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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주의와 해체
ICC는 1990년 5월 소련이 붕괴하기 전 동구권이 붕괴한 지 몇 달 만에 '해체에 관한 테제'(「국제평론」 62호, 107호)를 채택했다. 1990년 8월 초에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도록 이끈 사담 후세인에 대해 미국이 설정한 함정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집중한 것은 동구권이 사라진 첫 번째 결과였다. 대서양 동맹의 대열을 좁히려는 미국의 시도는 동구의 적이 실종됨으로 인해 붕괴의 위협에 놓였다. 1990년 10월 ICC가 해체 테제를 보완한 '군국주의와 해체' 소개 전문(「국제평론」 64호)을 논의해 채택한 것은 미국 주도의 주요 서방 국가들의 대(對)이라크 군사 공세를 준비했던 이들 사건 이후였다.
ICC는 2017년 제22차 국제대회에서 27년 전 채택한 본문을 기본적으로 확인한 해체 테제 '오늘의 해체 보고서' 「국제평론」 164호를 업데이트해서 채택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은 군국주의 문제에 대한 보완적인 글을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1990년 10월의 상황과 비슷하다. 쇠퇴기 전쟁 문제에 대해 ICC가 수십 년 동안 스스로 부여한 분석의 틀을 잊어버린 결과 이 전쟁의 발발을 예견하지 못한 실수를 생각하면 그러한 조치는 더욱더 필요한 부분이다.
1) 1990년 "군국주의와 해체"라는 글의 1번 항목은 우리에게 맑스주의 방법의 살아있는 성격과 과거에 우리가 할 수 있었던 분석을 비판, 확인하거나, 또는 그것을 더 많이 만들도록 수정함으로써 끊임없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새로운 현실과 맞설 필요성을 상기시킨다. 세밀한 본문에서는 이 항목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 반면, 우크라이나의 현재 전쟁에 대한 일부 부르주아 "전문가들"이 만든 잘못된 해석에 직면했을 때, 프롤레타리아 정치 환경 대부분의 집단에 의해, 전쟁과 더 일반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에 관한 맑스주의 방법의 근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유용하다.
그 밑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다: "인간은 존재의 사회적 생산에서 필연적으로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한, 즉 물질적 생산력 발전의 결정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 관계에 들어간다. 이러한 생산 관계의 총체성은 사회의 경제 구조를 구성하는데, 이는 법적, 정치적 상부 구조를 형성하며 일정한 형태의 사회적 의식이 존재하는 진정한 기반이다. 물질적 경제적 기반이 사회생활의 다른 측면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은 종종 기계적이고 환원주의적인 해석의 대상이 되어 왔다. 엥겔스가 1890년 9월 조지프 블로흐(Joseph Bloch)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고 많은 다른 문헌에서) "유물론적 역사 개념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역사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실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맑스와 나는 둘 다 이것보다 더 강력하게 주장해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누군가가 이것을 경제적 요인이 유일한 결정적 요소라고 말하도록 왜곡한다면, 그는 그 명제를 무의미하고 추상적인, 터무니없는 말로 변형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경제적 상황은 기본이지만, 계급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그 결과들, 보기를 들어 성공적인 전투 후 승리한 계급에 의해 확립된 헌법, 법적 형태, 그리고 특히 이 모든 실제적 투쟁의 반영들, 즉 참여자들, 폴리의 두뇌, 즉 상부구조의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역사적 투쟁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고 특히 그들의 형태를 결정하는 이 모든 요소의 상호작용이 있는데, 이 요소들은 수많은 사고 속에서 (…) 경제 운동이 마침내 자체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분명히, 우리는 부르주아지의 "전문가"들에게 맑스주의 방법을 채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한편, 노동자 운동, 특히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본 원칙과 관련하여 맑스주의자이며 이 방법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많은 조직이 전쟁의 원인에 대한 엥겔스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비판한 것을 주목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따라서 1990-91년 걸프전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었다. "미국은 '미국의 국익'을 뻔뻔하게 정의하여 걸프만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보장받아 왔다. 