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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06-2)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
<긍휼의 실체>
(눅 10:33-37)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긍휼)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긍휼을 베푼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37절: ‘자비를 베풀다’ = ‘긍휼히 여기다’의 명사형] / 긍휼을 베푼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다. / 이 비유는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으로 주신 처방전이었다. 그 처방전이 “너, 가서 긍휼을 베풀어.”이다. /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배워서 알고 있지만 그 율법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오히려 강도 만난 자였고, 긍휼을 베푸는 자가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할 자였다. / 이 비유의 배경이 되는 성경 구절은 아래와 같다.
(눅 10:25-2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율법사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영생에 이를 수 있었다. 긍휼은 강도 만난 자와 같이 자신은 죄와 허물로 거반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는 자리로 내려간 자들에게 부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긍휼이 베풀어진 자에게서 그런 고백이 나온다.)
율법사는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고 물었더니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고 정확히 대답했다. 그 대답에 대해 예수님은 ‘그러면 가서 그대로 행하라.’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 율법사가 율법을 다 지켜낼 수 있는 자라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 율법의 행위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 613가지 율법 조항이 사실은 ‘주 너의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된다는 것을 율법사는 잘 알고 있었다.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핵심이다.) 예수로 결론 나지 않는 성경 지식은 다 헛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는 없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지켜서 의를 챙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가서 율법을 잘 지켜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 [넌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자,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를 폭로하신다. ‘네가 바로 강도 만난 자로 거반 죽은 자다. 너는 그 죽은 몸으로 누구를 사랑하거나 불쌍히 여길 수 있는 힘이 없다. 너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나의 긍휼을 입어 살아나야 한다. 그래서 맨 마지막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로 끝난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사랑과 긍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율법사이고 선민이고 이스라엘 사람이니 하나님 사랑은 당연히 실천하고 있으니 누가 내 이웃인지만 가르쳐 주시면 내가 가서 열심히 사랑해 보겠습니다.” 하고 그 율법사가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이 이 비유를 주셨다. 율법사가 지식으로는 율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그 진의는 몰랐다. 율법사는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있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맨 마지막에 가서 ‘누가 자비를 베푼 자냐?’ 물으셨다. 그게 오늘 본문의 ‘긍휼’과 같은 단어이다. /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 수도, 긍휼을 베풀 수도 없는 강도 만나 죽은 자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집중하라 / (이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부어져야 나는 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 내가 긍휼을 베풀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절대 못 된다.’는 것을 배우면 된다.)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 영생에 이르게 되는 자들이다. 우리는 강도 만나서 거반 죽은 자이다. 성도가 내어놓아야 하는 긍휼은 ‘나는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긍휼이 없으면 그대로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이다. 그러한 자기 부인의 과정에서 다른 이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진짜 긍휼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과정이며 지향성이지 시간이 흐르면서 축적되어 사유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 [긍휼, ‘라함, רחם’]은 원래 ‘내장(內臟)’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에서 긍휼이나 사랑 같은 좋은 심정이 나오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인간의 장부(臟腑)를 ‘긍휼’이라는 말로 썼고, ‘인애, 자비, 사랑’ 등의 좋은 감정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장부 안에서는 좋은 것만 나온다고 믿었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잠 12:10) 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악인의 긍휼이라 번역된 단어가 ‘라함’이다. 이 구절은 악인의 ‘장부, 내장’으로 번역해야 더 이해하기 쉽다. 악인에게 긍휼이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긍휼과 잔인은 화해가 되지 않는 단어이다. 인간의 내장에서는 절대 (그 안에서 생산된) 긍휼이 나올 수 없다. 악인들이 긍휼이라고 내어놓는 것들의 실체는 실상 잔인이다. / 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내장 중에서도 여자의 자궁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성경이 여자의 자궁에서 뭐가 해산되어 나온다고?
(시 7:14) 14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 인간의 자궁에서는 죄만 나온다. (인간 안에서는 죄만 나온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 인간의 긍휼은 잔인한 것이다. / 하나님의 자궁에서는 진짜 긍휼이 흘러 나온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탯줄에 연결되어 있지 못하면 그냥 죽은 고깃덩이에 불과하다. 그러한 죽은 고깃덩이를 어머니의 생명선이 살려낸다. 그것을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한다. / 하나님의 긍휼과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이 세상 만물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전하는 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러한 긍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이다.
