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설맥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
(개혁하면 복을 받는다)
열왕기하 18:1-8
비텐베르크 95개조
20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지 5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대학 교회 문에 공개 토론을 제안하는 글과 함께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반박문의 제목은 ‘면죄부들 효력의 포고에 대한 토론’이었습니다. 루터의 반박문은 성명서보다는 토론을 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당시 면죄부 판매를 주도했던 알브레히트와 테첼에게 토론을 제의했습니다. 루터가 제시한 95개조는 독일어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라틴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은 토론에 목적을 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독일의 문맹률은 90%였고, 그 중에 라틴어를 아는 사람은 0.4%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1503년 율리오 2세가 교황이 되었습니다. 율리오 2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대성당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꿈을 가지고 1506년 로마에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대성당 건축은 대공사였기 때문에 율리오 2세는 건축 중인 1513년에 죽었습니다. 뒤를 이어 레오 10세가 교황이 되었습니다. 레오 10세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를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고심 끝에 그는 건축비 충당을 위해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를 증명하는 증서를 판매했습니다.
당시 프레드릭 3세 선제후는 1502년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비텐베르크에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선제후란 선거후(選擧侯)로 번역되기도 하며, 세습 군주국이 아니라 선출 군주국이었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7명으로 구성된 최고위직 제후들을 말합니다. 프레드릭 3세는 루터를 대학교수로 청빙했습니다.
루터의 고민
마르틴 루터는 신부였고 수도사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 시절부터 인간 구원의 문제에 관해서 깊이 고민했습니다. 이 문제로 금식과 고행도 하였습니다. 루터는 인간의 선행과 공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고민한 결과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원죄 가운데서 태어났음으로 인간의 선행까지 죄성으로 오염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고민하다 성경말씀 한 구절이 하늘의 계시처럼 들려왔습니다. 로마서 1:17절이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였습니다. 이 말씀으로 루터는 지금까지 추구하던 구원에 대한 답을 얻었습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믿음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카톨릭 교회가 가르침과 달랐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교황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인간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믿었습니다.
면죄부
면죄부는 11세기부터 등장하지만 처음부터 죄를 면죄해 주는 증서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의 면죄부는 교회가 내린 형벌을 사면해 주는 면벌부였습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중세 카톨릭의 속죄 절차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는 여섯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성찰, 통회, 정개(定改), 고백, 사죄(赦罪), 보속(補贖)입니다. 죄를 진 사람은 먼저 성찰을 통해 지은 죄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통회합니다. 정개란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사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죄 사함의 보속,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여기에는 기도, 금식, 구제, 순례, 건축 기부 등을 함으로 죄에 대한 형벌을 치룹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자는 교회 안으로 다시 옵니다.
연옥과 면죄부
또 로마 카톨릭에는 연옥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영세를 받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지만 죄 짐을 벗겨주는 선행이나 고행이 충분하지 않는 사람은 연옥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최선을 다해 선행을 하거나 많은 헌금을 한다면 연옥을 피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연옥에 대한 두려움을 교인들에게 불어넣었습니다. 당시 교회 재정난이 심했기 때문에 죽은 조상의 면죄부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고 악한 일을 해서 지옥에 가있던 조상이라고 할지라도 자손이 면죄부를 사는 순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다는 주장입니다. 천국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였습니다.
테첼 같은 면죄부 부흥사들은 “면죄부 상자에 돈이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그곳으로부터 뛰어 나온다”고 선전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성당 건축을 위해 지금껏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는 ‘완전 사면 면죄부’를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루터의 95개조 요약
마르틴 루터가 반박한 95개조의 중요한 내용만 소개합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서 강조한 핵심은 회개입니다. 1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회개가 삶 전체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뜻이고, 2조는 “회개하라는 말씀을 사제에 의한 고해성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5∼7조는 죄에 대한 교황의 권한이 없음을 지적합니다. 루터는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했습니다. 8∼29조는 교황이 사죄할 수 있는 범위는 연옥에 있는 죽은 자들에게 미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루터는 처음부터 연옥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면죄부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성경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루터는 1530년에 연옥 교리 자체를 부정합니다. 30∼55조는 진정한 뉘우침이 있다면 면죄부 없이도 죄는 완전히 사면을 받을 것이고,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행동이라며 이웃을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합니다.
