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에 운동 삼아 온수리 주변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 중 장촌마을을 제일 많이 와본 것 같다.
그것은 이 동네에 아주 예쁜 쌍둥이 자매가 있는데, 그 애들을 매일 데려다 주러 왔기 때문이었다.
방학이면 나는 더 바쁘다.
학기 중에는 정해진 일과에 맞춰 움직이던 아이들도 방학이 되면 들쑥날쑥 일정이 바뀔 때가 많다.
더구나 직장에 다니는 엄마를 둔 아이들은 집에 돌아갈 때 엄마 퇴근 시간이랑 맞지 않아서 내가 태워다 줘야 할 때도 있다.
학원은 학과 공부를 보충하기 위해서도 다니고 또 예체능의 기량을 돋구기 위해서도 다닌다.
그리고 또 하나 부수적인 이유도 있다.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먼 아이들은 방과 후 엄마가 아이를 데리러 오지만
장사를 하거나 직장에 다니는 엄마들의 경우 데리러 올 수가 없다.
그런 엄마들은 학원을 이용하기도 한다.
태권도 학원과 피아노 학원, 또 영어와 수학 보습학원에서는 차량을 운행하는데
많은 수의 아이들이 교습을 받은 후 학원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간다.
나는 따로 차량을 운행하지는 않지만 방학에는 퇴근을 할 때 아이들을 태워다 줄 때도 있다.
장촌마을의 쌍둥이 자매는 피아노도 태권도도 다니지 않기 때문에 내가 데려다줘야 한다.
쌍둥이 엄마의 퇴근 시간이 늦기 때문에 내가 대신 데려다 주었다.
온수리에서 장촌마을까지는 어른 걸음으로 약 이십여 분 걸린다.
아이들 걸음으로는 삼십 분도 더 걸리겠지만 어른의 걸음으로는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아이들을 차로 태워다 주다가 어느 날 일부러 혼자서 걸어가봤다.
내 걸음으로는 얼마나 걸릴 까 하며 시간을 재어봤더니 이십오 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차로 다닐 것 없이 걸어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면 나는 자동으로 약 한 시간 가까이 걷게 되는 셈이니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아닌가.
장촌 마을의 쌍둥이는 정말 귀엽다.
재잘재잘 말이 많지만 그 말들이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 아이들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 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어휘는 또 얼마나 다양한 지 그 아이들의 언어 구사력에 놀라곤 한다.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길을 나선다.
쌍둥이도 걸어서 다닌 적은 별로 없었는 지 신기해 하며 걷는다.
조잘대며 온갖 이야기들을 다 한다.
그렇게 지난 겨울 장촌 마을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장촌 마을 입구에 참나무 두 그루가 서있다.
두 그루라고 했지만 어찌 보면 또 한 그루 같기도 하다.
그것은 두 나무가 한 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어린 소나무 한 그루가 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서서 뿌리를 내렸다.
도대체 이 자리에는 뭐가 있길래 이렇게 세 그루씩이나 터를 잡았을까.
소나무가 더 자라면 이 곳은 명소가 될 지도 모르겠다.
세 그루의 나무가 한 몸이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몇 십 년 후의 이 마을을 그려본다.
세 그루가 한 몸이 되어 이 동네를 빛내주고 있을 것이다.
그때 지금의 우리는 이 땅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 사진들은 남아서 이 동네와 나무들을 되새김질 해주리라.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을 때 강화에서도 그 기운이 타올랐다.
그 당시 강화 인구가 얼마나 됐을까.
그런데 근 천 명에 가까운 이들이 운집을 해서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고 하니 그 기세가 가히 장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곳 장촌마을에서도 여러 분의 애국지사가 나왔다.
엄혹한 그 시대에 온 몸을 던져 독립만세를 불렀던 그 분들의 기개를 떠올려 본다.
비록 살아서는 고초를 당하고 힘든 한 생을 사셨겠지만
그러나 삶이 살아서의 삶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 분들은 보여준다.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 삼일독립만세비를 보면서 배운다.
이 비를 보면서 내가 아는 불은면의 그 분을 떠올려 본다.
자유가 말살된 감옥에 갇혀서도 민주화의 불길을 지폈던 그 분이 생각이 난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데,
그렇다면 그 분 역시 언젠가는 이렇게 애국지사로 추앙이 받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장촌 마을에서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선인들의 기개와 충정을 되새겨 보았다.
