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모나이트
전건호
천둥 번개에 유리창이 덜컹거린다
수석(壽石)에 갇혀 있던
짐승이 걸어 나오자
무늬석 폭포는 물보라를 쏟았다
암전된 어둠의 지층 속
머리를 무릎에 포갠
등 굽은 화석의 눈꺼풀이 떨린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귀 기울이자
티비 속 방영되는 영화가
꿈속의 몽유와 합체된다
사라진 나를 찾아 나선 바람의 탄식이
수면 일렁이는 파랑과 만나 전생을 비춘다
화석들을 향해 주파수를 맞춘
현란한 물살의 변주곡은
검은 돌에 국화꽃을 피운다
화석 속 다족류들이
몸 부딪치며 비탄하는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뜨면
수석 속으로 황급히 사라지는 짐승의 꼬리
갈림길 손 놓치고
허우적거리던 손바닥 땀 흥건하다
번개 치는 밤이면
돌에서 나온
하얀 그림자 어깨를 흔든다
그림자 박물관
청동거울 속
한 줄기 빛이 스쳤다
맥노트혜성이 빗금을 긋는 미리내
푸른 빛 감도는 작은 혹성에
한 사내가 불시착해 떤다
안갯속 삼지창이
유리창을 관통해 가슴을 겨눈다
긴장한 실핏줄에
녹슨 칼이 파랗게 떤다
퇴적된 시간의 단층이
떨림의 파동을 삼켰지만
진동은 먼지 낀 거울에 반사된다
파랑에 출렁이는 검은 강변
스산한 바람에
금낭화 모른 채 고개 돌린다
날 겨누던 넌 어느 별로 떠나버렸는가
칸나꽃 날 세우는 밤마다
근원도 모를 흉통에 신음하다
박물관 청동거울 속
찰나의 벼락에 혼이 빠진다
미동도 않는 녹슨 창
손잡이에 감겼던 지문에서
풀려나온 바람이
파르르 떠는 몸을 관통한다
일억 년 더 기다리기로 한다
오로라역의 별리
백야를 달리던 기차가
잠에 취한 자작나무숲을 관통한다
아라한의 호각소리에 오로라역에서 급정거를 하자
다끼니들 올라 표를 나누어 준다
극과 극으로 멀어지는 행선지
바빌론 로마 신라로 이별하는 기차는 눈물의 바다
살 부비던 당신과 나는
시공이 엇갈리는 열차로 각각 갈아타야 한다
역을 감싸 도는 검푸른 강물 위로
안갯속 사라지는 팔만 개의 철교
플랫폼은 타임머신들의 시동에 놀란
별들이 뿌리는 유성우에 젖는다
낙랑에서 온 당신과 무색계에서 불시착한 나도 이젠 이별이다
지구별의 유배가 풀려 떠나온 별로 돌아가는 길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금생과 내생의 경계를 따라 빛의 강물을 범람시킨다
낯선 지구별 불시착해 뭇별만 헤아리다
막상 아스라한 시공으로 회귀하려는데 잡은 손 놓을 수 없다
승객들 하나 둘 빛 속으로 멀어지고
이젠 우리도 손을 놓아야할 시간
범람하는 빛의 중심부
자작나무들 어깨 들썩이며 머리를 푼다
떠돌이별
유성에 흘러들어
금성장 화성장 수성장
인공위성이 되어 착륙지점을 찾는다
어지러운 공전궤도를 떠돌다
십이지장 같은 골목 끝에서
하루의 마침표를 찍고
혜성장에 등을 붙인다
숨 넘어 가는 별들의 교성
달력 속 여자가 몸을 비튼다
그녀 품에 안겨 꿈속을 헤매다
벽지에 만발한 도화 속으로 흘러간다
질펀한 춘화 속으로
뭇 발자국들 비틀비틀 걸어 들어와 코를 곤다
거친 숨소리에 몸 뒤척이다보면
실눈 뜬 여인 손을 내밀고
길 잃은 꽃잎에 파묻혀 몽정을 한다
빛바랜 벽지에 잠들었던 낙서들
다족류의 지네가 되어
스멀스멀 허벅지에 기어오르는데 놀라
화들짝 눈을 뜬다
흐릿한 창문엔
미풍을 타고 수시로 흩어졌다 모이는 꽃별들
처녀좌의 치마를 들추다
화르르 낙화하는 유성이 된다
말(言)
세치 혀가 포자를 뿌린다
허공에 떠오른 먼지는 불멸불사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바이러스
미이라 어금니에 박혀 때를 기다린다
백억 광년 날아온 화살이
겨자씨를 명중시키면
잠들었던 씨앗 부화해 가시를 세운다
투견처럼 기싸움 하다
볼화장하고 수줍게 몸을 꼰다
실눈 뜨고 침묵을 바라보면
날카로운 부리들 팽팽하게 대치한다
불현듯 급소에 카운터 펀치를 먹이다
한순간 몸을 섞는다
먼지 묻은 책속에서
실눈 뜬 제갈량이 뒤통수를 친다
말씀 한마디 기어나와
치명적인 주문을 건다
목동좌의 휘파람과
황소좌의 울음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황도
숨죽인 별들의 독백에
꽃들은 일제히 환하게 핀다
전건호
충북 영동 출생. 2006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시집 『변압기』.
―『시에』2010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