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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오판 / 사무엘하 18:19-30
독일의 실존철학자인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인간이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다 할지라도, 신은 죽지 않습니다. 신에 대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절대적인 분으로 살아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계신다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든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든지,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거짓된 것이 아니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말씀을 대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그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지극히 엉망이 되버린 모습만을 보여주게 된 것은, 인간이 찾아낸 상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곧 절대적으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적인 하나님으로부터 탈피하지를 못함으로써, 결국 진리를 말하되 진리에서 멀어진 교회로 전락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우린 어떤 신앙으로 서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평상시든 비상시든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역할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령이 전하는 그 정보의 내용을 통해서, 싸움의 승패가 달라질 수도 있고, 또 한 나라의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전령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가 획득한 정보를 목숨을 걸고 사수하겠다는 책임의식이며, 어떻게 하든지 그 정보를, 지휘관에게 꼭 전달되도록하겠다고 하는 성실성과, 자기가 얻은 정보를 사실 그대로 지휘관에게 보고하겠다는 정직성 또한 필요합니다. 이 중 어느 것 하나라도 결여되어있다고 하면, 그는 좋은 전령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싸움에서 이겼다는 승전보를 전하는 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는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고, 또 그 보고를 했을 때, 왕의 마음에 흡족한 생각이 들면, 상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애타게 기다리는 다윗의 아들의 죽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칫하면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그 일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압살롬을 죽인 후에,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9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이 내용을 보면, 후새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연락병의 역할을 하고 있던 아히마아스가, 전생에서 승리한 소식을 속히 전하기 위해 요압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히마아스의 청을 거절합니다. 20절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그 이유는 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 때문입니다. 곧 요압은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다윗이 너그러이 대우하라고 당부한 압살롬을 죽인 것으로 인해, 승리가 다윗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것임을 미리 짐작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구스 사람을 소식을 전할 전령으로 다윗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22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요압에게 청을 하고, 요압은 거듭 이 소식을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만류하지만, 아히마아스는 기어코 요압의 허락을 얻어 다윗에게 달려간 것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왜 이토록 승리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요압이 22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윗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함으로,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아히마아스를 만류한 것은, 압살롬이 죽었기에 승리의 소식이 다윗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하여,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서 승리의 소식으로 인한 기쁨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승리의 기쁨보다는 압살롬의 안부를 묻습니다.
29절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이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고, 다만 크게 소동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왜 압살롬의 죽음을 숨겼을까요?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이 죽었다는 나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곧 아히마아스는 자신에게 유리한 말은 앞서서 하고, 유리하지 않은 말은 감추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히마아스에게는 다윗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마음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승리의 소식을 전하여 다윗을 기쁘게 함으로, 상이라도 받아볼까 하는 생각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슬픔이 되고, 분노가 될,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은 자신의 입으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의 안위에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든, 다시 왕위를 찾게 되었든, 그것들은 기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히마아스의 생각과 사고는, 다윗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윗의 신하라고 하면서,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윗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를 갖고 있다면, 진정한 신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위 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속력에만 쏟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 남보다 빨리 가고, 남보다 먼저 성취하고, 한 치라도 남보다 먼저 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실을 잊지말라고 말합니다. 벧후 3: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이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시간의 길이보다, 그 내용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곧 한 시간에 대한 평가는, 그가 달려온 시간의 길이나 속도보다, 그 내용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어지는 중요한 달음질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결과에만 집착할 때, 사람이 어떤 불행을 겪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과정은 뛰어 넘고, 결과만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서, 인생을 달음질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장수 사람인 이규태씨가 쓴 책 가운데 ‘한국사람들이 버려야 할 것들’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물가에 가서 숭늉 찾는다’는 우리의 속담을 인용하면서, 한국사람들은 우물가에서 쌀을 씻는 중인데, 숭늉 달라고 요청하는 조급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숭늉을 만들려면, 일단 쌀을 씻어서 밥을 해야하고, 밥을 퍼내고 눌은 밥에 물을 부어 끓여야 숭늉이 되어지는데, 우물가에 가서 쌀을 씻는 사람 앞에서 무작정 숭늉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사람들의 빨리빨리 근성입니다. 세계사람들이 한국사람을 구별하는 방법은, 얼굴색, 생김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고, 걸음걸이가 빠르면, 한국사람일 가능성이 80%이상이라고 합니다. 외국사람들이 한국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놀라는 것은, 한국사람들이 왜 그렇게 분주하게 빨리 다니냐는 것을 묻는다고 합니다. 서양사람들은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즐기면서 삽니다. 그것을 process enjoy라고 합니다. 한국사람들은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과만 중요한 것입니다.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것입니다. 과정이 무시될 때 무질서가 나오고 무질서할 때 졸속이 나오고 졸속이 나올 때 부실이 나오고 부실이 나올 때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과정이 무시되면 결코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소년 소녀들에게 많은 모험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유명한 작가 ‘웨스’는, 인도의 민화를 이용해서 ‘무덤’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도의 어느 왕국에 아주 젊고 아름다운 왕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왕비는 결혼한지 1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왕은 너무 슬퍼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궁리 끝에 왕은 아주 정성들여 왕비의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왕은 무덤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때 왕의 눈에 비친 무덤은 너무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을 시켜, 왕 자신을 상징하는 미남자의 조각을 새겨, 무덤 동편에 세워 두었습니다. 아마도 자기는 비록 무덤가에 있지 못할지라도, 자기를 닮은 동상이라도 두어, 왕비의 영을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로부터 다시 1년 뒤에 무덤을 가 보았는데, 그곳은 여전히 쓸쓸히 보였습니다. 그래서 왕가를 상징하는 호랑이 상을 만들어 서편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후 1년 뒤에는, 무덤 앞에 재력을 상징하는 호화로운 집을 짓게 하였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다시 1년 뒤에는, 무덤 북편에 권력을 상징하는 훌륭한 성곽을 세웠습니다. 그후 몇 년이 지난 뒤에, 무덤이 있는 동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참으로 근사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동쪽엔 미남조각, 그 반대쪽엔 용맹스런 호랑이상, 거기다가 호화로운 궁전에 훌륭한 성곽까지, 잘 조화되어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흡족한 마음으로 좀 더 살펴볼 양으로 자세히 보니, 가운데 초라하게 서 있는 무덤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가운데 있는 무덤을 치워 버려라.”고 했답니다.