56∼68조는 가톨릭교회의 ‘보물 이론’을 비판합니다. 당시 가톨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성인들이 쌓아올린 공적을 교회의 보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잉여공여설이 있습니다. 이 말은 성인들이 쌓아올린 공적이 남았기 때문에 그 성인을 숭배하면 그 남은 공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루터는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의 보물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69∼80조는 면죄부 설교의 부작용을 지적합니다. 교황의 면죄부는 인간이 지은 작은 죄조차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81∼91조에서는 면죄부에 대한 평신도들의 비판적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전적 회개를 통해 구속 받은 이들에게 교황은 무엇을 또 용서한다는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92∼95조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을 통해 참된 평화를 누린다고 합니다.
히스기야의 개혁
본문은 히스기야의 개혁에 대한 말씀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13번째 왕입니다. 25세의 왕이 되어 29년을 통치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은 엘라의 아들 호세아였고 왕이 된지 3년이 되었습니다. 호세아 9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로에 멸망합니다. 멸망 6년 전입니다.
국내외의 정세가 안 좋은 상황에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왕이 된 히스기야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4절에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고 일컬었더라”고 합니다.
아버지 아하스는 악한 왕 중의 하나였습니다. 아하스는 20세에 왕이 되어 16년간 다렸습니다. 아하스는 우상 앞에 인신제사를 드렸고, 산당들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심지어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우상 제단을 보고 그것을 성전에 우상 제단을 만들었던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런 왕 밑에 선한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놋 뱀
히스기야의 개혁 대상은 아버지 아하스가 섬기던 산당 제거, 주상 제거, 아세라 목상 제거를 했고, 심지어 모세가 만들었던 놋 뱀까지 제거했습니다. 다른 우상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라 마땅히 제거 대상들이지만 모세가 만든 놋 뱀까지 제거한 것은 히스기야가 처음입니다.
앞선 왕들 중에 개혁을 실행한 선한 왕들은 아사, 여호사밧, 요시아 등이 있습니다. 이들도 여러 가지 개혁을 감행했지만 모세의 놋 뱀까지는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불 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놋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쳐다본자는 다 살아났습니다. 놋 뱀은 사람이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라고 해서 만든 것입니다. 이런 놋 뱀을 후세의 사람들은 신성시했고, 우상처럼 숭배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런 놋 뱀을 부스면서 느후스단이라고 말했습니다. 느후스단이라는 말하는 것은 단지 이것은 놋으로 만든 놋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냥 놋 뱀의 형상을 가진 구리조각이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금송아지 숭배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중심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습니다. 십계명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던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돌판을 내 던져 깨드렸습니다. 모세는 레위인을 시켜 우상숭배자들을 다 죽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갈아 먹도록 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개혁의 기본자세
히스기야의 개혁은 철저했습니다. 이런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까? 마음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개혁이 먼저입니다. 3절에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히스기야는 다윗의 길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성경은 선한 길을 다윗의 길로 표현하고, 악한 길을 아합의 길로 표현합니다. 다윗의 길은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의미합니다.
다윗의 길을 걷기 위한 삶의 기본자세는 무엇입니까? 정직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것이 개혁을 위한 삶의 기본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을 코람데오라고 말합니다. 코람데오의 삶은 정직입니다. 정직이란 영어로 upright, 또는 uprightness입니다. 이 말은 right가 up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정직은 의가 업그레이드한 것이요, 정직은 의의 최상급입니다.
정직은 항상 하나님 앞에 살 것을 결심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러간 다니엘은 세 친구와 함께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맞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겠느냐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전적 의지
개혁이란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의지하던 산당, 주상, 아세라 목상, 모세의 놋 뱀까지 제거하는 일은 한 순간의 결심만으로도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5-6절에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 의지한다는 것을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는데, 잘 안됩니까? 실패했습니까? 그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 마음의 개혁, 내 생활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내가 하나님과 연합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라는 선한 목표를 이루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참포도나무 비유에서 이 사실을 잘 가르쳐주셨습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으려면 나무와 연합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면 안 됩니다. 떠나는 않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개혁의 결과
끝으로 개혁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7-8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개혁을 지속시키자 형통해졌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해졌습니다. 형통이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곧 그 일은 하나님이 일이기 때문에 형통케 하십니다.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않아도 됩니다. 또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사방에 이르고 망대와 견고한 성까지 이르게 됩니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형통해졌습니다.
내 삶 가운데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보입니까? 개혁하라는 신호입니다. 개혁이란 무엇인가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처럼 다윗의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개혁하고자 하면 그 목표한 것을 다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더 풍성한 복을 내려주십니다. 어디로 가든지 무엇을 하던지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개혁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하면서 그가 말씀하신 성경대로 사는 길입니다. 개혁의 대상은 먼저 나부터입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