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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요동반도의 남쪽에 펼쳐진 금주와 대련지방을 신금(新金)으로 표시한 위성지도입니다. |
그런데 이곳이 백제시대의 금주 금마군 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만주원류고에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만주원류고는 그 출전을 송나라때 기록인 통고(通考)에서 참고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로 변한 대련과 장산군도 사이에 금석탄(金石灘)이란 해변 관광지가 있고 이곳의
바다를 김해(金海)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도에서 신금의 좌측으로 보이는 풍산산성은 과거의 외패산성으로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 낙랑군의
동부도위 산하에 있던 영동7현을 수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와 빼앗은 성이라는 기록도 <금사>열전의
주석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주석에는 벽류하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재의 풍산산성은 벽류하의 원류에서 분수되어 서남쪽으로 흐르는 지류가
있습니다.
다음글은 단군님이 배달국 싸이트에 올린 글입니다.
장산군도가 살수의 남쪽에 위치한 삼한의 발흥지었다는 근거가 될것으로 확신하고 빌려왔습니다.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요동반도에 마한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증거가 하나
나왔다.
[금사]에서 요동반도 서남부의 반란을 토평하는데 반란군이 도망간 곳이 동남부로서 지금 장해현의
[마한도]였다. 그 옆에
왕가도로서 추적이 되었으니 현재 마한도의 이름은 석성도라고 한다.
/新校本金史/列傳/卷八十 列傳第十八/斜卯阿里
- 1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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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復州叛,至十萬.旁近女直皆保於太尉胡沙家,築壘為固.敵圍之數重,守者糧芻俱盡,牛馬相
食其尾,人易子而食.夜,縋二人出,告急於阿里.阿里赴之,內外合擊之,破其於闢离密罕水上,
勦殺幾盡,水為之不流.蒲离古胡什吉水、馬韓島凡十餘戰,破數十萬.契丹、奚人聚舟千艘,將入于海.
阿里以二十七舟邀之,中流矢,臥舟中,中夜始蘇.敵船已入王家島,夜取海路追及之,敵走險以拒,阿
里以騎兵邀擊,再中流矢,力戰不退,竟破之,盡獲其舟.於是,蘇、復州、婆速路皆平.
소,복주蘇、復州 소주와 복주(현재 같은 지명),
蒲离古胡什吉水(벽류하, 고대 비류하. 온조 형 비류태자가 있던 곳.
벽류하에 있는 [위패산성]은 후한
광무제의 군대가 쳐들어온 곳이고, 비류는 쫓겨나서 온조가 먼저 있던 평양 서북 미추성으로 옮겨갔다.
마한도馬韓島; 현재 이름은 석성도石城島
왕가도王家島; 현재 이름도 왕가도
그래서 최치원은 고구려가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대동강의 마한은 기자의 금마마한이었고 삼국사기백제전에서는 진마라고 하였다.>
* 금마군에 대해서
산해경광주’(山海經廣注) 18권 해내경에는 조선을 말하며 준이 위만에 쫓겨나 간곳이
근거없는 한반도가 아니라 명확히 한나라 즉 대륙동해안의 금마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漢地金馬郡)
이내용에 대해서는 <산해경 광주>가 사고전서안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하였으나 원문을 아직
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위의 기록에서 송나라의 통고에, 고려는 백제의 금주 금마군을 남경으로 불렀다고 하고, 주를 달았는데,
<그땅 백제의 동남 변경의 전부를 신라가 점유하였다가 후에 발해와 거란으로 귀속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백제의 동남 변경이 익산이 될수없다는 결론이고 백제의 영토는 대련의 서북쪽으로도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당이 그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
중국 당나라는
초기의 영토 확장에 따라 변경지역에 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민족 지배를 관장했는데,
안동
(安東)·안북(安北)·선우(單于)·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 등 6개가 있었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 설치되었고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로 임명하여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키며 이들 지역을 총괄하게 했다.
또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해 반당적인 호민(豪民) 2만 8,000여 호(戶)를 당으로 강제 이주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검모잠(劍牟岑)이 이끄는 고구려의
부흥군이 평양 부근에서 크게 활동하자 669년 당은 그 주둔군을
요동성(遼東城:지금의 랴오양[遼陽])으로 옮겼다.
그후 675년 매초성(買肖城) 싸움, 이듬해의 기벌포(伎伐浦) 해전에서 당군이 신라군에게 대패하자,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
677년에 당은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왕(遼東都督朝鮮王)으로 봉하여, 앞서 당으로 데려갔던 주민들과 함께
고구려 유민을 요동에 안집하게 했다.
이때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男生)도 안동도호부의 관리로 파견되었다.
이해에 안동도호부는 다시 신성(新城:지금의 푸순[撫順] 근처)으로 옮겨져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보다는
보장왕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한 듯하다.
그러나 보장왕은 말갈(靺鞨)과 통하여 반당운동을 꾀해 다시 당으로 소환되어갔고, 이에 가담한 고구려인
들도 함께 많이 끌려갔다.
그뒤 698년 발해의 건국과 함께 안동도호부는 폐지되었고, 699년에는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가
요동도독으로 파견되어 고구려 유민을 통치했다.
704~705년경에 도호부는 복구되었는데 714년
평주(平州)에, 743년에는 요동으로 옮겼다.
당시의 임무는 말갈국을 견제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며 점차 그 실권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가 차지하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758년경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출전 엠파시스)
윗글 <금사>열전의 주석중에 벽류하에 대한 설명이 있네요.
[蒲离古胡什吉水(벽류하, 고대 비류하. 온조 형
비류태자가 있던 곳.]
*비류백제는 벽류하의 입해구에 있는 광록도(廣鹿島)에서 건국하였다는 구산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입니다.
이 벽류하를 청나라때는 필류하(畢流河)라고 쓰고 '삐루허'로 읽고있습니다.
글자가 어떻게 변하였던 부르는 이름은 비류입니다.
청나라는 옛날의 역사적인 흔적들을 지우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쓴 흔적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엉뚱한곳
에서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명. 청 그들이 만주땅의 진실을 감추기 위해서 어떻게 기록을 조작하였는지 다음에 글을 소개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어서
<금사> 열전에 소개된 원문의 내용을 대충 소개드립니다.
