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파타’와 ‘탈리타 쿰’
최 화 웅
성경을 읽다보면 간혹 낯선 어휘에 어리둥절해진다. 번역과 해설이 뒤따르긴 하지만 BC 24세기, 그 까마득한 과거 쐐기(설형)문자 체계의 발명과 역사상 최초의 법체계와 학교 제도, 세금 감면이 실시된 고대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남부의 작은 나라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Gilgaméš)를 노래한『길가메시의 서사시』를 통해 인류 최초의 연가(戀歌)를 지어 불렀다. 사랑과 미움을 목 놓아 울고, 희열에 겨워 노려하고 지치며, 희망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친 삶이 인류역사를 수메르(Sumer) 우루크에서 출토된 점토판과 그 파편에서 밝혀지고 있다.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Samuel Noah Kramer)의 역작『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 39가지를 소개한다. 유태인들이 그들의 성경을 쓰고 그리스인들이「일리아드」와「오디세이아」를 만들기 1,000년도 훨씬 전에 수메르인들은 신화와 서사시, 찬미가와 애도가, 그리고 수많은 속담, 우화, 에세이 모음으로 구성된 문학 활동을 이루었다. 성경은 종교개혁 이후 마르틴 루터에 의해 번역되었다. 헬라어 원전인 신약은 1522녀, 히브리어 원전인 구약은 1533년에야 번역되었다.
문명의 발상지인 옛 중동지역의 아람어와 헬라어가 유서 깊은 오리엔탈리즘의 숨결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ord W. Said) 역시『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서구인들이 말하는 동양의 이미지가 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아람어와 헬라어를 통해 서양을 역사의 중심에 놓고 보는 세계사적 인식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으로 크게 바뀌었다. 삶의 길목에서 만나는 성경 속의 외마디 말들은 현대적 의미의 새로운 깨우침으로 다가와 백 마디 웅변보다 더 깊고 큰 울림으로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다. 연f중 제13 주일 복음에 나오는 ‘탈리타 쿰’(마르 5, 21)과 제23 주일 복음의 ‘에파타’(마르 7, 34)가 그 예다. 이 말은 스페인어나 영어, 독어나 프랑스어가 아닌 고대 그리스의 헬라어이거나 시리아 지역의 샘족어에 속하는 아람어다. 아람어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나자렛과 가버나움 등지의 갈릴리 지방의 예수님과 동시대인(同時代人)들이 사용한 옛 언어다. 아람어는 BC 500년경부터 AD 600년 무렵까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옛 수메르 지역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여러 민족들이 사용한 고대 오리엔트지역의 국제어다.
헬라스어 또는 헬라어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BC 300년에서 AD 300년에 이르는 헬레니즘시대는 그리스인들의 생각과 사고방식, 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독교 최초의 복음서인 마르코복음이 AD 70년경에 쓰였다고 전하니 그 복음서는 당시 아람어와 헬라어로 쓰여진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추정한다. 20세기에도 그 시대의 말을 성경의 원문 그대로 인용하여 인구에 회자하는 것은 그 말이 담고 있는 기적의 의미 또한 그대로 전하고 이어가고 싶었으리라. 마르코복음 5장에 나오는 ‘탈리타 쿰’은 “일어나라”라는 뜻이다. 마르코복음 5장 21절부터 43절에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에서 나오는 기적의 에피소드에서 나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그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는 내용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세상의 잠자는 모든 영혼과 우리의 혼미한 정신을 깨워 진리와 진실을 말하게 하려는 외침일 것이다.
마르코복음 7장에 나오는 ‘’에파타‘는 마르코복음 7장 31절부터 37절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레이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에파타’의 메시지는 세상으로 통하는 소통의 귀를 열고 굳게 다문 침묵의 입을 열어 하나의 입으로 말하고 두 개의 귀로 듣는 감각의 공존시대를 연 기적을 이룬다. 그 참뜻은 선행과 기도라는 요란한 행차의 팡파레만 울리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고 연대하는 삶의 실천을 촉구하는 가르침이다. ‘에파타’는 귀 막고 입 닫은 채 눈만 깜박거리며 눈치만 살피는 세상을 향한 꾸지람이리라.
오직 자기 자신만을 소중하게 여겨 제 한 몸의 편함을 헤아리는 독선과 기회주의적 이기주의를 벗어나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울부짖는 공동체의 비통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입을 열어 할 말을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서로 잘 통해서 오해가 없는 것’을 뜻한다. 서로의 생각을 진솔하게 나누며 이해와 배려, 겸손과 낮춤의 복음정신을 사는 길이 곧 소통의 첫걸음이다. 소통은 우리를 갈라놓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더불어 살아갈 삶에 마음을 모으려는 인간의 뜨거운 열망이어야 한다. 입으로는 평화와 평등을 외치면서 권위에 찌들어 오직 군림하고 지배하려는 갑질로 대접 받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허망한 욕망은 빗나간 생활습속 때문이 아닐까? 믿음 공동체는 사회 공동체의 삶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성경의 현대적 의미는 세상의 모든 이가 서로 소통하고 고루 나누는 삶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느끼며 바른 마음가지고 실천해야할 나침판 같은 것이 영적 믿음이 아닐까? 나는 ‘새삼 스스로를 돌아보며 얼마나 많은 양심의 결정에 따라 스스로를 부활의 연대와 행동에 투신했는가?’ 성찰한다.
첫댓글 국장님 추석 명절 잘 지내셨습니까.
저부터 먼저 성찰과 회개를 합니다.
복음 말씀대로 충실히 살지 않고 있습니다.
모범은 못 보여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는 않아야 되는데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시간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올시다.
저의 작은 고백이 그만 들켰군요.
평소 저의 모자람에 대한 성찰과 회개와 함께 귀와 입을 통한 품성을 생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