이란에 대항하여 이라크를 지원하게 했던 것과 같은 이익 때문에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원하게 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대(對)이라크 석유 군주"(국제주의코뮤니스트당 – Le Proletaire의 전단)를 작성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실, 걸프만의 위기는 석유에 대한 통제의 위기이다. 값싼 휘발유가 없으면 수익이 낮아질 것이다. 서구 자본의 이익은 위협받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중동에서 유혈사태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며….(「국제주의코뮤니스트경향」의 영국 지부) 이탈리아의 ICT 지부인 「코뮤니스트 투사」의 분석에 따르면, "석유는 거의 모든 생산 주기에 직간접적으로 존재하며, 독점적인 임대료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인 비중을 차지하며, 결과적으로 가격 통제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가 침체의 징후를 분명히 보이고, 엄청난 규모의 공공 부채, 유럽과 일본의 경쟁에 직면한 낮은 생산성에 빠진 생산적 기구와 함께, 미국은 세계 경제의 이러한 근본적인 변수인 석유 가격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중동에서 이후 30년 동안 일어난 일은 그런 분석과 모순된다. 이 지역(2003년 부시 주니어 행정부에 의해 시작된 전쟁과 같은)에서 미국의 다양한 모험은 미국 부르주아계급의 경제적 비용이 유가의 통제(만약 정말로 이 전쟁들로 인해 어떤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보다 더 높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은 직접적인 경제적 목표가 없다. 2022년 2월 24일 적대감을 촉발한 러시아도, 1989년 제국의 붕괴 이후 러시아가 약해진 틈을 타 20년 이상 나토의 국경까지 확장하기 위해 나토의 확장을 추진해 온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한다면, 러시아는 현재 파괴하고 있는 지역을 재건하는데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머지않아, 서방에 의해 시행된 경제 제재는 가뜩이나 취약한 경제를 더욱 약화할 것이다. 서방측에서는 이미 수백억 달러가 투입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는 말할 것도 없고, 이와 같은 행동도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사실 현재의 전쟁은 ICC가 분석한 자본주의 쇠퇴기와 특히 쇠퇴의 정점을 구성하는 해체 국면의 전쟁 문제를 더욱 잘 보여주는 사례다.
2) 20세기 초부터 노동운동은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역사적 쇠퇴기에 진입한 가장 중요한 징후로 부각했다. 이러한 역사적 시대의 변화는 전쟁의 원인을 분석하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GCF)」는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인 특징에 대해 밝혔다.
"증강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전쟁은 (국가, 식민지, 제국 정복에 관계없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성숙하고, 강화되고, 확장되는 상향적인 움직임을 상징했다. 자본주의 생산은 전쟁을 정치 경제의 다른 수단으로 계속 사용했다. 각각의 전쟁은 더 큰 확장을 위한 새로운 분야를 열어 자본주의 발전을 보장함으로써 정당화되고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자본주의 쇠퇴의 시대에 전쟁은, 평화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쇠퇴를 표현하고 이를 매우 가속한다.
전쟁을 생산과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의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과정으로 나타날 평화와는 반대로 사회의 발전에 대한 훼방꾼이자 족쇄인 부정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경제적으로 결정된 과정에 도덕적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다.
전쟁은 자본이 발전을 위해 외부 영역을 개방하는 필수적인 수단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러한 영역이 존재하고 폭력을 통해서만 개방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발전의 모든 가능성을 다 소진한 자본주의 세계는 근대 제국주의 전쟁에서 생산력을 심연 속에 집어삼킬 수밖에 없는 붕괴의 표현을 발견하고, 생산의 외적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고, 끊임없이 가속하는 리듬으로 파멸에 파멸을 축적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전쟁과 평화 사이에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하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상승기와 쇠퇴기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각각의 단계에서 전쟁의 기능(그리고 전쟁과 평화의 관계)에 차이가 있다. 1단계에서는 전쟁이 시장의 확장을 보장하는 기능을 하지만, 2단계에서는 생산은 본질적으로 파괴 수단, 즉 전쟁의 생산에 맞춰진다. 상승기에 전쟁이 경제 발전의 과정에 기여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기에는 쇠퇴기의 경제 활동이 본질적으로 전쟁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두드러지게 표현된다.