蘇、復州叛,至十萬.旁近女直皆保於太尉胡沙家,築壘為固.敵圍之數重,守者糧芻俱盡,牛馬相食其
尾,人易子而食.夜,縋二人出,告急於阿里.阿里赴之,內外合擊之,破其於闢离密罕水上,勦殺幾盡,
水為之不流.蒲离古胡什吉水、馬韓島凡十餘戰,破數十萬.契丹、奚人聚舟千艘,將入于海.阿里以二
十七舟邀之,中流矢,臥舟中,中夜始蘇.敵船已入王家島,夜取海路追及之,敵走險以拒,阿里以騎兵
邀擊,再中流矢,力戰不退,竟破之,盡獲其舟.於是,蘇、復州、婆速路皆平.
소주, 복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 수가 10여만명에 이르렀다. 근방에있던 여직의 보어태위 호사가는 돌로
공고한 축을 쌓아 지켰는데 란민들이 겹겹이 둘러쌓고 지키자 성내의 지키는 자들은 식량이떨어져 소와
말의 꼬리를 잘라먹고 사람들은 서로 자식을 바꿔 인육을 먹었다.
밤에 두사람이 탈출하여 아리에 급히 고하자 아리가 달려와 성의 안팍에서 공격하여 포위를 풀었다.
벽금밀한수상에서 접전하여 많은 인명을 죽이자 물이 막혀 흐르지 않았다.
또 벽류하와 마한도에서 십여전을 치뤄 수십만을 격파하였다.
거란과 해인들이 천척의 배를 �아 장수가 인솔하여 바다로 들어와 아리는 27척의 배를 요격하고 가운대로
쏜살같이 빠져 배위에 누어있다가 밤이 되자 다시 일어나 적선이 있는 왕가도로 들어갔다.
밤을 택하여 해로로 추격하자 적들은 험한곳으로 달려가 막았다.
이에 아리는 기병을 풀어 요격하고 다시 쏜살같이 적진을 통과하여 싸움에 물러섬이 없었다.
이로서 결국 적들을 격파하고 적선들을 모두 노획하였다.
이후 소주, 복주,파속로가 모두 평정을 되찾았다.
(번역에 애로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완벽하지가 못합니다. "벽금밀한수"란 물이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소주와 복주의 위치는 위의 지도상에서 좌측에있는 와방점시(瓦房店市)주변입니다.
다음은 남당 박창화 선생이 저술한 <우리나라 강역고>에서 주장하는 만주 요동지역을 설명한 기록입니다.
편집및 교열, 번역에 참가한 인원만도 박사급만 10여명에 이르고 발행 된 지가 이미 2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여론화 되지 못하고 외면당한체 묻쳐 있습니다.
내용 자체가 전부가 옳은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배일에 쌓였던 많은 것을 밝혀 놓았습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대형 연구소들이 분발할 차례입니다. 아까운 예산만 축내고, 진실은 호도하는데 급급
한다면 지켜보고 있는 밝은 눈들이 좌시하지 않을것입니다.
[명대(明代)
요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명대의 요동지역은 옛날 마한의 땅이며, 백제의 땅이며, 신라의 패강진(浿江鎭)과
한산주(漢山州)이며,
고려의 패서도(浿潟)와 서북면(西北面)이었다.
2. 북쪽에 있는 압록강을 남쪽으로
옮기었다.
3. 고려의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潟)를 빼앗고 이씨조선을 백두산 이남으로 축출
하였다.
4. 만주에 있던 전 지역을 백두산 이남으로 옮기게 하고, 흑룡강 주위의 여진족을 불러들여 만주에 있던
고구려 지역에서 자유로이
번식케 하였다.
5. 여진족은 광개토왕 비를 묻었으며, 윤관의 구성비(九城碑)를 파괴하여 고구려와 고려의 옛 유적을
없애고 지명을
변경하여 옛날의 영토를 알 수 없게 하였다.
6. 요동을 요하의 동쪽이라 정의하였다.
7. 이씨조선의 만주 통행 길은
안동현을 경유하여 요양과 영평을 거쳐 북경에 이르는 한가지 길만 열어
놓고 그 외에는 전부 봉쇄하여, 만주의 사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 지역을 상실하게 하는 동시에
고구려의 옛 영역을 영원히 버리도록 노력하였다.
금마저(金馬渚)는 고구려가 망한뒤 부흥운동을 이르킨 안승과 검모잠 일당이 안치되었던 곳입니다.
애시당초 금마저는 육지에 있는 전북의 익산땅이 될 수 없었습니다.
지명만 금마라면 모를까 '저(渚)'자가 붙는 까닭을 무시하고 왜곡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입니다 '渚'자는
'물가저'자 이지만 그 뜻은 강물의 유사지역에 생긴 델타지역(삼각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섬과 같은 뜻입니다.
지금의 낙동강 하류에 펼쳐진 김해 비행장부근의 지명을 대저면(大渚面)이라고 하는것도 그러한 까닭입
니다. 그러니까 육지의 금마저란 있을수 없는 지명이었습니다.
하였튼 금마저란 대련 인근에 있는 장산군도의 부속섬은 틀림이 없는데 어느 섬 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
니다.
안승(安勝)에 대하여
안승(安勝)
생몰년 미상. 고구려 왕족. 보덕국왕(報德國王)·안순(安舜)이라고도 한다.
연정토(淵淨土)의 아들, 또는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자라고도 하며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사야도
(史冶島)에 피신하여 있었는데,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劒牟岑)에 의하여 추대되어 한성
(漢城:지금의 황해도 재령 부근)에서 왕으로 즉위하였다.
소형(小兄) 다식(多式)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여 문무왕은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이어 당군의 압박을 받게 되자,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둘러싸고 검모잠과 대립하게 되어 그를 죽인 뒤 무리
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였다.
신라는 안승 집단을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익산)에 안치하였다.
674년(문무왕 14)보덕국왕에 봉해졌으며 680년에는 문무왕의 질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683년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성을 부여받고, 수도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의 근거지인 보덕국과 격리된 채 신라
중앙귀족이 되었다.
보덕국은 684년 그 주민이 반란을 기도하다가 진압되어 소멸하였다.
검모잠(劍牟岑)에 대하여
검모잠(劍牟岑)
생몰년 미상. 고구려 부흥운동의 지도자.
고구려 수림성(水臨城)출신으로 관등은
대형(大兄)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670년 유민 등을 규합해서 당나라의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궁모성
(窮牟城)에서 패수(浿水:대동강)남쪽으로 옮겨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한성(漢城:지금의 황해도 재령)에 자리를 잡고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가 있던 귀족 안승(安勝)을 맞아
왕으로 추대하는 한편,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로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출전:네이버)
*검모잠의 출신지는 역시 물가에 임해 있던 수림성(水臨城)인데 부흥군들을 모아 당나라의 관속과
승려
들을 죽이고 궁모성(窮牟城)에서 패수가 있는 대동강의 남쪽으로 옮겨 부흥 운동을 이르켰다고 하였습니다.