우리도 이런 과오를 범할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처음엔 감격스럽게도 하나님을 중심에 모셨는데, 점점 자기가 드러나고, 가문이 드러나고, 재물, 명예, 권력이 드러나며, 그로 말미암아 결국엔 하나님은 점점 사라지고, 끝내 하나님이 귀찮은 존재가 되어 “집어치워 버리자”는 생각을 갖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잊어버린 성도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드리던 예배, 사랑으로 시작한 봉사, 사랑으로 시작한 섬김, 사랑으로 시작한 수많은 사업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차가워집니다. 나중에는 주님을 향해 미지근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시간이 지나면 저렇다 말거야. 다 한 때야, 한 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정상인데, 미지근한 것이 정상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시작했던 모든 일들에서,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주님은 빠지고, 내 생각과 욕심과 계획에 따라 살아갑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와 봉사와 섬김이 형식이 되고, 의무가 되고, 짐이 되고, 율법이 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향한 예배인데, 주님을 위한 섬김인데, 주님께 드리는 헌신인데, 왜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이 되지 않고, 의무가 되어버립니까? 왜 주님께 드리는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가지고 갈등합니까? 왜 주님과 세상을 사이에 두고, 저울질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주님의 일에 부지런했습니다. 그 사랑으로 수많은 고난과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고, 그 사랑이 말씀 위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많은 교회들을 미혹하고 더럽게 했던 이단들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사랑이 식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처음 사랑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하십니다. 계 2: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부족하고 허물이 많아도 우리 주님은 용납해 주십니다. 실수하고 넘어져도 주님께서는 이해하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칭찬하고 인정하는 바쁜 사역을 하고 있어도, 나름대로 성공해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할지라도, 그 중심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면,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식으면, 모든 신앙생활은 의무가 되고 억지로 함이 됩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가, 우리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구스사람은 비록 발걸음은 느렸으나 전령으로서 전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아히마아스는 지름길을 달릴 줄 아는, 약삭빠른 수단과 방법은 가지고 있었으나, 전령으로서 전해야 할 내용은 가지지 못한, 부끄러운 전령이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달음박질 하는 겉모습은 지니고 있지만, 인간으로서의 참 의미와 내용은 가지지 못한, 정말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보람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의 한 단면을 비추어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섬긴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사고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니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보겠다고 달음질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면, 예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교회 부흥이 예수님께 기쁨이 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예수님과는 단절된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대한 봉사가 예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사도들 또한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에 앞에 나오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시 40:3-7절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여기서 말한 새 노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경과 하나님을 해석하여 부르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기존의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가 무너지고, 새롭게 알게 된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변함이 없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자기 민족을 위한 신으로 해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고난 받으신 십자가를 보지 못하였음으로,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관심을 쏟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십자가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교회를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결국 아히마아스가 승리를 전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유익만 꾀하는 수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말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히마아스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면서도, 나의 유익을 꾀하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함으로써, 내게 돌아올 상에만 관심을 두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의 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악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앞에 나온 성도에게 새 노래는 무엇일까요? 새 노래는 우리 스스로 지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내가 명상을 하며, 성경을 읽다가 새로운 깨우침으로, 자진해서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가 아닙니다. 다윗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새 노래는, 나 스스로 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인 것입니다. 곧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사고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기존의 그 모든 것이 깨어져야, 비로소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인 것입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십자가에서 새롭게 해석할 때,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번제와 속죄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이 될 새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무엇이 예수님을 기쁘게 할 말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일생을 열심히 달리고 빨리 달렸어도, 그 달음질이 어떤 메시지를 갖지 못하면 불행한 것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렸어도 가야할 목적지가 분명하지 못하면, 그 또한 무의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헛되이 달음질하려느냐 하는 이 질문을, 다시금 우리의 생각 속에, 삶 속에 적용시켜보면서, 우리 인생의 달음질이 헛되고 무의미한 달음질이 되지 않기 위하여, 또한 우리의 목적지가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기억하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함에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우리의 인생을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아름답고 멋지게 달려감으로, 주 앞에 영광 돌리고 주님의 축복을 받아, 더 복된 삶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왜 헛되이 달음질하려느냐는 질문 앞에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저희는 어떠한 메시지도 갖지 못한 채 ,우리의 인생을 나 위주로, 내 욕심을 달성하려는 생각에서, 오로지 달려오고 달려왔음을 이 시간 고백합니다. 주님! 나 자신 이외에 어떤 다른 목적을 갖지 못했던 저희들의 얄팍한 믿음을 주께서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들의 최종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달음질이 주님이 원하시는 달음질이 되어질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결과에만 매달려서, 거기에 우리의 삶의 촛점을 맞추지 않게 하여 주시고, 삶의 과정 하나하나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성실하게, 더 진실하게,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