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수원] 자아와 책임 전가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독서 : 창세 1, 20 - 2, 4ㄱ
† 복음 : 마르 7, 1 - 13
★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가장 마지막으로
만드셨다. 이는 마치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아기한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는 부모의 마음처럼,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기에 앞서 세상의 모든 것을 먼저 창조하셨음을
보여 준다(제1독서).
★ 예수님의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비난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식적인 위선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이 폐기되고
있다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보여 준 형식주의는
우리 삶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한 여교사가 어느 빈민가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담은
‘위험한 아이들’이라는 영화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깡패
조직과 연관되어 한 친구에게 죽음의 위협을 받은 ‘에밀리오’
라는 학생은 차라리 죽임을 당하기 전에 먼저 그 친구를
죽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를 눈치 챈 여교사는 에밀리오를
찾아가 교장에게 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보호를 요청하라고
밤새 설득합니다. 좀체 고집을 꺾지 않던 에밀리오는 여교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교장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교장은 에밀리오가 교장실에 들어왔을 때 그를 곧바로
내쫓아 버립니다. 그 이유는 학생이 노크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장은 노크할 줄도 모르는 학생과는 면담할 수
없고, 그게 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변 보호를 요청할
기회마저 잃은 에밀리오는 처음의 결심대로 친구와 사투를
벌이러 갑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거기에서 죽고 맙니다.
교장이 잘못한 것은 사실상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규칙보다도 아이의 내면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에밀리오를 보호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한층
깊게 바라보려 하지 않고, 규칙에 얽매인 나머지 어린 학생이
왜 교장실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자녀에게서, 이웃에게서 어떤
말과 행동을 듣고 볼 때 형식적인 규칙에 얽매인 나머지
그의 내면을 놓쳐 버리지는 않는지요?
-매일 미사 -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제 묵상 글을 매일 읽으시는 어떤 분이 제게 메일 한
통을 보내셨습니다. 이 메일에는 본당 신부님에 대한
실망이 적혀 있었지요. 그날도 새벽에 저의 묵상 글을
읽고서 새벽미사에 참석했는데, 본당신부님께서 강론을
저의 글을 그대로 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본당신부님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맥이 빠졌다는 내용의
메일이었습니다.
우선, 메일을 읽자마자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내 글이 명작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지요. 물론 제 글이 명작은 아니라는 사실을 당연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 읽히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 정도의 글인가요? 보통 명작은 어떻습니까?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두고두고 내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서 몇 번을 읽지요. 그런데 ‘내 글은 두 번만 읽혀도
짜증이 날 수 있구나.’라는 부끄러움이 생기더군요.
그러나 많은 분들이 부족한 제 글을 사랑해주십니다. 댓글도
많이 남겨주시고, 이곳저곳으로 옮기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두 번만 읽혀도 짜증이
나는 아주 형편없는 글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제게 메일을 보내주셨던 분은 본당 신부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 때문에 제 글을 듣고 실망과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형편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지요. 하긴 긍정적인 마음보다는 부정적인
마음의 흐름과 전염이 더 빠르다고 하지요. 한번
늪처럼 더 깊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 이렇게
메일 답장을 썼습니다.
“저는 지금 현재 13년째 인터넷에 묵상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똑같은 내용 없이(물론 제 부족한 기억력으로
비슷한 내용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요) 13년을 쓴다는 것이
제가 생각해도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벽에는 머리가 하얗게 되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매일 쓰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어떻게든 쓰기는 해야 하고요...
이렇게 어떤 의무감에서 쓴 글을 볼 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약속을 했으니 부끄러워도 그냥 올립니다.