이곳의 '궁모성'이란 개모성(蓋牟성)으로 보이고 패수와 대동강은 개주의 니하를 왜곡 한것으로 보입니다.
안승이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 한성(漢城)은 황해도의 재령이
아니라 지금의 평양으로 추정이 됩니다.
또한 안승은 683년 경주로 초청되어 소판(蘇判)의 관등과 김씨(金氏)성을 부여받고,
수도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때의 경주는 현재의 경주가 아니고 압록강 북쪽에 있던 봉황성 이라야 맞습니다.
이유는 앞장에서 많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의 근거지인 보덕국과 격리 된것이 아닙니다.
한성(평양)이나 금마저는 봉황성(경주)에서 수 백리에 불과 하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三國史記> <新羅本紀> 文武王)
10년조
「안승(安勝)을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봉(封)하였다. 그 책문은 다음과 같다.
함형 원년(咸亨 元年) 경오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新羅王)은 고구려(高句麗) 사자(使者) 안승(安勝)
에게 책명(冊名)을 전달하노라. 공(公)의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은 일찍이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고
남해(南海)에서 공(功)을 세워 위풍(威風)이 청구(靑丘)에 떨치고 인교(仁敎)는 현도(玄菟)에 덮이었다.
그 뒤 대대 자손이 서로 계승(繼承)하여 본손,지손(本孫, 支孫)이 끊이지 아니하여 개척(開拓)한 땅은 천리
(千里)나
되고 역사는 8백년이 가까웠다.
封安勝爲高句麗王 其冊曰 "維咸亨元年 歲次 庚午 秋 八月 一日 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
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문무왕이 내린 책서의 내용중에
[공(公)의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은 일찍이 북산(北山)에서 덕을
쌓고 남해(南海)에서 공(功)을 세워 위풍(威風)이 청구(靑丘)에 떨치고...]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남해는 어디를 지칭한 말일까요.
그의 의붓아들 비류와 온조가 졸본을 떠나서 진번에서 가까운 근해의 벽지섬에 백제국을 건국한 기록을
보시겠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三國史記 百濟本紀)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陀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
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 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 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
立之爲太子 以至嗣位焉 於是 沸流謂弟溫祚曰 始大王避扶餘之難 逃歸至此 我母氏傾家財 助成邦業 其勸勞
多矣 及大王厭世 國家屬於孺留 吾等徒在此 鬱鬱如0贅 不如奉母氏 南遊卜地 別立國都 遂與弟率黨類 渡浿
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일설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沸流王)이다.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庶孫)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니 졸본(卒本) 연타발
( 延陀勃)의 딸이다.
처음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다.
우태가 죽으매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의 소생자나 같았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리(孺留)가 찾아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아우 온조에게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재를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가 유리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있어 무사마귀
모양으로 답답하게 지낼진대 어머니를 모시고 南으로 가서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대(浿, 帶) 두 물을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
한다.
*여기에서 소서노 일행은 졸본을 떠나 남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개주의 남쪽으로 니하를 건넌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남쪽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벽류하를 따라 내려오다 바닷가에 이른것입니다.
그런데 우태는 여기서 다시 바다를 건너지 않고 해변에 떨어져 살아습니다.
다음은 <한단고기> <고구려국본기>의 좀더 상세한 기록입니다.
온조가 형님인 비류와 작별하고 10인의 따르는 종자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와 대방 고지인 광록도에
온조 백제인 십제를 건국하는 장면입니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 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
라고 했다.
소 서 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 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
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
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 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 몽 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 몽 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
하여 소 서 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 여등은 온 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 조가 '좋다'고 승낙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 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
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 간 등 열 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 컨데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 할 만 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 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위지성: 위례성)]
*그런데 이곳의 위치 기록을 놓고 일본의 한단고기 번역자인 가지마 노부루는 원문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서빈대해'를 '동빈대해'로 바꾸어 기록을 왜곡하였다는 강력한 항의문을 읽은바 있습니다.
이분은 현재 열심히 청소년들을 지도하시는 교육자이기 때문에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되어 몇 말씀
적습니다.
좀더 온조백제의 초기 도읍지인 광록도를 알았다면 '서빈대해'(西濱大海)나 '동빈대해'(東濱大海)는 사실을
왜곡한것이 아니라 문장만 교치 한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 동옥저의 위치를 말할때는 역시 '동빈대해'라는 말이 쓰이듯이 말입니다.
역시 이곳도 동옥저의 땅이었습니다. 혹자들은 이 '동빈대해'를 함경도의 동쪽바다로 착각하여 한국의
고대사에 막대한 누를 끼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삼국유사><三國遺事> <마한조>에는 백제의 건국지를 아에 금마산(金馬山)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설을 따른다면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지요.
광록도는 산도 많습니다. 또 동쪽으로 한산(漢山)이 있으니까요. 이 설을 해석하기 위해서 평양성에 있는
마읍산까지 등장하고 최치원은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부른 증거를 마읍산을 근거로 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장을 몰랐던 변명들에 불과하였습니다.
[昔馬韓先起 赫世勃興 於是 百濟開國於金馬山」]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발흥(勃興)하고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
에서 나라를 세웠다.
위에 기록된 한단고기 번역자 가지마노부루의 잘못된 기록중에 원문인 '동빈대해'를 '서빈대해로' 잘못
기록하였다로 수정합니다.
그러니까 한단고기의 원문에는 '동빈대해'로 되어 있는데 노부루가 '서빈대해'로 잘못 기록 하였다는 뜻
입니다.
벽류하를 살수로 불렀던 후한 광무제의 세력들이 금주만의 외패산성(지도에는 풍산산성)으로 침입한 사실
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수 이남의 땅을 간접 지배하는 형식으로 다스렸다는것도 말씀드렸습니다.
이전 삼한의 세력들은 만주지역에 분포되어 있다가 전한의 침략에 의해서 밀려나 장산군도로 흩어져 살면
서 실지를 회복할 기회를 노리다가 한나라의 세력이 약해지는 기회가 생기면 여차없이 치고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드디어 고구려와 백제의 상륙이 시작되었지요.
