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변천, 마을 가르며 절경 이루는 한양 조씨 집성촌-경북영양군 영양읍 상·하원리 마을
영양읍 하원리와 상원리는 반변천을 중심으로 산수가 아름다워 신선들이 즐겨 찾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영양에서 영덕군 영해면을 잇는 지방도 918호선을 타고 영양 시가지를 벗어나다 보면
반변천을 따라 왼쪽으로 진입하면 영양읍 하원리가 나오고 이 길을 따라 2㎞로 빼어난
자연 경관을 벗 삼아 거슬러 올라가면 상원리 마을이 나온다.
하원리 마을의 東과 西를 반변천으로 가로 둘러서 두 자연 부락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강물과 산의 경치가 매우 뛰어난 마을로, 본래 영양군 동면의 지역으로서 상원리의 아래쪽이
되므로해 붙여진 이름으로,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원당동과 문현동의 일부를 따다가
하원동이라고 부르게 된다.
상원리 마을은 반변천이 마을의 중심을 가로 지르며 굽이치는 강물이 타원을 그리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데 본래 영양군 동면의 지역인데 원당동의 위쪽이 되므로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14년에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원중동 혹은 수월동과 북초면 곡강동의 일부를 따다가 합해
상원동이라고 부르게 된다.
한양 조씨 종택인 사월종택
△ 하원리(下元里) 마을과 사월(沙月) 조임(趙任, 1573~1644)선생
조임 선생은 영양군 영양읍 하원리(下院里) 출생의 조선시대 문인으로, 조광인(趙光仁)의 아들로
자는 자중(自重), 호는 사월(沙月)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왜군과
싸운 공을 인정받아 1620년(광해군 12) 군자감판관(軍咨監判官), 1621년(광해군 13) 통정대부
(通政大夫)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36년(인조 14) 화의를 반대하면서 척화소(斥和疏)를 올렸으며,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
부사(知中樞府事)로 제수되고, 만년에 숙운정(宿雲亭)을 세우고 '사월문집(沙月文集)' 2권 1책을
썼다.
사월 조임 선생인 건립한 숙운정으로 지금까지도 빈객 접대와 문중회의 등이 열린다.
월담헌 및 사월종택(月潭軒─沙月宗宅)은 하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주택으로 한양조씨(漢陽趙氏)
의 종택으로서 1602년(선조 35) 조임(趙任)이 나이 30세 때에 이 집을 지었으며, 1974년 10일 경상
북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되어 현재 후손인 조중길(포항강판사장)씨가 소유, 관리하고 있다.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半邊川)의 상류 옥선대(玉仙臺)가 바라보이는 뛰어난 경승지에 자리잡은
이 집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에도 병화를 면하여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가내(家內)에
전하여 오지만 월담헌(月潭軒)은 그런 고식(古式)을 지니지 않았다. 다만 정침(正寢)(안채)은 그
건축수법으로 보아 임란 전의 건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원래 이 집은 日자형에 가까운 배치형태로 제청(祭廳)과 문간채가 있었으나 철거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일부 건물과 사당이 없는 尸자형 배치를 보이고 있으며, ㄷ자형의 안채와 ㄱ자형의 월담헌이
연결되어 평면구성이 전형적인 안동지방 ㅁ자형 집의 유형을 나타낸다.
안채는 앞면 4칸·옆면 5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사랑채인 월담헌은 앞면 3칸·옆면 2칸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사방 벽에는 '월담헌기', '축천당기' 등 당시의 명사들이 읊은 시가 많이 있으며, 월담헌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지었다고 하며, 월담헌 동쪽 밖에는 사당이 있고, 성화(成化) 17년(1481)이라
새겨진 와당이 전해내려오며, 금동부처 4좌가 있었다고 하는데 1963년에 도난을 당했다고 한다.
자연지형을 이용하고, 누각인 사랑채를 주건물로 해 주택을 사각형으로 배치시킨 것은 매우 희귀한 예로
또한 이 집이 자리잡은 방향과 땅의 형세는 궁중건물이 아니고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명당이라는 점이 특징
이다.
마을 입구에는 사월 조임 선생이 1621년 건립한 숙운정(宿雲亭)이 있는데 2005년 9월 20일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4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숙운정 건물은 1889년에 후손인 조언겸(趙彦謙)이 중수한 것으로 비록
건립 당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나 아직까지도 빈객접대와 문중회의 등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으로 정자주위에는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렀으며, 전면 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했고 정자의 우측에는 조임의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연접시킨 중당협실형(中堂浹室形)인데, 전면에는
평난간을 세운 누마루와 같은 느낌을 들도록 했으며, 전닫이 세살문을 달아 마루방을 이루게 했고, 가구는
오량가의 소로면에는 판벽을 설치한 후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로 중건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손들이
중수하였고 벽에는 조임의 숙운정기와 중건기가 걸려 있다.