전쟁은 항상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쇠퇴하는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영원한 삶의 방식이 된다는 것이다. (「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 대회」, 1945년 7월 국제정세 보고서, ICC 제3차 총회에서 국제평론 제18호에 발표되었다).
1945년에 공식화된, 이러한 분석은 새로운 세계 전쟁이 없는 동안에도 근본적으로 유효했다. 그 이후로 세계는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만큼 많은 죽음을 초래한 100개 이상의 전쟁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이 상황은 동구권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 이후에도 계속되고 심지어 심화하여 왔는데, 이것은 자본주의가 붕괴의 단계로 진입하는 첫 번째 큰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1990년에 "사회의 일반적인 해체는 자본주의 쇠퇴의 마지막 단계"라는 문서에서 이것에 대해서 발표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단계는 자본주의 경제의 역사적 위기, 국가 자본주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현상 등 쇠퇴기의 구체적인 특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더욱이, 해체는 자본주의가 쇠퇴기로 급락하는 모순의 정점으로 나타나는 한, 이 시기의 구체적인 특징들은 그것의 궁극적인 단계에서 여전히 더 악화한다. (...) 스탈린주의의 종식이 국가 자본에 대한 역사적 경향의 종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하나의 징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현재 제국주의 블록의 소멸은 제국주의의 사회생활에 대한 지배력의 문제에 대한 사소한 소명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근본적인 차이는 스탈린주의의 종말은 특히 비정상적인 형태의 국가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에 해당하지만, 블록의 종말은 여전히 더 야만적이고, 비정상적이며, 혼란스러운 형태의 제국주의로 가는 문을 열 뿐이라는 사실에 있다. 1990-91년 걸프 전쟁,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특히 아프리카에서 20년 이상 지속된 많은 전쟁이 이러한 예측을 더욱더 잘 확인시켜 주었다.
오늘날 유럽의 심장부,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러한 현실과 훨씬 더 큰 규모의 새로운 보기이다. 그것은 체제의 세계적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쇠퇴기에 전쟁의 완전한 비합리성에 대한 ICC의 논제를 웅변적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다. (「국제평론」 제168호, 2022년 5월에 채택된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과 중요성" 본문 참조)
3) 사실 1945년 GCF(프랑스 코뮤니스트좌파)의 본문에 발표된 바와 같이 19세기 전쟁과 20세기의 전쟁을 구분하는 것이 완전히 타당하다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의 쇠퇴는 고조기에는 전쟁이 경제 발전의 과정에 기여했던 반면, 쇠퇴기에는 경제 활동이 본질적으로 전쟁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에 의해 현저하게 표현되지만, 19세기의 각 전쟁에 직접적인 경제적 원인을 돌릴 수는 없다. 보기를 들어,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에 재앙적인 대가를 치르게 하였고, 이로 따라 결국 영국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데에 있어서 상당히 약화하였으며, 19세기 중반에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지배적 지위로 향하게 하는 후자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후자의 경우, 맑스 ("프랑스-독일 전쟁에 관한 총회 제1차 연설"에서) 프랑스와 독일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역동적인 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독일 측에서는 프로이센 국왕이 당시까지만 해도 관세동맹(Zollverein)만 관리하던 소규모 게르만족 국가들을 왕국에 다시 편입시켜 제국을 세우려 했다.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의 합병은 이러한 결혼의 선물이었다. 나폴레옹 3세에게 전쟁은 근본적으로 프랑스의 산업 발전으로 위협받는 제2제국의 정치 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프로이센 측에서는, 군주의 야망을 넘어, 이 전쟁은 독일의 완전한 산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는 정치적 통합을 가능하게 하지만, 프랑스 입장에서 이 전쟁은 완전히 반동적이었다. 사실 이 전쟁의 보기는 엥겔스가 역사적 유물론에서 완벽하게 제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회의 상부구조, 특히 정치와 이데올로기(정부의 형태와 국민감정의 구성)가 사건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사회의 경제적 기반은 독일의 산업 발전의 실현과 전체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결정 요인으로 본다.