근래에는 대련지역에서 한나라의 묘제형식을 갗춘 고분을 발굴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그사람들의 말을 전적으로 믿어야 할것인지는 아직 확신을 할 수 는 없으나 일단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作 者:
李战洲 发布时间:2006.04
近日,在即将开工的大连土羊公路(大连湾土城子———旅顺羊头洼)路基上,考古专家发现了大连
地区新的汉代古墓群,出土一座大连地区迄今为止保存最完整的汉代古墓。 4月7日考古人员开始对这里进
行挖掘。目前,工作人员已经挖掘了5座东汉时期的古墓,距今大约1700~1800年,其中两座双室墓、
三座单室墓。
令考古人员惊喜的是,在5座墓中,他们发现了一座迄今为止大连地区保存最为完好的穹顶墓。
这座汉墓
面积大约50平方米,双室,拱形墓门朝向南侧,墓底铺着青砖,墓的四周为典型的三横一竖的汉墓构造。
墓的穹顶保存完好,据考古专家王宇介绍,刚出土时,这座墓的穹顶丝毫没有损坏。
专家们经过测量,这些砖长约40厘米,宽约20厘米,断向这么多砖不上累积却不陷落,古人究竟用什
么方法搭成了穹顶呢?专家们也不得而知。
工作人员说,在这座墓的后室里,他们发现了两个头盖骨和几颗牙齿,另外还有陶罐、陶灶等多件灰
陶制品。
据王宇估计,这里可能存在着更大的汉墓群。
文章出处:华商网-华商晨报
[대련만토성자와 여순양두를 잇는 토양공로지역에서 고고학자들이 한대의 고무덤군을 발견했다고 함.
한개의 출토된 무덤은 아주 잘 보존된 한대의 무덤이라고 한다.
4월7일 고고연구원들은 이곳에서 발굴을 시도하고있고 지금으로부터
1800년전의 동한시대의 무덤5좌를
발굴하였다.그중 하나는 쌍실묘이고 3좌는 단실형태이다.
대련에서 발굴된 고묘중에서는 아주 보존이
잘 된것들이어서 연구인원들은 희색이 만연하다.
한대무덤은 큰것이 약 50평방미터,쌍실로서 문은 남쪽으로 나있고 묘의 바닥에는 푸른색의 바닥 벽돌로
장식되어 있고 벽묘의 4주위는 3횡1견의 한의 구조이다.
발굴전문가 왕우가 소개하길 출토시 손상된것이 없었다고 이야기하며 벽돌은 길이 40센티,폭은20센티로
벽돌로 둥그렇게 쌓은 천장이 어찌 무너지지 않도록 엣사람들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전문가도 알지
못한다. 두개골과 몇개의 ? 치아 가 발굴되었으며 기타 자기병,자기물통등 다수의 회도제품이 발견되었다.
왕우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많은 한대의 무덤이 발굴될수 있을거라 한다.(출전 배달국싸이트)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4년 11월조에는 금마저 얘기가 하나 더있습니다.
[11월에
안승의 족자(族子) 장군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모반하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복주(伏誅)
하였다. 그 여당은 대문의 주사함을 보고 신라의 관리를 살해하고 읍을 차지하여 배반하므로, 왕이 장사를
명하여 그들을 치니 마주싸워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전사하였다.
마침내 그 성을 함락하고 그 곳 사람들을 국남(國南)의 주군(州郡)으로 옮기고 그 곳을 금마군(金馬郡)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이때 금마저에서 금마군으로 바꾸었다는 뜻인듯. 필자주)
또다른 마한에 대한 기록입니다.
.通志卷四十一
朝鮮都王險(漢樂浪郡), 濊都濊在髙句麗之北(漢滄海郡),
三韓皆都帶方郡之東大海中東西以海為限南與倭接
北與樂浪方可四千里
(위만)조선은 도읍이 왕험성이다(한나라 낙랑군이다), 예(濊)는 예(濊)에 도읍했는데 현도군 고구려현의
북쪽이다(한나라 창해군이다).
삼한은 모두 대방군의 동쪽 대해(大海) 가운데에 도읍했는데 동쪽과 서쪽이 바다로 제한되었고 남쪽은
왜와 접하고 북쪽은 낙랑군과 접했으므로 거의 4천리이다.
사서에 기록된 또다른 낙랑군의 위치
後漢書卷一下(光武帝六年)初樂浪人王調據郡不服(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후한(後漢)의 광무제 6년(46년) 초에 낙랑인 왕준이 군에 의거하면서 불복하였다
(낙랑군은 옛 위만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
여기 분명히 낙랑군은 요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위 통지의 기록에서 한가지 더 재미난 것이 발견됩니다.
濊都濊在髙句麗之北(漢滄海郡)
예는 도읍을 예에 했었는데
(현도군) 고구려현의 북쪽이다(한나라 창해군이다)
만주원류고
宋 송
通考 髙麗以百濟 為金州 金馬郡 號南京(按此 乃百濟東南邊境 其全部 始屬新羅 後歸 渤海及契丹
非髙麗所
能有也)
「통고」에는 “고려때 백제의 옛땅은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 이 되었으며 남경南京이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을 살펴 보건대, 백제의 동남변경 전부는 처음에는 신라에 편입되었다가 뒤에는 발해渤海와 거란
契丹에 편입되었다. 고려가 능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元 원
元史 世祖至元四年 正月 百濟遣其臣 梁浩來朝 賜以錦繡 有差
謹按 ** 百濟自後漢時 已見史傳 厯晉迄唐
使命嵗通 ** 王本夫餘王 仇台之後 以夫餘為氏 舊國屬馬韓 晉代
以後 盡得馬韓故地 兼有遼西晉平二郡 自置百濟郡
「원사」에는 “세조 지원至元
4년[1267년] 정월 백제가 그 신하 양호梁浩를 보내 래조하였다.
수놓은 비단을 [관직에 따라] 차이를 두어 보냈다.”고 기록되었다.
삼가 살피건대 **백제는 후한때부터 이미 사전(史傳)에 기록되어 보인다.
진晉대로부터 당唐 대에 이르기까지 매년 사신을 보내 서로 통하게 하였다**
왕은 본래 부여왕 구태仇台의 후예인 고로 부여를 성으로 삼았다. 일찍이 그 나라는 마한馬韓에 부속되었
는데 진대晉代이후 마침내 마한馬韓의 옛땅을 차지하고 또한 요서遼西 진평晉平 2군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 百濟郡을 설치하였다.
宋書言 所治謂之 晉平郡晉平縣
都城號居拔城 則百濟郡 即晉平而居拔城 即晉平城也 馬端臨謂 晉平在唐栁
城北平之間 實今錦州寧逺廣寧之境 一統志謂居拔城 在今朝鮮境内者殆 梁天監時 遷居南韓之城 歟普通以後
累破髙麗 斬其王釗更為强國 號所治城曰固麻
「송서」에는 “그 치소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며 도성을
거발성居拔城이라 부른다.”고 기록되
었다. 즉 백제군百濟郡은 곧 진평晉平이며 거발성居拔城이고 진평성晉平城이다.