(롬 11:30-31)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아서 끊어졌고, 로마 교회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교회로 들어왔는데 그들이 여전히 순종치 않았다. 그들도 너희처럼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교회로 끌어들일 것이다. -> 여기서는 이방인도, 이스라엘도 다 순종치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긍휼로 교회로 끌어들였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 = 이스라엘과 이방인, 로마인을 다 아우르는 모든 사람)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 너희들이 순종해서 내가 긍휼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인간들의 의가 드러나게 되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순종치 않는데 (긍휼을 베풀지 못하는 자로 그대로 남아 있는데)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게 되면 하나님의 긍휼이 드러나고 나타난다.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이 행하는 긍휼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치 아니함 위에 부어진다. 그것은 순종치 않아야 긍휼이 부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을 내어놓을 수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는 말이다. / 순종하여 긍휼을 입자는 것이 오늘날 개혁주의가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는 자에게 부어진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서 긍휼하심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난 누구를 긍휼히 여길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가 긍휼하심을 입는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그러한 긍휼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약 2:12-13)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구절은 마치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다 심판받아 지옥에 가니 반드시 긍휼을 행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어떠한 문맥 속에 있는 것인지를 잘 보면 그런 의미가 아닌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윗 구절 보자.
(약 2:8~11) 8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앞서 읽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다른 말로 요약되고 있는 것 같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인데 만일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 판단하고 정죄하면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판정한다는 것이다. 법을 잘 지키면 격려를 해줘야 할 텐데 갑자기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중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자가 된다’는 말로 초를 친다. 최고한 율법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 긍휼을 베풀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2:12)는 명령이 나온다.
이 구절을 잘 풀어야 그다음 구절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구절이 풀린다. 12절 ‘자유의 율법’이라는 어구부터 풀어보자. / 율법이면 율법이지 자유의 율법은 무엇인가? 율법이 사람을 자유하게 해주는 것인가? 율법은 사람을 죄에 묶어두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해주는 율법은 무엇인가? 야고보서 1장에 그 어구가 한 번 더 나온다.
(약 1:22-25)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에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이 나온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그 자유케 하는 율법을 가리켜 온전한 율법이라고 한다. 그것은 완전하게 된 율법이란 뜻이다. (야고보서는 로마서하고 똑같은 내용이다.) 완전하게 된 율법이란 누군가가 완전하게 지켜서 더 이상 참소의 근거로 쓰일 수 없는 율법을 말한다. -> 그 율법을 예수가 완전하게 했다.
(마 5:17-18)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산상수훈의 일부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내가 그 율법을 온전하게 하러 왔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당연히 ‘긍휼을 행하지 않으면 긍휼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아닐 것이다. / 온전한 율법은 예수께서 완전하게 성취하신 자유의 율법 즉, 십자가의 복음을 말한다.
다시 야고보서 1장으로 가서 야고보는 그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라고 한다. (개역성경이 조금 이해하기 어렵게 번역해 놓아서 이런 것은 꼭 제대로 된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는 바로 위 구절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약 1:23-24) 23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 ‘도’ = ‘로고스, λόγος, 말씀’ => 요한복음 1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던 그 말씀이다. (똑같은 단어인데 이때에는 동양사상을 열심히 공부했던 분들이 번역했기 때문에 유가나 도가에 나오는 그 ‘도’라는 단어를 써서 이렇게 번역한 것.)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한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보고 돌아서서 금방 자기가 본 얼굴을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 그게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에 적혀 있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 폭로된 자신의 죄인 됨을 금방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 야고보는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나는 저주 받아 죽어야 할 죄인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죄인 중의 괴수답게 사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사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그 내용이 25절로 이어진다.
(‘로고스’가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너희들은 다 죽은 흙이기 때문에 내가 내려가서 너희들을 살려 놓을 수밖에 없다. 내가 십자가를 져서 너희들을 살리는 수밖에 없다. -> 이게 ‘로고스’, 말씀이다. / 말씀을 듣고 우리가 인정한다는 것은 ‘예! 저는 죄인 중의 괴수이고 저는 죽은 자입니다.’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영생은 무슨 영생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지옥 보내셔도 저는 아무 할 말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걸 잊지 않고 사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 말씀을 듣는 그 당시에는 인정하는데 금방 돌아서서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죄인이야?’ 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다. -->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씀에서 ‘하라’고 한 것들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너는 죄인이다.’라고 하는데 내가 돌아서서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데 내가 왜 죄인이야?’ 하고 오히려 자기 의를 쌓는 것이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도’)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의 도, 복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보고서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신의 실체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다. (그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이다. 복 받은 자는 바로 그러한 실행을 하는 자이다. 말씀 속에 계시된 ‘아!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산 존재가 될 수 없구나!’를 아는 것이 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도’ 즉, 복음의 말씀을 실행하는 자이다. 이 내용이 그대로 2장과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