사실, 각 전쟁의 경제적 원인을 찾아 "유물론자"가 되려고 하는 분석은 맑스주의 유물론도 변증법적이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이러한 "망각"은 현시대 제국주의 갈등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는데, 이는 사회생활에서 군국주의를 매우 강화하는 것에 의해서 명확하게 정의된다.
4) 1990년의 "군국주의와 해체"라는 글은 개방적인 시기의 제국주의 분쟁에서 미국 권력이 취할 위치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우리가 진입한 새로운 역사적 시기에, 그리고 걸프전 사건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세계는 "각자도생"의 경향이 완전히 운영되는, 국가사이의 동맹이 제국주의 블록을 특징짓던 안정과는 거리가 멀지만, 당장의 필요에 따라 지배되는 광범위한 자유주의로 나타날 것이다. 유혈 혼란의 세계에서, 미국 경찰이 점점 더 거대하고 잔인한 군사력의 사용으로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은 냉전 시대의 경쟁자가 몰락한 후에도 특히 1990년대 말, 옛 유고슬라비아와 21세기 초의 중동(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했다. 유럽에서는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던 나토, 심지어 소련에 가입했던 나라들(불가리아, 에스토니아, 헝가리,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에 새로운 국가들을 통합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구와 동구권이 세계를 공유하면서, 1990년에 이미 제기되었던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그와 같은 세계의 새로운 분할이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쇠퇴기 동안, 다양한 제국주의 적대감이 분산되고, 세계(또는, 적어도 그 결정적인 영역)이 두 블록으로 나뉘지 않는 그런 상황은,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타난 두 개의 주요 제국주의 별자리의 소멸은 두 개의 새로운 블록("동구권 붕괴 후, 불안정성과 혼란", 「국제평론」 61호)을 재편성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 글에서 그러한 과정의 모든 걸림돌과 특히 자본주의의 붕괴로 인한 걸림돌을 지적했다." 우리가 이미 강조했듯이 자본주의 사회 해체의 깊고 일반화된 현상에 의해 두 군사 집단 사이의 새로운 지구를 공유하는 경향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고, 심지어 최종적으로 타협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해체", 「국제평론」 제57호).
이 분석은 "군국주의와 해체"라는 소개 글에서 발전되었고, 30년 후, 세계가 두 개의 군사 블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것이 이를 확인해 준다. 「국제평론」 제168호(인용)의 "우크라이나 전쟁의 영향과 중요성"이라는 글은 1990년 기사에 기초하여 발전되었는데, 이는 그들 사이에 지구를 공유하는 두 제국주의 블록의 재건이 여전히 의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군국주의에 관해서 우리가 1990년에 쓴 글을 상기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쇠퇴기의 시작 그리고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의 첫해까지만 해도, 비록 블록 리더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필요했지만, 제국주의 연합의 다른 파트너들 사이에 일정한 '동등함'이 존재할 수 있었다. 보기를 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 프랑스, 미국이라는 세 '승전국'이 운영할 수 있는 군사력 수준에서의 근본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상당히 바뀌었는데, 당시 '승전국'들은 이미 동맹국들보다 훨씬 더 강력했던 미국에 밀접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 모두 각 블록 지도자가 특히 핵무기 보유 덕분에 블록의 다른 국가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냉전"(방금 끝난) 기간 동안 강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주의가 더욱더 쇠퇴기에 빠져들게 됨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 블록 사이 갈등 규모와 그에 관계되는 것은 점점 더 세계적이고 일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깡패들이 더 많을수록, 더 강력한 '깡패'가 되어야 한다.)
- 무기 체제는 그 어느 때보다 환상적인 수준의 투자를 요구한다(특히, 주요 강대국만이 완전한 핵무기의 개발과 더 정교한 무기의 연구에 필요한 자원을 투입할 수 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국가 사이의 원심력이 강화되는 경향은 국가의 적대감이 악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자본주의의 마지막 요소도 그와 같다. 부르주아지의 다른 분파들이 더 많이 서로를 분열시키는 경향이 있을수록, 위기는 그들의 상호 경쟁을 날카롭게 하므로, 따라서 그 분파들에 대한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국가는 더 강화되어야 한다. 같은 방식으로, 공개적인 역사적 위기가 세계 경제를 더 많이 파괴할수록, 더 강자들은 다른 나라 구성 요소들이 이탈하는 경향을 억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블록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쇠퇴의 마지막 단계인 해체의 단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심각하게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모든 이유, 특히 마지막 이유로 새로운 제국주의 블록의 재건은 앞으로 몇 년 동안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혁명이나, 인류의 파괴가 먼저 일어날 것이다.