마단림馬端臨이 말하기를 “진평은 당의 류성과 북평사이에 있다. 기실 지금의 금주錦州 영원寧逺 광녕
廣寧 일대이다. 「일통지」에는 “거발성은 지금의 조선경내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위태로운 것
이다.
양梁나라 천감天監[502-519〕때에 남한南韓에 있는 성으로 옮겨갔다.
보통普通[520-527] 연간 이후 여러 차례 고구려를 쳐 부수고 그 왕 쇠釗를 전사케한 이후 더욱 강국이
되었다. 그 치소인 도성을 고마固麻라
부른다.
北史謂 居拔城即固麻城 以滿洲語考之 固麻為格們之轉音 唐書云 王居有東西兩城 則居拔即 滿洲語之卓巴
兩城皆王都 故均以格捫稱之 其曰建
봉황성과 그 주변의 전쟁 기록들
지도는 요동반도와 장산군도를 볼수있는 위성에서 본 사진입니다. 봉황성이 보이지 않지만 지도의 맨오른 쪽 초자하(硝子河)의 오른쪽 지점 쯤에 봉황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으로 흐르는 벽류하(살수추정)와 신라가 있었다는 장산군도의 거리와 위치를 참고하기 위해서 올렸습니다. 발해와 신라가 국경을 이루었던 개주의 니하 동쪽으로는 분명히 봉황성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서들의 기록대로 그리고 지도들이 그려놓은 그림대로 라면 봉황성 위치는 신라의 영역이 분명한데도 봉황성이나 오골성이 신라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은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낯설은 견아성 전투가 고구려,신라간에 벌어져서 신라의 견아성이 위기에 몰렸을때 백제가 3000 여의 구원병을 지원하여 신라의 견아성은 위기를 모면 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차피 견아성은 반도내에서는 찾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삼국이 접경하여 진퇴를 거듭하던 요충지를 찾 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봉황성을 고구려때 경주(慶州)로 부르고 요(遼)나라때 개주(開州) 로 불렀다는 단서에 착안하여 봉황성을 다시 살펴보기로 합니다. 다음글은 고구려 천리장성을 밝히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시던 서길수
교수님의 봉황성 답사기입니다. 봉황산의 최고봉은 찬운봉( 雲峰, 836.4m)이고 오골성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찬운봉을 정점으로 오골성 서벽이 뻗어가고, 맞은편 동대정자(東大頂子, 약 800m) 남북으로 동벽이 이어진다. 동대정자가 있는 산은 고구려 성이 있는 산이라고 해서 고려성자산(高麗城子山)이라고 부른다. 우뚝 솟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바위 절벽들이 이어지는 험준한 지형이 자연 성을 이루고 있고, 산봉우리 사이의
낮은 지대에는 성을 쌓아 철통같은 방어벽을 형성하였다. 둘레는 15,955m로 거의 16㎞에 가깝다. 오골성은 86구간의 돌로 쌓은 성벽과 87구간의 천연장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로 쌓은 성벽의 총 길이는 7,525m이다. 오골성의 천연 절벽은 높이 50m가 넘는 대형만 34구간이나 된다. 오골성은 서쪽으로 낭낭산성를 비롯한 수암의 여러 성을 거쳐 안시성에 이르고, 서북으로 백암성을 지나 요동성과 접하며, 동쪽은 압록강 물길 따라 "박작성(泊 城)"을 지나 중 상류에 있는 고구려의 내지로 직통 할 수 있다. 명나라 {요동지}에 오골성은 "10만의 무리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고구려 산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며 현존 상황도 가장 좋다. 오골성이 위치한 곳은 전쟁이 빈번한 요하 일선과 비교적 멀다. 그러나 고구려 역사에서 한 역할은 매우 뚜렷하다. 645년 당나라 이세적(李世勣) 군대가 백암성을 공격하자 오골성에서 군사를 보내 도왔고, 648년 당나라 설만철(薛萬徹)이 박작성을 쳐들어가 포위하자 고구려는 장군 고문(高文)을 보내 오골성과 안지성 같은 여러 성의 군사 3만 남짓을 거느리고 와서 도왔다.
의 땅을 경략하는 센터로 삼아 군사를 양성하고 전력을 축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골성은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였을 때도 중요한 공격 대상으로 등장한다. 당 태종이 안시성을 수없이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자 당 태종에게 항복한 고연수.고혜란이 "오골성 욕살은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키지 못할 것이니 그 성의 군수 물자와 양곡을 빼앗아 평양으로 전진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건안성과 신성에 있는 10만 병력과 안시성의 병력이 퇴로를 막고 뒤를 칠까 두려워 오골성을 치지 못하고 결국 안시성에서 패하고 돌아간다. 여기서 오골성은 압록강 이북에서는 평양으로 가는 좋은 길목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다. 삼국사기의 산상왕 13년(209)에 "왕은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고 하였는데, 이 환도가 바로 봉황산성이 라는 것이다. 후에 수도를 현재의 평양으로 옮긴 뒤에도 봉황성을 부수도로 삼고 전쟁이 나면 국왕이 직접 이 성으로 나아가 지휘했으며, 관구검이나 모용황이 쳐들어왔던 환도성도 바로 이 봉황성이라는
주장이다. 왕력에 "임인 8월에 안시성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곧 환도성이다"라고 한 기록을 바탕으로 환도, 즉 안시성 이 한 때 고구려의 수도였으며, 환도.안시는 곧 지금의 봉황성이라는 논리도 추가된다. 봉황성이 안시성이라는 주장은 홍대용의 [담헌서]와 이익의 [성호새설류선]에도 나오지만 230여 년 전 이곳을 지나던 연암은 해박한 역사지식을 이용하여 봉황성은 안시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 이라고 한다. {당서}에 안시성은 평양에서 500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는데,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고 하니 무엇을 이름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地志)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懸) 동북 70리에 있다고 했으니, 대체로 개평현 에서 동쪽으로 수암하(水巖河)까지가 300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쪽으로 2백리 가면 봉황성이다. {당서}의 기록 때문에 잘 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며, 같은 {당서}에서도 지리를 전문으로 다룬 [지지]에서 안시성이 개평현 부근에 있다고 봉황성에서 서쪽으로 500리를 가면 안시성이 있으니 봉황성 이 안시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다음 글은 <열하일기>의 도강록(渡江錄)에서 28일째 되는날 봉황성에서 쓴 글입니다. 너무 길어 앞뒤 부문을 줄이고 역사를 공부하는 후학들이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할 부분만 올렸습니다. 이러한 글을 남겨서 후학들에게 경고를 보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오늘날같이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이유가 나변에 있을까요. (중략) 아무튼 집을 세움에는 벽돌의 공이 가장 크다. 비단 높은 담 쌓기만이 아니라 집 안팎을 헤아리지 않고 벽돌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저 넓고
넓은 뜰에도 눈가는 곳마다 반듯반듯 바둑판을 그린 것처럼 쌓았다. 이러므로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으려니와, 더구나 새ㆍ쥐ㆍ뱀ㆍ고양이 같은 놈들 의 걱정이야 있을 수 없다. 가운데는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이룩되어 집 안의 모든 물건은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이로 보면, 많은 흙과 나무도 들지 않고 못질과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이,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벌써 이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중략)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 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 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 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 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 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 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 (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 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 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 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 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 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반듯하여 네모 말[斗]을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비록 거창스러운 듯하나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 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은 위로부터 끌어올리기도 하며 혹은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나 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는데 자못 석별(惜別)의 뜻이 보이며, 또 돌아올 때는 겨울이 될 터인즉 책력 한 벌을 사다 달라고 부탁 한다. 나는 청심환(淸心丸) 한
개를 내어 주었다. 부당(惟軍器不當 군기만은 전당잡지 않는다는 뜻)’이란 다섯 글자가 씌었으니, 이것은 전당포(典當舖)다. (중략) 말을 탄 이는 모두 검은 비단신을 신고, 걷는 이는 대체로 푸른 베신을 신었는데, 신바닥에는 모두 베를 수십 겹이나 받혀 댄 것이다. 미투리나 짚신은 보지를 못했다. 송참(松站)에서 묵다. 이 곳은 설리참(雪裏站)이라고도 하고, 또 설유참(雪劉站)이라고도 부른다. 이 날 70리를 갔다. 누가 말했다. “이곳은 옛날 진동보(鎭東堡)이다.”