그런데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에서는 달라집니다. 저의
부끄러운 글을 강론으로 말한다는 것이 신자들에게 얼마나
죄송스러운지 모릅니다. 부끄러운 차원을 넘어서 죄송스러워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사 전에 인터넷을 뒤지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좋은 강론이 있으면 그 강론의 내용을 참조해서
신자들에게 말씀 드립니다(물론 똑같이 읽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부족한 강론보다 신자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본당신부님도 이런 마음이 아니셨을까요? 솔직히
부족한 강론으로 분심 들게 하는 것보다는 인터넷이라도
뒤지면서 좋은 강론을 신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본당신부님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또 다른 부정을 낳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해하는 마음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 고이 간직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 있는 부정적인 마음들을 싹 몰아내었으면
합니다. 대신 긍정적인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면 합니다. 그때 내게 들리는 모든
말들이 명작처럼 그래서 또 듣고 싶은 말들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이 인간의 전통이 아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소수의 헌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마라(마거릿 미드).
신부님들과의 저녁식사. 너무 깨끗하게 먹었죠?
실수를 하는 우리
일주일에 한 번, 어느 본당의 새벽 미사를 도와줍니다. 그런데
어제 이 새벽 미사에 가지 못했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났고
아침기도를 하고 묵상 글 올리고, 여기에 아침 운동까지 마쳤을
때에도 6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새벽 6시 30분 미사니까
충분히 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요. 문제는 새하얗게 깜빡 잊은
것입니다. 어제가 휴일이라는 생각만 했지 월요일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죄송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은 절대로 새벽 미사 빠지거나 지각하시는 않겠어요.”
저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도 그럴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 내가 한 실수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마음을 간직했으면 합니다.
나의 실수를 떠올린다면 다른 사람의 실수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로 어제 그 본당신부님께 죄송하다는 문자 메시를 보냈더니
이러한 답장이 왔습니다.
“어? 내가 미안! 새벽미사 없었는데~~ 알려주지 않아 미안해!”
정말로 다행이었습니다. 하느님 감사~~~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자아와 책임전가
2013년 다해 연중 제5주간 화요일
<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복음 : 마르코 7,1-13
< 자아와 책임전가 >
사람의 사회적 영향력에 꾸준한 관심을 보인 저자 로버트
치알디니 박사는 자신의 책 ‘설득의 심리학’에서 사람마다
자신의 선택을 최고라고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즉 구매자는 일단 한 제품을 선택하게 되면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끝까지 믿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폰을 산 사람은 아이폰을 산 사람대로, 갤럭시를
산 사람은 또 그 사람 나름대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주장합니다. 선거가 끝나도 박근혜씨를 뽑은 사람은 그 사람을,
문재인씨를 뽑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 언어를 배우다보니 우리나라에서 배운 영어를
거의 쓸 수 없었습니다. 10년 이상을 배웠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틀릴까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방법은 그 의미전달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문법을 틀리지 않는 위주로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으려는 마음 때문에
온갖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하게 됩니다. 자기합리화는
나에게 고통이 닥칠 때 그것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 외부의
탓이라고 핑계를 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느님과 서로의 탓을 하게 된 것처럼, 핑계나
책임회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 안에 자아가 일으키는
죄가 많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한 번은 로마에서 공부할 때 기숙사로 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탔습니다. 저의 직업을 묻기에 사제이고 로마에서 공부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사제들도 결혼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들어보니 세계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성직자 아동 성추행 문제나 동성애 문제 등을 예로
들면서 사제들이 결혼하면 그런 문제가 없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왠지 그분이 ‘일부 사제들의 문제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 물었더니 역시나 좀 문란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다시 질문했습니다.
“기사님도 결혼 해놓고도 그렇게 외도를 하시면서, 왜 사제들은
결혼을 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처럼 말씀하시죠?
사제가 결혼해도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기사님이 누구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다 자신의
문제입니다. 기사님은 ‘사제들도 그러는데 네가 뭐 어때서?’
