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청소년·군포교에 진력 … 전북불교 활성화 토대 마련
포교가 내 삶이면 ‘나의 불교는 무언가’ 고뇌하며 원력 세워
“도량은 차별없는 마음의 쉼터 …산문에 들면 우리 모두는 도반”
“승려들이여! 세상을 향한 연민을 갖고 살아있는 것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라. 법을 가르쳐라, 순수하며 고귀한 삶을 살아갈 것을 공표하여라.”
율장에 담긴 부처님 말씀이다. 전도를 위해 떠나는 승려를 향해 당부한 또 한 구절이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라.” 자각한 사람만이, 부처님 뜻을 올곧게 새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당찬 기백과 전도의 길을 홀로 떠나야 하는 고독이 함께 서려 있는 듯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포교의 길만을 묵묵히 걸어 온 도영 스님을 만나기 위해 완주 송광사를 찾았다. 스님은 1961년 전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해인사와 통도사 선원에서 5안거를 성만한 후 스님은 지금까지 어린이·청소년과 군포교는 물론 전북지역의 포교활성화 토대를 다지기도 했다. 금산사 주지 시절 “포교에 나서지 않는 말사 주지는 주지직을 내 놓으라” 호령했던 것으로도 유명한 스님은 조계종 제11회 포교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완주 송광사는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 보조국사 체징에 의해 개창됐다. 이후 폐사됐지만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이 절 역시 복원 중창하라는 당부를 했는데,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에 제자들의 원력으로 중창됐다. 중후한 역사와 함께 사천왕상, 극락전, 나한전 등의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완주 송광사는 중창 당시의 규모와 비해서는 작아졌지만 지금도 대찰이다.
그러나 송광사 경내를 돌아보다 보면 웅장함 보다는 아담함이 느껴진다. 스님은 이곳에 주석하자마자 가람을 새롭게 배치하며 나무와 꽃은 물론 쉼터도 만드는 등 조경에도 심열을 기울였다. 그래서일까! 절이라기보다 작은 공원이란 느낌이다. 전각의 투박함과 조경의 청량함이 빚어 낸 결과다.
관음전 한 쪽 벽에 책들이 가득한데, 불서는 물론 인문과학 서적도 즐비하다. 언젠가, 본지가 사찰에도 작은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캠페인을 펼친 적이 있는데 스님도 동감한 듯하다. 대웅전 옆에 작지만 멋진 세심정(洗心亭)이 있다. ‘마음을 씻는 쉼터’라 읊조려 보며 잠시 앉아 위를 올려다보니 순박한 동자 그림과 함께 목판에 새겨진 법구경 글귀가 보였다.
“어리석은 자가 자신이 어리석은 줄 알면 그만큼 그는 슬기로운 것. 어리석으면서도 자신이 슬기로운 줄 알면 그는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7~8개의 이러한 목판은 세심정 밖이 아닌 안쪽에서 올려다보아야만 접할 수 있다. 그 누구든 이 자리에 앉아 잠시나마 자신을 돌아보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쉼터에도 스며있는 듯하다. 길가 옆 화초와 나무 한 그루, 쉼터 하나하나에 들인 정성! 단순한 불사 원력을 넘어 선 또 다른 마음이 자리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천양희 시인은 시집 『독신녀에게』서(저자의 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라는 글자도 말씀 언(言) 변에 절 사(寺) 자가 합쳐서 된 것이 아닌가. 말씀의 절, 말 속에 절이 있다니! 말이 마음의 다른 표현이라면, 마음속에 절을 가지듯 구도하는 자세로 시를 써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혹, 절도 가꾸어 가는 사람의 마음 표현이 아닐까? ‘아담한 송광사’를 지향한 스님의 의중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동네 속의 절을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동네 속의 절이라!
“종교나 국적,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든 찾아와 자신의 마음을 단 한 번 들여다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잠시라도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미워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탐욕스러운 마음 무소유 마음으로 바꿔진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그래서일까? 스님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이전까지 있었던 관람료 매표소를 철거했다. 관음전에 책을 비치하고, 경내 곳곳에 쉼터를 만들고, 나아가 경구도 새겨놓은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신자이면 어떻습니까? 그저 쉼터에서 종남산 바람 한 점 가슴에 담을 수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혼자 와 쓸쓸한 사람, 책 한 권 빼다 몇 장이라도 읽고 가면 지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연인들이 두 손 잡고 산책하며 그 사랑 더 돈돈해진다면 그 역시 반가운 일이지요.”
이것이 포교의 첫 걸음이 아닐까? 당장 불교로 귀의하지 않는다 해도 산사에서 자신을 한 번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이미 부처님 말씀이 전해진 것이리라. 귀의 여부는 인연 따라 지어질 것이니 말이다. 도영 스님은 ‘마음’을 통해 나를 버려야 함을 강조했다.
“집착하면 즉 하늘과 땅이 분명하지만 놓아버리니 티끌 하나까지도 나 아닌바가 없다(執卽分明 天地也 放乃塵刹 無非我). 잡고 놓고 가고 옴에 간섭함이 없으니 바람결에 구름 마냥 자재로운데, 햇빛은 빛나도다(執放去來 無干涉 風雲自在 日光華). 멋진 선시입니다. 방하착 하라는 사자후이지요. 티끌까지도 나 아닌바가 없으니 이 세상 용서하지 못할 것도, 나누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 자아에 대한 고집 그 하나 때문에 나와 남을 대립적으로 생각함으로써 악업을 지어가게 된다는 점도 역설했다.