하여 이(彝)를 썼다. 다음은 봉황성과 북한이 살수라고 주장하는 초자하, 그리고 구산이 주장하는 초자하의 서쪽에 위치한 벽류하등의 고고학적 유적지와 전쟁 기록들을 통하여 상호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 인가를 밝혀보기 위해서 우선 상단에 두번째의 지도를 추가 하였습니다.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초자하 유역에서는 많은 량의 유적들을 발견할 수 없으나 초자하의 서쪽과 벽류하의 주변에서는 많은 고인돌등의 유적들을 발견할수 있는점메 유의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고인돌 유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원안의 지역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백제가 서로 자웅을 겨루 던 살수지원(薩水之原)이라고 추정한다면 이 근처에 신라의 견아성(犬牙城)이 있어야 맞는 얘기가 됩니다. 지금까지 신라의 초기 왕성으로 알려진 금성을 혹시 봉황성이나 오골성이 아니었을까 하고 찾아 나섰다가 정체를 밝혀보기 위해서 많은 자료 들을 찾아 내어 올려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삼국군이 등장하는 살수 벌판의 전투가 나왔고 당시 신라성으로 알려졌던 견아성이 등장 하였습니다. 그 결과 통설로 이해되고 있던 살수의 위치가 청천강이 아니었다는 결론은 확고히 굳어 진듯 합니다. 이 가설은 살수벌판의 전투를 청천강으로 가정 하였을때 고구려의 평양보다 북쪽인 청천강 유역에 신라의 성을 둘 수 없다는 것이고,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괴산의 청천강 유역으로 가정한다 하더라도 부정적인 요소는 여전히 많이 남기 때문입니다. 하였을때 어느정도의 타당성이 있는가를 놓고 검토한 결과 긍정적인 결논을 도출할 수도 있었지만 모두가 의아스럽게만 느껴지는 추론들로 독자님들의 고정된 통설관을 깨트리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것인지 두려 울 뿐입니다. 하지만 오늘 당장 통설을 바꿀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하나하나 기록 하여 두었다가 지금까지 은패되어 왔던 역사의 진실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영광이 없겠습니다.
봉황성은 고구려때 경주(慶州)로 불렀고, 니하(개주)의 동쪽에 있었던 신라의 강역으로서 신라가 왕성 으로 삼았을 공산이 큽니다. 따라서 현 경주의 이름은 후에 고려가 붙여준 지명이라는 근거가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이 성을 금성으로 불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현 경주지역에 세웠던 성들의 이름들은 모두 월성을 기준으로 삼은 걸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는 금성을 중국 장안의 서쪽에 있는 난주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연결이 되는 경로를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오골성을 봉황성으로도 불렀다는 통설은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합니다. 이유는 오골성은 봉황성의 서쪽에 있는 수암성이라는 북한의 주장이 있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신라의 견아성은 수암성이 더 가까울수도 있을 가능성이 있고, 아니면 벽류하에 가까운 다른 성일 수도 있습니다. 벽류하의 주변에는 성들이 많습니다. 때문에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아니드래도 많은 전쟁이 있었던 요충지로 확인이 되는 장소입니다. 다음의 기록을 <삼국사기> 34권-지3-지리1-01에서 옮겨봅니다. 첫머리의 문장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신라의
강계는 옛날의 기록과 같지 않다" 는 대목입니다. * ○<新羅>疆界,
古傳記不同. 東南, 東濱大海." <劉煦{劉 }>『唐書』云: "東南俱限大海." <宋祁>『新書』云: "東南<日本>, 西<百濟>,
北<&高麗{高句麗}>, 南濱海." 高麗{高句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此諸說, 可謂近似焉. 若『新·舊唐書』皆云: " <卞韓>苗裔在<樂浪>之地." 『新書』又云: "東距長人, 長人者, 人長三丈, 鋸牙鉤爪, 搏人以食, <新羅>常 屯弩士數千, 守之." 此皆傳聞懸說, 非實錄也. 按兩『漢志』: "<樂浪郡>距<洛陽>東北五千里." 注曰: "屬 <幽州>, 故<朝鮮國>也." 則似與<鷄林>地分隔絶. 又相傳: 東海絶島上有大人國, 而人無見者, 豈有弩士守 之者. 今按<新羅>始祖<赫居世>, <前漢><五鳳>元年甲子開國, 王都長三千七十五步, 廣三千一十八步, 三十五里, 六部.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 <脫解王>九年, <始林>有 怪, 更名<鷄林>. [삼국사기 권제34 (잡지 제3) 지리/신라/신라 강역의 경계] 동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었다.』 에서는 『동남쪽은 일본(日本)이고, 서쪽은 백제이고, 북쪽은 고구려[高麗]이며, 남쪽은 바다에 접하였다.』 고 하였다. 였다. 낙랑(樂浪) 땅에 있다.』 하였고, 신서(新書)에서는 또 이르기를 『동쪽으로 장인(長人)과 떨어져 있는데, 장인이라는 것은 사람의 키가 세 길이나 되며 톱같은 이빨과 갈고리같은 손톱으로 사람을 잡아먹기 때문에, 신라는 항상 쇠뇌 쏘는 군사 수 천으로 지키게 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전해 들은 떠도는 이야기일 뿐이고 사실의 기록이 아니다. 주(注)에서는 『유주(幽州)에 속하며, 옛날의 조선국(朝鮮國)이다.』라고 하였으니, 계림(林)이 있던 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듯하다. 본 사람이 없으니, 어찌 쇠뇌 쏘는 군사의 지킴이 있었겠는가? 지금[고려] 살펴보건대, 신라 시조 혁거세는 전한(前漢) 오봉(五鳳) 원년 갑자(서기전 57)에 개국하였다. 서울[王都]은 길이가 3,075보(步)이고 너비가 3,018보이며,