장촌마을을 나와 화도면 상방리로 갔다.
화도초등학교 앞에는 이렇게 비석을 모아놓은 곳이 있는데 이 곳에 독립유공자의 비석도 있다.
김해가 본관인 남편은 같은 성씨인 이 분의 행적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혼자서 자료를 찾으며 공부를 하는 눈치였다.
우리 시조부님도 독립만세운동을 이끌다가 고초를 당했다고 한다.
당시 혈기방장했던 시조부님은 마을의 젊은이들을 위해 야학도 운영을 했는데
1919년 삼일 만세운동의 불길이 경상도의 의성 땅에도 번졌을 때 분연히 일어서서 앞장을 서셨다고 한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으니 일제 순사들은 기겁을 했으리라.
오랏줄에 묶여 주재소로 끌려가서 며칠간 고생을 하셨는데
아뿔싸, 집안의 어른들이 돈을 써서 장손인 조부님을 구출해 냈지 뭔가.
집안을 위해서 그리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보니 하나도 가문을 위한 일이 아니었으니
시조부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그게 잘한 일인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서 보니 오히려 잘못한 일이 되고 말았던 셈이다.
오직 기록에 의해서만 독립유공자로 추대를 받는데 시조부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유공자로 추대를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아버님은 내내 이것을 애석해 하셨다.
독립유공자로 추대가 되면 그것은 일신의 광영일 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기도 한데
그것을 놓쳤으니 얼마나 아까울 것인가.
이 분들도 이름을 남기기 위해 만세운동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뜻을 세워 분연히 몸을 떨치고 일어났던 그 기개가 이렇게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단초가 되었다.
지금 당장을 바라보며 살면 내 한 몸과 가족의 안위는 보장이 된다.
그러나 멀리 내다보고 살자면 지금의 안위는 놓칠 수도 있으리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이 즈음에 정부의 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이들을 보면서 새삼 생각해 본다.
지금의 광영이 영원토록 영광스러울 것인가.
그 분들이 역사 속에 아름답게 이름을 남길 수 있기를 빌어본다.
이제 겨울은 가고 봄이 오고 있다.
겨우내 얼어있던 우리 집 안마당의 얼음덩이들도 어느결에 다 녹았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어려운 한 시절을 견디고 이겨내면 좋은 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란시스 알렉산더의 시 <모든 것은 지나간다>를 읊조려 본다.
일출의 장엄함이 / 아침 내내 계속되진 않으며
비가 영원히 내리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일몰의 아름다움이 / 한밤중까지 이어지지도 않는다
-중략-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라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린다
밖에는 봄기운이 번져나가고 있다.
자, 이제 다시 출발이다.
첫댓글 의미있는 장소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독립운동한 후손은 3대 걸쳐 고통받고 있고,친일파 후손들은 일제치하는 물론 지금까지 호의호식하고 있는게 현실입니다.애국지사뿐만 아니라, 강화도의 농민들도 지금것 척박한 환경속에 어렵게 살아왔습니다.그런데,몇몇 사람들이 강화도 농민과 지역민들을 무식하고, 배타적인 사람들로 매도하고 있습니다.돈이 없어서 배울수 없었고, 돈벌이가 없어 가난했고, 강인한척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했구요.강화도민에 대해 이해와 애정어린 시선이 필요합니다.
제가 강화에 이사를 와서 느낀 게 여럿 있는데 뭐냐 하면요...
강화는 교육열이 높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울과 가까워서이기도 하겠지만 인삼 농사 덕분에 가정 경제가 좋아서이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인근의 서울, 인천 등지로 자녀들을 보내 공부를 시켰더군요.
그 다음에 하나는 여인들이 억척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멋을 아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이었어요.
꽃밭이 없는 집이 없고, 밭의 한 귀퉁이에도 꽃을 키우고 있었어요.
그런 점이 참 좋게 보였어요.
이 글에 대해선 제가 할말이 많은데....
여하간.
아~~, 강화의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그것이 궁금합니다.
지금 글로 만들고 있는 중이거든요.
눈코뜰새없이 바빠 길도 못걷다가
오랫만에 들어와보니 미감님의 글이 올라와 있네요,,
길과함께 알아가는 강화의 속살같은 이야기
앞으로도 더 많이 들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