라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었고, 그래서 고통 속에 있더라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설득시키려 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고해성사를 안 한 신자들이 오랫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은 것 외에 고백할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정말로 고해성사를 듣다보면 자주 고해하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많은 죄의 고백을 하지만, 몇 년 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은 분들은 냉담했다는 것 외에 더 덧붙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오랜 냉담으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도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러느냐고
따지기까지 합니다. 그분들이 실제로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을 이미 마음 안에서 다 합리화 해
놓았기 때문에 죄라고 생각되는 것이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들의 전통대로
자신의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것도 ‘자기합리화’
입니다. 남들의 잘못을 더 크게 보게 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부터 자신의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된 이후로 모든 죄인들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남의 잘못을 크게 보면서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리고 합리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드릴 공양도 하느님께 바칠 예물이라는
뜻으로 ‘코르반’이라고만 하면 더 이상 부모에게 해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 또한 자신들이
부모를 공경하기 싫은 것을 전통이라는 핑계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느님 법을 어기는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세계적인 부호이자 사업가인 ‘내쇼날’ 상표의
창업자 마쓰시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흔 넷의 나이로 운명할 때까지 산하 570개 기업에
종업원 13만 명을 거느린 대기업의 총수자리에 있었는데
사실 그는 아버지의 파산으로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하고
자전거 점포의 점원이 되어 밤이면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던 울보였답니다.
그러던 그가 85년이 지난 후 일본 굴지의 기업의 총수가
되었는데 어느 날 한 직원이 마쓰시다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회장님은 어떻게 하여 이처럼 큰 성공을 하셨습니까?”
마쓰시다 회장은 자신이 세 가지 하늘의 큰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고 대답 했습니다.
그 세 가지 큰 은혜란, ‘가난한 것’, ‘허약한 것’,
‘못 배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직원이 “이 세상의 불행을 모두
갖고 태어나셨는데도 오히려 하늘의 은혜라고 하시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마쓰시다 회장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서는
잘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네. 또 약하게 태어난 덕분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이 깨달아 몸을 아끼고 건강에 힘써 지금
90살이 넘었어도 30대의 건강으로 겨울철 냉수마찰을 한다네.
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했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받들어 배우는데 노력하여 많은 지식과
상식을 얻었다네. 이러한 불행한 환경이 나를 이만큼 성장시켜
주기 위해 하늘이 준 시련이라 생각되어 감사하고 있다네.”
성인들은 아무리 억울한 상황이 오더라도 핑계를 대지 않았습니다.
결국 핑계는 자아가 책임회피를 위해 자기합리화를 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가끔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부모님의
싸움에서도 자신의 탓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싸우시는 가운데 자신이 잘 할 테니 싸우지 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깨끗함은 이렇게 아무런 탓도 없는데 자신의 탓을
찾아내게 하지만, 더러움은 전부 자신의 탓임에도 수많은
핑계거리를 찾아냅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대구] 기쁨의 삶
저는 2007년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제 서품성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자.”
(묵시 19,7)라는 구절입니다. 제가 사제로서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통해 다른 분들이 제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느끼도록 초대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6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그동안 과연
내가 그렇게 살았나?’라는 물음을 가지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짜증내고 불평부터 먼저 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입으로는 ‘기쁘게 살아야지. 행복하게
살아야지.’라고 하면서 의무감으로 그렇게 사는 척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
13-17장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쁨’에 대해 계속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14,28),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15,11),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16,22),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16,24),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
말을 하는 것은,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7,13) 이제 곧 잡혀서 돌아가실 분이
강조하신 말씀이 ‘기쁨’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랍습니다.
결국 ‘기쁨’은 예수님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힘들고 우울하다 보면 받은 은총에 감사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자꾸 무엇인가를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시성조사를 할 때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복음을 사는 사람으로서 기쁘게 살았는지를 봅니다.
그분이 기쁨의 삶을 살았는지가 첫 번째 조사내용인 것입니다.
성당 안에서만 입술로 하느님을 공경하고 감사드릴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들 안에서도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감사드리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구원받은 이의
표징이다!”