35리(里)와 6부(部)가 있었다. 65)에 시림(始林)에서 닭의 변괴가 있어서 다시 계림(鷄林)이라고 이름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 기림왕 10년(307)에 다시 신라(新羅)라고 이름하였다. 다음은 신라가 성들을 쌓았던 기록입니다. 여기에서도 견아(개이빨)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고려태조 왕건이가 월성을 경주로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둘레가 1,023보(步)였다. 이 있으니 둘레가 1,906보였으며, 또한 신월성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으니 둘레가 2,804보였다. 하다가, 후에 당나라[大唐]와 함께 두 나라를 쳐서 멸하고 그 토지를 평정하여 드디어 9주(州)를 설치하 였다. 곳을 상주(尙州)(***개주蓋州)라 하고, 서울 남쪽을
양주(良州)라 하고, 서쪽을 강주(康州)(***금주錦州)라고 하였다. 다음 서남쪽을 전주(全州)라 하고, (***전주는 웅주의 서남이 될 수 없음) 다음 남쪽을 무주(武州)라고 하였다.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라 하고, 또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이루 다 기록하지 않는다.> 신라 영토의 넓이가 이처럼 매우 컸었다. 그러나 [신라가] 쇠퇴하게 되어서는, 정사가 거칠고 백성이 흩어져서 강토가 날로 줄어들다가, 마지막 왕 김부(金傅)가 나라를 들어 우리[고려] 태조에게 귀의하자
<삼국사기>34권-지3-지리1의 원문 於<金城>東南, 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步. <新月城>北有<滿月城>, 周一千八百三 十八步.
又<新月城>東有<明活城>, 周一千九百六步. 又<新月城>南有<南山城>,
周二千八百四步. 後與(-大) 趙炳舜. 『三國史節要』. <良州>, 西曰<康州>. 於故<百濟>國界, 置三州: <百濟>故城北<熊津>口曰<熊州>, 次西南曰<全州>, 次南曰<武州>. 於故<高句麗>南界, 置三州: 從西第一曰<漢州>, 次東曰<朔州>, 又次東曰<溟州>. 九州所管郡縣, 無慮四百五十.[方言所謂鄕·部·曲等, 雜所不復具錄.] <新羅>地理之廣袤, 斯爲極矣, 及其 衰也, 政荒民散, 疆土日蹙. 末王<金傅>, 以國歸我<太祖>, 以其國爲<慶州>. 이상의 기록을 통해서 초기 신라의 금성 위치를 검토 해 보면 봉황성이 금성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고, 낙랑인들이 금성을 침범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었다는 <삼국유사>의 다음 기록을 검토 한다면 아무래도 초기의 금성은 장산군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만약 통설이 맞는다면 대동강 지역에 있던 낙랑인들이 경주의 금성을 습격할 가능성은 전무한 것이지요. <삼국유사>는 이기록과 더불어 통설로는 이해가 안되는 또 한가지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 尙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或云: 尼師今, 言謂齒理也. 初南解王 薨, 子弩禮讓位於脫解, 解云: “吾聞聖智人多齒.” 乃試以餠噬之, *占{古}傳如此. 或*<云,曰>: 麻立干 [立一作袖]. 金大問云: 麻立者, 方言謂橛也, 橛標准位而置, 則王橛爲主, 臣橛列於下, 因以名之. 史論曰: 新羅稱居西干,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年代曆,
皆 未詳.
이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낙랑국을 설명한 대목인데 낙랑군과 낙랑국을 구분을 못하고 다만 낙랑군이 낙랑국으로 바뀐것으로만 알고 있는듯 합니다. 그리고 이기록이 남기고 있는 또 한가지의 중요한 사실은 살수의 남쪽 땅들이 후한의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토벌하고 난 뒤 한나라의 속령이 되었는데 이때 백제와, 신라, 가라, 동예, 심지어는 왜국 까지도 후한의 속방이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앞서
토론중에 "신라땅도 한나라의 땅이라고?"라는 제목을 제시한 의도도 이 대목 때문 이었습니다. 있으나 살수이남을 한반도로 비정하였다면 한반도 전체가 한나라와 일전도 없이 항복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왜국은 한반도와는 별개의 나라인데, 이러한 기록은 고구려와 말갈을 제외한 삼국들이 장산군도 내역에 있던 상황을 무시하면 해독을 할수 없다는 대목인 것입니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낙랑해(樂浪海)에 신라가 있었다는 대목도 있다는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한반도내의 삼국의 땅은 한나라와는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의 내력은 전한 후기 낙랑군의 동부도위부에 속하였던 영동 7현 땅인데 기원30년에 땅이 너무 멀어 다스리기가 어려움으로 각 현을 자치를 할수있는 거수제도로 바꾸고 한나라는 손을 떼었습니다. 그러자 기원 37년 고구려가 낙랑을 쳐서 멸하고 끼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난리에 낙랑국땅의 백성 5000여명이 신라로 떠나게 됩니다. 영동7현의 땅을 수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살수(벽류하) 이남이 되었고 아울러 먼 바다쪽으로 떨어져 있던 백제, 신라, 가야, 왜 등도 이때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한의 속방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시 기원 56년에 고구려가 살수지원에 있던 동옥저를 쳐서 합방시키고, 기원106년 한의 요동 6현을 쳐서 멸하고 기원
118년에 바야흐로 바다로 떨어져 있던 석성도의 예맥 화려성을 공격합니다. 라고 하였고, 신라인 역시 옛 낙랑인이라고 한 것이나 고려조에 '낙랑군부인' 또는 태조 왕건에게 시집 오게된 경순왕의 딸을 '낙랑공주'라고 한 것도 그러한