오늘날 이 분석은 전적으로 타당하지만, 우리는 1990년 글에서는 중국이 언젠가 새로운 블록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의 주요 경쟁자가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누락의 배경에는 중국이 주도적인 경제 대국이 될 수 있다는 점, 즉 제국주의 블록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여건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부분이 중요한 오류이다. 게다가, 중국 부르주아지는 군사력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적, 기술적 힘을 스스로 보유하고 있어야 미국 부르주아지와 군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1980년대 말 소련과 같은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이유 중에서도 중국이 (특히 대만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커지는 군사적 야망을 확고히 하고 있지만, 아직 혹은 앞으로 오랫동안 중국 주변에 새로운 제국주의 블록을 형성하려는 어떤 허세도 부릴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5) 우크라이나 전쟁은, 특히 핵무기에 대한 푸틴의 태도에서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우려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블록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세계 전쟁은 제국주의 블록 구조의 궁극적인 단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한된 국가들과 관련된 전쟁이 동맹의 유희를 통해 전면적인 큰불로 변질하는 것은 구축된 제국주의 블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 열강 간의 제국주의 경쟁의 첨예화에서 비롯된 깊은 역사적 원인인,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다양한 동맹국들이 점차 분쟁에 개입하는 일련의 상황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왕위 계승자 암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 왕국을 굴복시키고자 하였다. 세르비아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 "트리플 협정"을 맺었던 러시아 동맹국의 지지를 즉시 받았다. 1914년 8월 초, 이 모든 국가는 서로 전쟁을 벌였고, 1915년 일본과 이탈리아, 1917년 미국과 같은 다른 나라들이 그 뒤를 따랐다. 마찬가지로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했을 때, 1920년 폴란드, 영국,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조약의 존재는 비록 그들의 부르주아지가 그러한 충돌에 대한 특별한 욕구가 없었음에도 이 두 나라를 독일에 선전포고하게 했다. 유럽 3대 강대국 간의 분쟁은 빠르게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오늘날 NATO 헌장 5조는 회원국 중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은 모든 동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것이 1989년 이전에 바르샤바 조약에 가입했던 국가들, 심지어 발트 3국과 같은 소련이 NATO에 적극적으로 가입한 이유이다. 이제 핀란드와 스웨덴도 수십 년간 '중립'을 유지한 후에 동참하고 있다. 규정이 그렇게 적시되어 있는 상항에서, 우크라이나 국가가 나토에 가입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는 상황을 푸틴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계가 두 블록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것은 제3차 세계대전이 현재 의제가 아니며, 다시는 그 전쟁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세계정세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것이다. 1990년 1월에 우리가 작성한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분석에서, 프롤레타리아 해법인- 코뮤니스트혁명이- 홀로 인류 파괴(부르주아지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 반대할 수 있지만, 이러한 파괴가 반드시 제3차 세계대전의 결과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또한 해체 과정의 논리적이고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맑스주의에 의해 부각된 '사회주의 또는 야만'의 역사적 대안은 '사회주의 또는 제국주의 세계대전' 그리고 최근 수십 년 동안 핵무기의 개발 때문에 더욱 무서운 '사회주의냐 인류의 파괴'의 형태를 가져왔다. 이러한 관점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에도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파괴가 제국주의 세계대전이나 사회 해체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ICC가 이 문서를 채택한 이후 30년 동안 사건들은 제3차 세계대전이 아닌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종말론의 네 기수가 "생태적 재난, 전염병, 기근과 국지적 전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6) "문서 소개: 군국주의와 해체"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부문으로 결론을 맺었다. 이러한 문제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그들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기보다는 이 부분의 발췌문을 인용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전쟁의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의 핵심으로 남아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노동계급에 있어서는 그 어느 때보다 기본적인 부분이다. 분명히, 이 질문이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이전[슈투트가르트(1907년)과 바젤(1912년)의 국제회의가 강조했듯이]의 중심이었다. 첫 번째 제국주의 살육 사건(레닌, 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의 전투, 독일과 러시아의 혁명)에서 더욱 결정적인 부분이 되었다.