- 주요한 신부(대구대교구 효성중학교 교목실장) -
◈ [수도회]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
2013년 2월12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 마르코 7,1-1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
한 무리 관광객들이 봄 소풍을 떠났습니다. 버스는 호수와
산, 전원과 강이 어우러진 매우 아름다운 지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에는 커튼이 내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차창 밖으로 무엇이 지나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버스의 상석에, 좀 더 편안한 자리에 앉힐
것인가? 누구를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것인가?
바깥에는 황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주제를 두고 말다툼하느라 여행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만 계속할 것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의 ‘행복한 삶에로의 초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부차적인 것, 지극히 지엽적인 것에 몰두하느라 정작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쉽게 놓치고 마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 우리 신앙생활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분하게도 죄인인 우리를 찾아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스런 하느님 얼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취하시고 인간세상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아닐까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지속적으로 만나 뵙기 위해 열린 가슴으로 광야로
나가는 일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이나 본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바리사이들, 교만할 대로 교만해져서
진지한 자기반성이나 쇄신작업과는 담을 쌓은 바리사이들,
그래서 결국 빈껍데기뿐인 신앙인으로 전락한 바리사이들을
엄중하게 질책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결례와 관련된 세칙의
부당함과 비인간성을 경고하십니다. 정결례는 한마디로 몸을
씻는 것과 관련된 규칙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정결례에 관한
규칙을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규칙이 또 규칙을 낳고, 또 규칙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규정들이 늘어났는지 탈무드 제1부의 6권 전체가 '씻는
규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장에 갔다가 귀가했을 때, 아주 엄한 정결례
규정이 적용되곤 했습니다. 시장에서는 죄인들이나 이방인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기에, 그래서 몸이 많이 더러워지기에
50리터 이상 들어갈 수 있는 물통에 팔꿈치까지를 넣어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흐르는 물에 팔을 씻어야 했습니다.
랍비들은 이런 규정을 실천하기 위해 4마일(약 6.4Km)을
걸을지라도 고생으로 여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물론 외출 다녀왔다가 손 씻는 일, 위생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권장사항일
뿐이지, 의무조항이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건이 마련되어 있어서 큰 준비 없이 손을 씻을 수 있다면
씻으면 되지요. 그러나 상황이 안 된다고 단순히 손을 씻기
위해서 2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서 손을 씻는다는
것을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별것도 아닌 손 씻는 예식은 목숨 걸고 지켰지만,
정작 중요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가르침은 소홀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나 몰라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통
유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했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며 어깨에 힘을 주며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완벽하다고, 흠 없다고, 죄 없다고,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절대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무엇을 향해 전력투구해야
하는지? 무엇이 본질이며,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핵심이며, 무엇이 주변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체험은 요원할 것입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들,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사람들, 스스로 죄인임을,
병자임을 밝히는 사람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간절히
청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기타] 사랑의 감정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2013년 다해 2월12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마르 7, 1-13)
사랑의 감정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마르 7, 1-13)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만나주시어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며 살게 해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예수님께서 묵주기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해주셨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라는
오늘 복음말씀과 잘 연결되어 전해드립니다.
“사랑의 감정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것은
기도를 약화시키고 가치 없게 만든다. 너희 마음속에 자리
잡은 나와 내 어머님에 대한 사랑을 상기함으로서 너의 기도에
힘을 보태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네 삶속에 가장 정선된
은총을 부어줄 것이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정성을 담아 기도하다보면 주님의 현존을 언뜻 언뜻 느끼고,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더욱 친밀감을 형성하게 됩니다.
또한 믿음으로 기도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들이 청원으로 바쳐질는지 나는 미리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성모송 한번을 더 바칠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위력을 결코 알지 못한다.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바치는 한 번의 성모송은 전쟁을 멈출만한 위력을
지녔고, 자연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회개시키고, 성직을 보호하고,
연옥 영혼을 구하고, 미래를 영원히 바꾸게 할 수 있다.
그러니 사랑으로 바치는 묵주 한 꾸러미가 지닌 위력을
생각해보아라.”
