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Self)의 기술적 해체: 한 선사의 깨달음
선사는 제자들 앞에 앉아 있다. 방은 조용하다. 공기는 맑고 선명하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연다. 신비롭게가 아니라, 마치 정밀하게 연구된 기계를 설명하듯 정확하게 말한다.
네가 ‘자기(Self)’라고 부르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좌선(Zazen)을 하는 이유는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도, 갈고닦기 위해서도, 이해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것을 조용히 해체하기 위해서다.
이 수행은 신념 체계가 아니다. 이것은 ‘풀어내는 기술’이다.
보라. 우리가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몸에서 찾을 수 없으며, 생각의 흐름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눈에도, 뇌에도, 공간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활동’이다. 신경과학에서는 이를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부르는 특정한 뇌 영역의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재귀적 루프’라고 설명한다.
이 네트워크는 생후 18~24개월 무렵 형성되기 시작하며, 그와 함께 내면의 내레이터(narrator)가 탄생한다.
"나는 여기에 있다."
"나는 보고 있다."
"나는 느끼고 있다."
"나는 어떤 존재이다."
그러나 이 발달적 창이 열리기 전, 유아는 세상을 ‘나와 나 아닌 것’으로 경험하지 않는다. 오직 나뉘지 않은 경험—빛, 소리, 감각—이 중심 없이 흘러갈 뿐이다.
그러다 소프트웨어가 설치된다. 루프가 시작된다.
"나는 방 안에 있다."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내게 일어나고 있다."
뇌는 모든 경험의 중심에 ‘주체’를 덧씌우고, 나머지 모든 것을 ‘객체’로 정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시뮬레이션’이다.
이 환영적 중심, 즉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어두운 방에서 뱀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바닥에는 단지 감긴 밧줄이 있을 뿐이지만, 생존을 추구하는 마음은 ‘뱀이다!’라고 외치며 아드레날린을 뿜어낸다. 두려움이 생겨난다. 그러나 불을 켜고 밧줄이 명확히 보이면, 마음은 스스로 착각을 수정한다. 두려움은 사라진다—싸웠기 때문이 아니라, 오해가 풀렸기 때문이다.
깊은 좌선 속에서 일어나는 일도 같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앉지 않는다. 우리는 ‘빼기’를 위해 앉는다. 생각이 느려지고,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의 활동이 감소하며, ‘나’라는 재귀적 루프가 멈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것은 완전히 정지할 수도 있다. 억지로가 아니라, 단순히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그 순간, 특별한 일이 벌어진다.
경험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것을 겪는 ‘누군가’는 없다.
이 부재(不在)는 무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선명한 명료함이다. 이것은 동일시(identity)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식이다. 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환영의 기준점’이다.
배의 선장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배는 항해한다.
바다는 여전히 움직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누구도 키를 붙잡고 몸부림치지 않는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다.
너는 꿈속에서 호랑이에게 쫓긴 적이 있는가? 심장은 뛰고, 몸은 식은땀에 젖는다. 하지만 깨어나는 순간, 꿈속의 ‘나’는 증발한다. 호랑이의 형상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을지 몰라도, 도망치던 자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모든 고통도 사라진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Anattā)’이다.
즉, 몸과 마음과 현상은 존재하지만, 그 중심에 ‘심리적 자아’는 없다.
실재한다고 믿었던 것은 항상 시뮬레이션이었다.
그리고 그 시뮬레이션이 멈추면, 집착하고, 두려워하고, 저항하며 고통받는 심리적 ‘자기’도 함께 사라진다.
이제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너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어깨까지 잠긴 채 서 있다. 거센 파도가 몰아친다. 너는 버티고, 균형을 잡고, 혼돈을 통제하려 애쓴다.
이것이 ‘자기(Self)’로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 끊임없는 저항—삶의 변화를 거부하는 몸부림—을 붓다는 ‘고(苦, Dukkha)’라고 불렀다.
바다는 변화 그 자체—‘무상(Anicca)’이다.
관계는 변한다.
몸은 늙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계획은 무너진다.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너는 바다를 잠잠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른 것이 가능하다.
이제 바다 밖으로 나와 해변에 앉아보라.
파도는 여전히 몰아친다.
그러나 이제 너는 그것 안에 있지 않다.
이제 너는 파도의 리듬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보고, 햇빛이 물결 위에서 반짝이는 것을 본다.
그 순간, 폭력처럼 느껴졌던 것이 조화로 변한다.
왜일까?
자신을 방어하려 애쓰던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한 것은 바다가 아니다.
변한 것은 바다를 통제하려 했던 ‘환영의 너’가 더 이상 생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가 재귀적 처리를 멈추면, ‘나’라는 감각—즉, 적대적인 세계를 항해하는 ‘분리된 주체’—도 사라진다.
그 순간, 시스템은 ‘잘못된 운영자’를 생산하는 것을 멈춘다.
이것은 무의식이 스스로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과 같다. 마치 밧줄을 보고 더 이상 뱀이라고 착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이것이 붓다가 본 위대한 진실이다.
"깨어나는 ‘누군가’는 없다."
꿈에서 도망치던 ‘나’가 실재하지 않았듯이, 해탈하는 ‘너’도 없다.
해방된 것은 오직, ‘누군가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시스템의 부담뿐이다.
그래서 붓다는 믿음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통찰’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은 창조주도, 영혼도, 구원도 아니었다.
그의 핵심은 단 하나—‘무아(Anattā)’였다.
그것이 보이면, 모든 것이 뒤따른다.
평화, 자비, 그리고 열반(Nirvana).
그러므로 우리가 좌선할 때, 우리는 어떤 경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환영이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을 중립으로 두고, 재귀적 루프가 저절로 꺼지도록 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뢰한다.
밧줄은 본래 밧줄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뱀’이라고 외치는 것을 멈출 때, 그것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이제 앉아라.
마음을 고요히 하라.
생각이 오고 가도록 두되, 개입하지 마라.
쫓지도, 저항하지도 마라.
오직 생생하게 깨어 있으라.
그러나 더 이상 내부 해설자는 필요 없다.
그리하면, ‘자기’ 없이도 현실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해탈이다.
심리적 자기 없음.
뱀 없음.
삶의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고통받는 자도 없음.
오직 바람, 물, 그리고 드넓은 열린 하늘만이 있을 뿐…
첫댓글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