그 중요성은 전쟁 기간, 특히 스페인 내전 동안 변하지 않았으며, 물론 1939-45년 사이의 세기 중 가장 큰 대참사 동안에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 사실, 20세기의 시작 이래로 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 및 그 혁명적 소수가 보기를 들어 노동조합이나 의회 문제보다 훨씬 더 많이 맞서야 했다. 전쟁이 죽음의 고통과 그 결과 인류의 생존에 드리워진 위협을 표현하는 쇠퇴하는 자본주의 야만이 가장 집중하는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야만성이 과거 수십 년보다 훨씬 더 많이, (부시와 미테랑이 '새로운 평화 질서'의 예언을 좋아하든 말든) 세계정세의 영구적이고 만연한 요소가 되어, 점점 더 많은 선진국(이들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만 제한됨)이 관여하게 됨에 따라 전쟁 문제는 여전히 노동계급에 더 중요하다. ICC는 과거와 달리 새로운 혁명적 물결의 발전은 전쟁이 아니라 경제 위기의 악화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대규모 계급투쟁의 출발점인 노동계급 동원은 경제적 공격에서 비롯된다는 이 분석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같은 방식으로, 의식 수준에서 위기의 악화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막다른 골목을 드러내는 근본적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식 수준에서 전쟁의 문제는 다시 한번 첫 번째 질서의 한 부분을 담당할 운명이다.
- 인류의 파괴라는 역사적 막다른 골목의 근본적인 결과를 강조함으로써
- 프롤레타리아트가 오늘날 (다른 해체의 징후와 달리) 제한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객관적 위기, 쇠퇴와 해체, 중앙 국가에서 그것은 현재 국가주의 깃발 아래 등록되지 않는 범위에 이르기까지 구성함으로써. (13항)
그것은 전쟁이 위기 그 자체와 경제 공격보다 훨씬 더 쉽게 노동계급을 상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 그것은 평화주의의 발전을 촉진할 수 있다.
-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무력감을 줄 수 있고, 부르주아지가 그러한 경제적 공격을 계속해서 수행하게 할 수 있다." (14항)
오늘날, 우크라이나 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무력감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서방국가에서는 주류언론들이 쏟아내는 선전방송에 힘입어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어떤 강화를 증진하고 있는데, 한 편으로는 '독재자'(푸틴)인 '악'과 다른 한 편으로는 '민주주의자'(젤렌스키와 그의 서방 지지자들)의 대립을 보고 있다. 그러한 선전은 2003년 "위대한 미국 민주주의"의 주인인 부시 주니어가 이라크와의 전쟁 ("큰 거짓말" 사용, 유엔 "국제법" 위반, "금지된" 무기 사용, 민간인에 대한 폭격, "전쟁 범죄" 등)에서 푸틴과 같은 행동을 했을 때 분명히 효과가 더 적었다.
그렇긴 하지만, ICC는 중앙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 특히 서유럽의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주변 국가들과 이전의 사회주의 블록의 국가들 사이의 차이를 내세우는 "가장 약한 고리"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을 발전시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특히 우리의 기사 "계급투쟁의 일반화의 중심에 있는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 「국제평론」 31호와 토론 : “'가장 약한 고리' 이론에 대한 비판" 「국제평론」 37호 참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들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커다란 정치적 약점을 부각한다. 현재의 전쟁은 중앙 국가의 프롤레타리아트에도 부정적인 정치적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것은 고통받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부활이 그것을 확실히 마비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중국은 이미 급격한 인플레이션 상승(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시작되었지만, 후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에 따른 경제적 공격을 통해 이 전쟁의 결과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러한 공격에 대한 계급투쟁의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우리의 계급 내 개입은 물론 심각한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전체 계급에 대한 공격과는 별개로 다음과 같이 결정된다.