또한 묵주기도는 사탄을 물리치는데 대단히 힘이 있는
기도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탄은 묵주가 그에게 패배를 가져올 무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까닭에 사탄은 필사적으로 묵주의 사용을
방해한다. 너희가 마음속에서 성모송을 외칠 때마다 악은
어느 영역, 그리고 어느 영혼 속에선가 영원히 굴복된다.
그러므로 결코 너희는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에서 기가
꺾이면 안 된다. 너희의 마음이 분심으로 가득 찰 때,
그것은 원수가 네 기도로 놀라고 있다는 신호로 깨달아라.”
기도를 처음 시작할 때 졸음이 오거나 하품을 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분심으로 집중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경우 나의 기도로 인해서 더러운 영이 놀라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다잡아 집중하여 기도하면 그 고비를 넘기게 되고 기도에
탄력을 받게 됩니다.
오늘 하루 정선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나 성모송, 영광송을
바쳐서 주님과 일치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기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2013년 2월12일 연중 제5주간 화요일
(창세기 1장 20절 ~ 2장 4절)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몇 달 전에 ‘성모상 봉헌받습니다...’ 라는 공지를 주보에
올렸던 적이 있는데요. 그 공지를 보고 선배 신부님이 전화를
하셔서 ‘본당에 성모상이 있는데 생각 있으면 가져가라..’
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날짜를 잡고 그 본당에
갔었는데요. 몇 몇 신자 분들이 마당에 계셨었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드리고 몇 마디 나누었는데요. 제가 섬에 있다고 소개를
하니까 바로 이런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혹시 누구누구 조카
신부님 아니세요?’
그 본당에 저희 이모가 사시거든요. 아마도 이모가
신부가 섬에 있다..’ 는 이야기를 하신 거 같습니다.
그래서 맞다고 하니, 자매님들이 ‘어머어머 똑같이
생겼네.. 그 집 아들들 하고 똑같애~ ’ 하고 서로
좋아하십니다. 이모 아들이 둘 있는데 자매님들이 보시기에
많이 닮았나 봅니다. 한참을 신기하게 보셨는데요.
그런 닮음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오늘 독서 중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언제 그런 느낌이 드시나요? 이런 장면을 볼 때가 아닐까..
합니다.
【결혼한지 50년 된 한 노부부가 있었는데, 지난 10년 동안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셨다. 할아버지는 아내를 보살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할머니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게다가 할아버지도 나날이 노쇠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할머니를 요양소에 입원시켰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찾아 와 달라고 부탁하시기에
요양소를 찾아가보았다. 할머니 방은 할아버지의 부지런함
덕분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할머니는 비록 외출할 곳은
없었지만 깨끗이 목욕하고 옷을 갖춰 입은 모습으로 침대에
반듯이 누워계셨다. “아침 여섯시 십오 분이면 제가 이곳으로
오지요.” 할아버지는 밝은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냥 이곳에
서 일하는 사람하고 똑같지요. 아내를 먹이고, 씻기고, 아내
곁에서 지냅니다.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할
겁니다.”】
【그는 두어 시간 이상 깊은 잠을 못 자고 날마다 거의 뜬
눈으로 의자에 앉아 밤을 새운다. 아직 십대 청소년인 그의
아들은 자동차 사고로 전신마비가 되었다. 혈액 순환을 유지하기
위해 몇 시간에 한 번씩 아이의 팔다리를 마사지해주어야
하는데, 낮에는 그 일을 치료사들이 해주지만 밤이면 그가
그 일을 대신한다. 그 자신도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고 왔고
다음 날 또 일을 나가야 하지만, 그는 두 시간 간격으로
시계알람을 맞춰놓고 해가 뜰 때까지 깼다 잠들다를 반복하며
아들의 팔다리를 주물러 준다.】
【댄의 아버지 포프는 전이성 간암 및 폐암과 싸우고 있었다.