△ 17세기초 상류주택 '영양 한양조씨 사월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지정
영양 한양조씨 사월 종택은 경북 영양에 입향한 한양조씨 조원(1511∼?)의 손자인 사월(沙月) 조임
(1573∼1644)이 1602년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북쪽에 야산을 두고, 남쪽에는 하천과 농경지가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세에 건립됐다.
고택은 경북 지역 상류 주택의 보편적인 형태인 ㅁ자형 본채와 방앗간채, 사당으로 구성된다.
본채는 대청마루와 안방, 부엌이 연결된 안채와 방 3개, 마루 2개가 있는 'ㅗ'자 형태의 사랑채가
나뉘어 있다.
이처럼 사랑채가 분리된 공간 구성은 앞서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영덕 충효당 종택,
영덕 무안박씨 무의공파 종택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은 "조선 중기에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를 잡으면서 남성의 활동공간인
사랑채가 본채에서 떨어져 나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안동문화권의 ㅁ자형 가옥
중에서도 독특한 평면 형태"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양조씨 사월 종가 가문이 영덕 지방 가문과 혼인으로 연결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본채의 사랑채 영역. [문화재청 제공]
아울러 한양조씨 사월 종택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 대부분 18∼19세기에 지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건립 연대가 이르고, 중요한 제례가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건립과 중수에 대한
내용을 담은 문헌과 편액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임의 사월문집 책판은 2015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의 일부이기도 하다.
- 작성자 연합뉴스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7/12/29 09:5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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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초 상류주택 '영양 한양조씨 종택' 국가민속문화재 지정(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문화재청은 경북 지역 사대부 주택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건축물인 '영양 한양조씨 사월 종택'을
국가민속문화재 제294호로 지정했다고 29일 밝혔다.www.yonhapnews.co.kr
△ 상원리 마을과 주강정 및 사고종택(株江亭 및 沙皐宗宅)
주정강 및 사고 종택은 사월 조임의 넷째 아들인 사고(沙皐) 조정옥(趙廷玉)이 지은 건립한 살림집으로
사두들마을 안에 남서항해 자리 잡고 있는 집으로 2006년 2월 16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499호로 지정
되었다.
전면에 세워진 5칸 규모의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자형
정침이 자리잡고 있으며, 정침의 우후측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정침의 좌후측에는 손자인 주강(柱江) 조시광(趙是光)이 건립한 주강정(柱江亭)이 방형의 토석담장을 두른
별도의 공간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강정의 전면에는 주사(廚舍)와 별묘(別廟)가 각각 배치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자형 건물로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온돌방과 마루방을
두고 우측에는 팔작 지붕을 얹은 3칸 규모의 사랑채를 배치했으며, 좌측칸의 마루방과 우측칸의 대청은
좌우로 돌출되어 양날개집의 형상을 이루게 했다.
안채는 3칸 규모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을 두었으며, 안방과 건넌방의 전면에는 부엌과
고방을 연접시켜 각각 좌·우익사를 이루게 했으며, 주강정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규모의 팔작기와집이다.
상원마을에는 비릿골이라는 작은 산골 동네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 중엽, 영양읍 상원리 비릿골에 한양조씨 후손인 수월(水月)과 사월(沙月)이라는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조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어 용한 의원을 찾아가 처방을 받아 수발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조모가 수월공을 불러 잉어를 먹으면 병이 나을것 같다고 말해, 때는 흰 눈이 덮이고 얼음이 꽁꽁 언
엄동설한이지만, 수월공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고 강가로 나가 얼음을 뚫고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하고 기진맥진해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회복한 그는 얼음을 깨고 다시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별 수 없이 울면서
강가를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더니 큰 잉어 한 마리가 강위로 뛰쳐 올라 왔다 이에 그 잉어를
가지고 와서 조모께 다려 드렸더니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수월공의 효성을 본받기 위해, 그 곳을 잉어가 나른 골짜기란 뜻으로 비릿골이라고
하였고, '승정처사 수월공 검축천단비란 비각과 비리동천(飛鯉洞天)'이란 비를 세워 그 넋을 기리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