- 근본적인 전쟁 문제의 중요성
- 오늘날 위태로운 무게에 대해서 계급 내 혁명가들이 의식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
그러므로 이 문제가 우리 언론의 전면에 계속 등장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시기, 이 문제가 국제적 사건의 전면에 있는 시기에는, 우리는 노동자들의 그것에 대한 특별한 감성으로부터 특별한 강조와 우선권을 부여함으로써 이익을 얻어야 한다. (문서 소개: 군국주의와 해체, 15항)
7) 30여 년 전에 제시된 이러한 방향은 오늘날도 완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에 직면한 우리의 선전에서는 혁명적 투쟁의 일반화를 위한 조건에 대한 우리의 분석, 특히 1981년 「국제평론」 26호에 실린 우리의 글 "노동계급 투쟁의 일반화를 위한 역사적 조건"에서 발전된 분석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십 년 동안 혁명가들은 파리 코뮌(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1905년 러시아혁명(러시아-일본 전쟁 중), 1917년과 1918년 독일에서의 제국주의 전쟁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최상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여겼다. 또는 심지어 이것은 오직 세계대전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코뮤니스트좌파 단체들 사이에서 여전히 널리 퍼져 있는 분석인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역사적 경로에 대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직 ICC만이 이러한 분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맑스와 엥겔스가 생전에 발전시킨 고전적 분석으로 돌아갔는데, 이 분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은 자본주의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제적 붕괴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분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된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a) 만약 프롤레타리아트가 전쟁에 아주 많은 반응을 보이게 되면, 그 나라의 부르주아지는 적대적인 행동을 끝내고 전쟁에서 퇴장함으로써 그러한 반응을 약화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1918년 11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을 의식한 부르주아지는 발트해에서 수병들의 봉기가 일어난 지 며칠 만에 협정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하는 데 급급했던 것은 바로 독일에서 벌어진 일이다. 대조적으로, 어떤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규모의 전면적인 투쟁의 원인이 될 경제적 경련을 극복하고 끝낼 수 없을 것이다.
b) "전쟁은 승자뿐만이 아니라 패자도 발생시킨다. 패배한 국가들에서는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혁명적인 분노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서 생겨나는 복수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이러한 후진적 경향은 혁명가들의 진영에까지 파고들었고, 이는 민족적 코뮤니즘을 주창했던 KAPD(독일 코뮤니스트노동자당)의 경향과 KPD(독일 코뮤니스트당) 선전의 축이 될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볼 수 있다. 더 나쁜 것은 승전국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효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이미 나타났듯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순수하고 단순한 애국주의 정신이 아니라면 나태한 정신이었다.” (「국제 평론」 26호)
c) 부르주아지는 제1차 세계대전과 그것이 일으킨 혁명적 물결로부터 교훈을 얻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중앙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심각한 정치적 패배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독일 측에서는 나치 테러를, 연합군 측에서는 반(反)파시스트 동원을 하여 이를 달성하였다. 반면에 지배계급은 특히 패전국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상하는 것을 막거나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하였다. "가장 위태로웠던 이탈리아에서 부르주아지(...)는 즉시 정권을 바꾸고 그런 후에 동맹을 맺었다. 43년 가을에 이탈리아는 둘로 나뉘었다. 남쪽은 연합군의 손에 있었고, 나머지는 나치에 의해 점령되었다. 처칠의 조언(이탈리아는 스스로 국을 끓이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에 따라 연합군은 북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늦추었고, 두 가지를 성취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은 독일군이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반(反)파시스트' 세력에게 반(反)자본주의 투쟁의 지형에서 반(反)파시스트 투쟁의 지형으로 운동을 전환하는 임무를 부여했다. (...) 독일에서… 국제 부르주아지는 1918-19년과 유사한 사건의 반복을 피하고자 체계적으로 행동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연합군은 함부르크나 드레스덴과 같은 대도시에서 전례 없는 폭격을 통해 숙소의 노동자들을 대량으로 몰살했다. 1945년 2월 13일, 히로시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두 배인 135,000명(히로시마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두 배)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군사적 목표로서 그들은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독일군은 이미 철저하게 패했다) 그들의 목표는 노동계급을 공포에 떨게 하고 어떤 식으로든 조직화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 둘째, 연합군은 독일 영토 전체를 점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휴전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들은 패배한 독일 부르주아지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영토를 직접 관리하려고 안달했다. 