“선을 행하면 즐겁지만 악을 행하면 괴로운 법이라 하지 않습니까? 즐거운 그 자리가 극락이고 괴로운 그 자리가 지옥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극락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이지요. 중국의 방 거사는 이 세상을 공하게 보고 살라 했습니다. 보이고 들리는 성색의 경계에 집착하면 실상을 보는 지혜의 눈은 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마음 자리를 보고 나를 버려야 무상을 보고 공을 볼 수 있습니다.” 도영 스님은 바로 이 송광사를 통해 ‘나를 놓아버리라’는 무아무상의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스님의 이러한 원력이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은 아니다.
출가할 당시만 해도 스님은 여느 선사처럼 은산철벽을 뚫어 일대사 인연을 마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해인사와 통도사 선방에서 5안거를 성만할 때만 해도 스님의 마음은 확고했다. 그러나 이내 금산사 총무국장과 김제 흥복사 주지를 시작으로 1980년 금산사 주지를 맡아야만 했다. 사중이 스님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던 것이다. 스님은 1980년 1984년, 1994년 세 번에 걸쳐 금산사 주지직을 맡았는데, 세 번째 다시 금산사를 맡으며 새로운 마음을 다졌다고 한다.
“애초부터 포교에 관심을 갖고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포교에 대한 확고한 내 철학은 미비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금산사 주지를 맡으면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포교가 나의 삶이라면 나의 불교는 어떤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더 살피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추해 보니 그 답이 나왔다. 보살도를 실천해 가며, 포교에 더 매진해 가자는 대 원력을 세운 것이다. 다시 한 번 새롭게 거듭난 스님의 포교 원력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급기야 2001년 조계종 포교원장을 맡으며 소신 있는 포교정책도 펴 나갔다. 역대 포교원장 중 5년 임기를 다 채운 스님이 도영 스님 한 분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스님의 포교역량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포교원장 직에서 떠난 직후 백담사로 향해 3개월 머물며 무문관에서 정진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거창하게 깨달음을 찾아 들어 앉은 게 아닙니다. 포교하면서도 내 수행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요. 백담사 회주 오현 스님의 도움도 있었기에 석 달 동안 잘 살았습니다.”
어쩌면 도영 스님은 백담사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포교는 가만히 앉아서 되는 불사가 아니지 않는가. 일선 사찰과의 교감을 도모해야 했고, 자치단체와의 연계도 구축해야 했으며, 수많은 군부대와 어린이·청소년 단체도 찾아야 했던 스님이다. 포교원장직 까지 내려놓고서야 선가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회광반조를 해 보았을 터이다. 남은 생에도 포교에 진력할 것이라는 스님은 지금도 송광사를 찾는 불자를 위해 법문하는데 여념이 없다.
도영 스님은 송광사를 모든 사람과 함께 가꿔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세심정에 걸려 있는 글귀처럼 마음 맑혀 주는 글, 지혜를 전하는 글을 경내 곳곳에 배치하고자 한다. 송광사 홈페이지를 통해 전 대중을 대상으로 한 공모를 통해 선택된 사람의 이름과 함께 글귀를 목판에 새겨 넣을 예정이다.
‘동네 속의 절’이란 의미가 다가왔다. 소통과 상생, 그리고 출세간이 둘이 아님이 담겨있는 일구다. 아담한 송광사를 통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가며 스님이 간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 마음은 청정심이기도 하며, 무아심이기도 하며, 방하착 하는 마음 한자락이기도 하다.
혹여, 최근 가슴에 담아두고 있거나 불자들에게 자주 전하는 선시가 있는지 궁금했다. 스님은 경봉 스님의 선시를 전했다.
서로서로 만날 때 향기를 얻고(物物逢時各得香)
온화한 바람 속에 봄볕도 따사롭네(和風到處盡春陽).
인생의 괴로움과 즐거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니(人生苦樂從心起)
활달한 눈으로 세상을 보면 만사가 모두 편안하리라(活眼照來萬事康).
꽃이나 나무처럼, 모든 사람에게는 각각의 향기가 있다고 한다. 송광사를 찾은 사람, 아니, 도영 스님과 인연 있는 모든 사람이 만나 서로의 향기를 전하고 새로운 향기를 얻을 것이다. 꽃과 나무, 나와 타인이 피우는 향기 속에 부처님 체취는 고스란히 담겨 있을 터이다. 그 향기 흩날려 가는데 천리가 멀지 않고 만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 법이 전해지듯 온 우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해 가는 스님의 발자취, 후학과 불자들이 따를 것이 분명하다. 도영 스님은 지금도 홀로 길을 걸으며 공표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여! 고귀한 삶을 살아가라!”
도영 스님은
1935년 전북 부안 출생. 1961년 김제 금산사에서 월주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1년 금산사에서 금오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8년 법주사에서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수료하고 김제 흥복사·금산사 주지, 8~10대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포교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완주 송광사 주지 소임을 맡아 가람을 수호하고 신도교육과 수행을 지도하며 불법홍포의 원력을 펼치고 있다.
첫댓글 5월 29일 수요일 오전 11시에 서귀포시 봉림사에 오십니다
관심있는 불자님들께서는 오셔서 도영스님을 뵈오면 좋겠지요!
바라밀 합장 _()_
좋은소식 고맙습니다 _()_
평일이라서....마음만으로 참석할께요.
절(월정사) 49제시 2~3번정도 뵌적이 있어요. 덕높으신 스님이세요.
감로의 법문을 꼭 ~ 듣고 싶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