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주막 - 여강 최재효
사극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막은 출입문에 ‘酒’가 쓰인 깃발이나 등(燈)을 내걸고 서민들을 상대로 술과 식사를 팔고 잠자리까지 제공하던 곳이다. 주막집 앞에 오동나무가 있으면 ‘오동나무집’, 은행나무가 있으면 ‘은행나무집’, 집주인이 애꾸면 ‘애꾸네 집’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막은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있었다. 나루터, 역참, 사람들이 오가는 번잡한 사거리, 길목, 장터 등이 주막이 들어서기에 적합한 장소다. 주막은 행인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고 전달하는 곳이기도 했다.
시골에만 주막이 있던 게 아니었다. 도회지에도 주막은 행인들이나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들에게는 꼭 필요한 장소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주막촌을 꼽으라면 한양의 광진 나루와 마포나루, 경상도 문경새재, 충청도 천안 삼거리, 경기도 여주의 이포나루, 경상도 섬진강의 화개장터, 전라도 지역 농산물의 집산지였던 전주 등이 있다. 특히, 조선 시대는 한강의 물길을 이용해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지역의 세곡미(稅穀米)를 조운선(漕運船)으로 실어 날랐다. 자연히 중간지역인 여주에는 큰 나루터와 장터가 생기고 주막촌과 색주가가 섰다. 주막은 규모에 따라 다른데 보통의 경우에는 봉놋방 열 개, 창고, 마구간 등이 구비되어 있어 장돌뱅이, 행상, 보부상이 끌고 다니는 말이나 당나귀를 맡아 관리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대개의 주막은 허술한 초가로 봉놋방 한두 개가 고작이고 마당에 평상이나 탁자 몇 개가 있다. 방이 적다 보니 양반이 봉놋방을 차지하면 서민들은 평상이나 마루에서 쪽잠을 자야 했다. 보통의 주막을 꾸려나가려면 주모 이외에 열 명의 일꾼이 있어야 가능했다. 주방에서는 주모의 지시에 따라 동자아치와 반빗아치가 부산하게 움직였고, 중노미는 손님들이 타고 온 말이나 당나귀를 관리하거나 잡심부름으로 쉴 틈이 없었다. 또한, 남자 주인은 혹시 손님이 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지, 주모 몰래 술을 더 퍼마시는지 등을 감시해야 했다. 주모는 주색(酒色)을 밝히는 나그네들의 요구에 주막 근처에 대기 중인 들병이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 밖에 허드렛일을 하는 추레한 여인들도 서넛은 있어야 했다. 인천역사자료관의 기록에 의하면 인천시청에서 남동경찰서 주변은 조선 말엽에 성리(城里), 구월리(九月里), 지상리(池上里), 전자리(前子里) 등 네 개의 자연 취락이 있었다. 조선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되면서 네 개 마을은 구월리로 편입되면서 현재의 구월동이 되었다. 네 개 마을이 구월동으로 통합되기 전에 전자리는 전재울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지금의 남동경찰서 근방에 있던 마을이다. 조선 시대에 남사당과 광대패 등 재인(才人)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내가 거주하는 곳이 구월동 1160번지 일대인데 바로 옛 전재울 지역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대로변에서 떨어져 있고 주로 5층 미만의 다세대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 늘 조용하다. 매일 아침 열 시쯤 생선 장수와 과일 장수의 스피커 소리가 지나가면 온종일 고양이 소리와 비둘기 구구대는 소리만 들린다. 이 지역에 필자가 십 년째 단골로 찾는 명물이 있다. 주요 고객은 필자처럼 초로에 접어든 지천명(知天命)에서 고희(古稀) 사이에 있는 부류의 이웃들이다. 나는 빈틈없이 돌아가는 요즘에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상호가 마음에 들어 문을 열었다가 십 년 단골이 되고 말았다. 오장육부가 단단하지 못한 나는 중년이 되면서 자주 하얀 침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모래를 씹어도 소화를 시킬 나이에는 물 건너온 40도짜리 독주(毒酒)와 전통 소주를 고집했다. 두 종류 모두 중년의 뱃속에 불을 지펴대기 알맞은 주정(酒精)이 포함되어 있다. 20년 넘게 주지(酒池)에서 논 결과는 처참했다. 인체에서 발전소라 할 수 있는 위(胃)가 부실하면서 얼마 전에는 담낭(膽囊)까지 말썽을 부렸다. “오늘 엉터리에서 뚫어진 하늘이나 올려다보면서 지청구나 하지.”“좋지. 시간 맞춰오게. 늦으면 자리가 없어서 밖에서 기다려야 하네.”비 오는 날이면 휴대전화를 자주 들여다본다. 초로(初老)들의 생체리듬은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자주 부합되니 말이다. ‘엉터리 주막’ 주모의 손맛은 이 일대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늘 밑반찬이 새롭다. 지난 십 년 동안 계절에 따라 제철에 나는 재료로 반찬을 만든다. 스무 평 남짓한 주점에 연탄 아궁이를 생각나게 하는 둥근 양철 탁자가 열 개 정도 있는데 하늘이 꾸물대는 날이면 자리가 없다. 수더분하게 생긴 주모는 늘 똑같은 미소로 손님을 대한다. 손님 대부분이 인천 시민답게 *소성주(邵城酒)를 벗 삼고 있다. 어느새 머리에 잔설이 수북이 쌓이다 보니 화려하거나 고급스러운 주점은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번잡한 사거리도 아니고, 장터에 있지도 않은데 늘 단골들로 북적거린다. 옛날처럼 과거를 보러 가는 유생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보부상이나 행상이 존재하는 시대도 아닌데, 항상 주막이 나그네들로 북적이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들도 나처럼 싱싱한 밑반찬이 마음에 들어서 왔을 거다. 물론 근처에 구월동 식자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시장이 있기는 하다. 주막 앞 소도로에는 말이나 당나귀 대신 주당들이 타고 온 소형 승용차들이 도로 좌우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십 년 단골이 되다 보니 동네를 다니다 낯익은 사람을 보면 인사를 나눈다. 같은 주점에서 탁주잔을 기울이다 눈에 익은 얼굴이니 보통 인연이 아니다. 나는 두부 부침이나 낙지 소면을 주로 주문하는데, 나의 배속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주모는 달착지근하면서 맵지 않게 만들어 내온다. 가을부터 이듬해 늦봄까지 나의 주메뉴는 거의 생태탕에 한정되어 있다. 미나리를 잔뜩 넣은 생태탕 한 그릇이면 만사가 행복하다. 거기에 하루 이틀 숙성된 탁배기 한잔 곁들이면 나는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경지 안에 있다. 비 내리는 저녁 무렵이면 엉터리에는 엉터리 주선(酒仙)들이 넘쳐나고 땀 냄새 진동하는 사내들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풍년이다.
* 소성주 – 소성(邵城)은 통일신라 때 인천의 지명이다. 통일전 백제시대에는 미추홀(彌鄒忽)로 불리다 매소홀(買召忽)로 바뀌기도 했다. * 별유천지비인간 – 이백(李白)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의 마지막 행이다. 다른 세상에 있고 인간 세상 이 아니라는 뜻으로, 경치나 분위기가 좋은 곳을 이르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