마지막으로 후자가 항복하고 그들과 긴밀하게 협력하여 연합군이 민간인들을 만났을 때 초래될 수 있는 폭발적 혼잡을 피하고자 수개월 동안 전쟁 포로를 붙잡았다. 1944년 후반 폴란드에서는 붉은 군대도 바르샤바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더러운 일을 나치 군대에 맡겼다. 1945년 초 부다페스트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1943 :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전쟁으로 야기되는 희생에 반대한다.” 「국제평론」 75호)
d)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출현은 이 전쟁의 특징에 의해 사람들이 선호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이 전쟁은 특히 탱크와 항공기와 같은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수단들을 대규모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양측의 전투원들 간의 직접적인 교전의 가능성은 크게 제한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3차 세계대전은 어느 단계에서 핵무기에 관한 요구를 하게 될 것이며, 이것은 분명히 그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 가능성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다.
8) 과거에 우리는 "혁명적 패전주의"의 구호를 비판해왔다. 이 구호는 특히 레닌이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제기하였고, 근본적으로 국제주의적인 우려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는 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들이 사회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기 전에 그들의 나라가 승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사회-애국주의자들이 퍼뜨린 거짓말에 대한 비난이었다. 이러한 거짓말들에 직면하여, 국제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에 유리한 것은 한나라의 승리가 아니라 반대로 그 나라의 패배라고 지적했다. (프로이센에 패한 후 파리 코뮌이 이어진 것과 러시아의 대일 전쟁 실패에 따른 1905년 혁명의 보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 후, "혁명적 패전주의"의 구호는 진정한 국제주의에 등을 돌린 자국의 부르주아 계급이 패배하는 것을 보기 위한 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바람으로 해석되었다. 실제로 레닌은 1907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로자 룩셈부르크, 마르토프와 함께 제정된 개정안을 구체화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자"는 구호를 먼저 내세웠다. “그런데도 전쟁이 발발할 경우 [사회주의 정당들은] 전쟁을 조속히 끝내고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최대한 활용하여 가장 깊은 민중의 심연을 자극하여 자본주의 지배의 붕괴를 촉진할 의무가 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의 전환"하라는 구호를 구체화한 것으로, 프롤레타리아는 다른 나라에서 계급의 형제들을 학살하기 위해 그들의 착취자들을 향해서 무기를 들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군인들이 여전히 그들의 장교들에게 총구를 돌릴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이 상관에게 "우연히" 총을 쏘거나 폭탄을 장교들의 천막에 투척한 경우가 있었다), 그러한 사실들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고 어떤 식으로든 혁명적 공세의 기초를 구성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선전에서는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구호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는 구호를 함께 외쳐야 한다.
더 일반적으로, 무엇이 유효한지(국제주의 원칙의 방어)와 더는 유효하지 않은지(전술적 구호)를 강조함으로써 과거 전쟁에 직면했을 때 혁명가들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은 코뮤니스트좌파 그룹의 책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는 슬로건이 앞으로는 현실적 관점을 구성할 수 없다면, 다른 한편으로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채택된 수정안, 특히 사상의 타당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혁명가들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온 힘을 다해 사용하여 가장 깊은 대중 계층을 선동하고 자본주의 지배의 몰락을 촉진할 의무가 있다". 이 구호는 현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취약한 상황을 고려할 때 분명히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계급에 대한 코뮤니스트 개입의 신호탄으로 남아 있다.
2022년 5월
「국제평론」 168호, 2022년 여름호
국제코뮤니스트 흐름(ICC)
옮긴이 ㅣ 이명수
<출처>
https://en.internationalism.org/content/17237/militarism-and-decomposition-may-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