의사가 앞으로 1년도 못 살 거라고 하자 포프는 죽는 건 두렵지
않다고 호기 있게 말했다. 사실 아내도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고 자식들도 다 장성한 터였다. 그런데 그 때 포프는
유일한 아들인 댄이 곧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주가 태어날 거라는 소식을 듣고 포프는 정신을 차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손주 녀석 내어나는 건 봐야지.” 화학
요법이 포프의 전신을 고통스럽게 했다. 며칠 동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안부 전화를 한 사람들에게 “오늘은
별로야.” 라고 웅얼거리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마침내
손녀가 태어나자 포프는 굳이 병원으로 손녀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한 시간 반 동안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그에게는 고문과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댄이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산부인과
병동으로 모시고 갔다. 포프는 팔에 힘이 없어 아기를 안을
수 없었기에 댄이 아기를 안아서 보여드렸다. 비록 아기를
안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찾아온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포프는 몸을 굽혀 아기에게 입을 맞추고는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한단다.” 잠시
후 포프는 깜박 잠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 뒤에는 다시 차에
탔고, 그리고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야기들에서 보여 지는 사랑의 모습들.. 곧 아이와의 입맞춤을
위해 죽음도 물리치는 사랑, 잠조차 마다하는 사랑, 그리고
수십 년을 지속하는 그 사랑의 모습들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내 삶에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말썽 없는 본당이다..’ 라는 의미로 '저 본당은 말이
없어~’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 같다. 그럼 우리 교구에서
제일 말 없는 본당은 어디일까?
동기 신부가 말하길 ‘청언 성당’ 이라고 한다...^^;
- 밤송이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참고 기다림이 바로 사랑이다![허윤석신부님]
하루를 마감하며 하루의 마지막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 하루 참을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참았던가?
그것은 바로 오늘 하루 기다릴 일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기다렸던가?
이것이 바로 오늘 하루 내가 사랑했던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였는가입니다.
오늘 고린토1서 말씀중 13,4-13의 말씀은 바로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사랑의 해설서입니다.
사랑을 여러 가지로 해설하지만 그 으뜸이 바로 참는것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광고합니다.
“빠름 빠름!”
빠른 것은 참거나 기다림보다는 그 기대나 느낌보다 먼저
도착하는 결과나 그밖의 무엇을 나타냅니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철학적인 문장이 저에게 따뜻함과 여유를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등산을 할 때 지치지 않고 누구보다도 빨리 올라가는
사람주위에는 사람이 적습니다. 참고 기다림은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큰 덕목입니다.
제자와 스승, 부모와 자녀, 공동체와 구성원, 하느님과
나 사이에서 참음과 기다림은 매우중요한 사랑의 실현력이며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전례력에서도 부활과 성탄에 앞서 우리는 참고 기다리는
시기인 사순과 대림을 지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참음과 기다림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참음과 기다림은 그 자체로 평화가 기쁨을
동반합니다.
그 기쁨과 평화가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이 가져다
줄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요 그것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만나는 그날까지 성장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이러한 성격을 알아야 하기에 가장 사랑의 첫
성격에서 사도 바오로는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마냥 주고 싶고 그것을 준 것이 사랑이라면 가장 많이
받고 가장 많이 준 사람이 성인이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기다림을 경험하지 못한이들이 그냥 많이
받기만 하고 자란다면 그것은 무서운 이기주의자를 양성할
수 있음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미사에 봉사하는 어린 꼬마 복사들을
보면서 사랑스럽고 기특합니다.
이들은 복사가 되기까지 새벽미사를 줄기차게 나와야
했고 자기 나이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부동자세로 참고
기다리는 것을 자랑스러움으로 여기며 사제를 도와
미사성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사들의 참고 기다림이 사랑이며 아름다움입니다.
이 복사들에게서 한국의 성직자들이 대부분 나옵니다.
제단에 나가 복사를 하려는 마음이 단순한 어린
동심이라고만은 표현할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이끄심과 평화와 행복 그 무엇보다
하느님의 가치관이 주입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 즉 참고 기다림은 다름아닌 하느님이 주신
마음이어야 합니다.
- 허윤석 신부님의 묵상 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