료 시혜를 베풀고 계시다는 소문은 나도 이미 듣고 있었다네. 하지만, 그것하고 우리 문중의 정론(定論)을 어긴 일하고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일이 아닌가, 이 말씀일세!”
“다르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거듭 말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네가 항시 염두에 두고 있는 그 무력적인 항일 투쟁만이 능사가 아니란 말일세! 의술을 통한 빈민 구휼(救恤)사업이나, 사학 건립을 통한 신교육 운동을 일으켜서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들도 다 앞으로 나라를 되찾는데 필요한 항일 독립 운동의 일환이 된다는 사실을 자네는 왜 모르는가?”
그러면서 운사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글쎄 말일세.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이라 이제는 나도 뭐가 뭔지를 잘 모르겠네…!”
결국 그렇게 중산이 한 발자국 물러서는 바람에 운사의 마음도 한결 누그러지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문중의 차세대 당주로 매인 몸이니 층층시하로 기라성 같은 집안의 어른들이 수도 없이 많이 계시는데, 자네 혼자 나선다고 해서 쉽게 해결될 일은 아니겠지!”
탄식하듯 내뱉으면서 운사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떡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