연유라고 하였습니다. 十年, 樂浪人來投. 又第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王, 伐樂浪滅之, 其國人與帶方[北帶方]投于羅. 又無恤 王二十七年, 光虎帝遣使伐樂浪, 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據上諸文, 樂浪卽平壤城, 宜矣. 或云樂浪中 頭山下, 靺鞨之界, 薩水今大同江也. 未詳孰是.]. 又百濟溫祚之言曰: 東有樂浪, 北有靺鞨, 則殆古漢時樂浪 郡之屬縣之地也, 新羅人亦以稱樂浪故, 今本朝亦因之, 而稱樂浪郡夫人, 又*大{太}祖降女於金*傳{傅}, 亦曰: 樂浪公主. 다음은 <규원사화>에 기록된 우수하, 속말수가 어떻게 니하와 연계 되는가를 보시겠습니다. 그 동안 많은 불신을 받어왔던
<규원사화> 는 과연 믿지못할 사서였을까요.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 爲其先駈.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揆園史話 檀君紀] 지금 만주 길림의 땅이며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즉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로 도 부르며, 옛 속말수(粟末水)이다. 신라 때에 속말 말갈인들이 속말수를 점거하여 살고 있었는데, 발해 대씨(대조영)가 일어남에 따라 그
우두머리 되었다. 말갈인이란 것은 옛 숙신의 후예들이고, 이들이 또한 단제(檀帝)의 유족들이다. (그 말은) 대대로 와전되었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는 않았다. (규원사화 단군기) 다음글은 <발해고>에 실린 내용입니다. 당시 당은포가 압록강구에 있었다는 기록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압록강의 위치를 두고 고민한 흔적이 보입니다. 왜냐하면 서경압록부의 위치만 확인하면 당은포의 위치도 쉽게 풀릴 수 도 있을 텐데 압록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도 그럴것이 압록수를 통상 요하를 기준하다가 동쪽으로 옮겨 버렸으니 말입니다. 당시 이름만 옮겨진 압록강의 집안지방을 서경 압록부로 하자니 집안보다 훨씬 서쪽에 동경 용원부 (봉황성)가 있었으니 불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은포는 조공도였기때문에 그 위치를 다시 요양의패수를 압록으로 부활시켜 당나라와 교통이 양호한 징주(개주)를 당은포로 개설하였다는 설명인듯 합니다. 그렇다면 <만주원류고>에서 신라 9주주에 들어가는 상주(尙州)가 조공도에 설치된 개주(蓋州)라는 기록도 맞아 떨어 집니다. 그러나 저자인 유득공은 패수이남이 신라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문 해독이 능하신분이 계시면 아래문장을 해독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今之寧古塔也 中京顯德府者 今之吉林也 東京龍原府者 今之鳳凰城也 南京南海府者 今之海城縣也 西京鴨綠 府者 今未可考 而當在鴨綠江近處 然則以龍原爲東京 以鴨綠爲西京者可疑 豈鳳凰城以西 復有一鴨綠江 如 遼陽之浿水歟 置朝貢道於鴨綠者 以海路通唐也 考諸日本逸史 鄧州襄陽爲朝貢 之路良然 南海府之爲新羅道 亦以海路通新羅也 文獻通考及淸一統志 以鴨綠爲朝鮮道 是時無朝鮮 當從新唐書 다음은 <<요사>>가 말하는 발해의 철주 안시성에 대한 기록인데 안시성은 발해국의 서경이었던 요양성 에서 서남쪽으로 60리 거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요양성은 거란의 동경이었고, 발해국의 서경 압록부였으며, 발해국은 안시성을 신주(神州)로도 부르고 4개현을 두었었는데 요나라때 4개현을 탕지현 하나로 줄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을 눈여겨 봐야 하는것은 발해때 서경압록부의 위치입니다. 발해는 한동안 요양성을 서경압록부로 하였었지만 영토가 확장되자. 서경압록부는 심양의 서쪽(요하유역)으로 옮겨지고 요양성은 중경 현덕부로 삼았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28),鐵州,建武軍,刺史 , 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 (神)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八]皆廢.戶一千.在(東)京 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 [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鐵州] 당태종이 패하고 달아난 안시성이다. 발해시대는 신주(神州)로 불렸으며 4현(위성、하단、창산、용진)을 두었는데 후에 거란이 4개현을 폐지하고 탕지현(湯池縣)하나로 줄였는데 이곳이 곧 안시성이다. 탕지(안시성)는 동경(발해서경= 평양성)으로부터 서남쪽 60리다.
다음은 살수가 개주(開州=봉황성)의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입니다. <신당서>에는 남건이 오만병력으로 부여를 공격하였을때 이적을 살하수상에서 격파하였다는 기록이고, <성경통지>는 살수는 살하수와 같은 이름이라고 적고, <명일통지>는 살수가 평양성 서쪽에 있는 압록강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개주=봉황성의 서남쪽에는 벽류하가 있습니다. 또한 평양성의 서쪽방향이 되기도 하고. 압록수(패수=니하) 의 동쪽이 되기도 합니다. 賀水應在邊界.[盛京通志 卷二十八]薩賀水. 在開州西南一作薛賀水.[大清一統志 巻四百二十一] 그리고 또 하나의 고구려와 백제의 대 전투중에 이해가 어려운 패수(浿水)지상(之上)의 전쟁입니다. 이 기록도 개주(蓋州)로 흐르는 니하를 패수로 본다면 이해가 가능 할것으로 봅니다. 당시 백제는 개주의 남쪽에 있는 웅악성(熊岳城)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개이빨처럼 얼켜 있었다고 하였나 봅니다. 다음은 <청일통지>, <요사> <지리지>등을 통해서 봉황성이 책성과 같다는 기록과 봉황성의 위치가 남동 쪽으로 바다에 이른다는 기록으로서 현재의 위치를 재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책성등의 위치를 한반도내로 비정하고자 하는 혼동을 차단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것은 봉황성을 일본도(日本道)라고 한 기록입니다. 통설 대로라면 신라도가 맞을텐데 신라도는 개주에다 설정하고 봉황성을 일본도라고 한 대목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아니겠습니까. 살수의 남쪽에 있었던 신라의 동남쪽(장산군도의 해양도)에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본이 기를 쓰고 임라일본부를 확인 할려고 김해지역을 뒤지고 다녔던 해프닝과 억지 주장은 깨끗이 접고 다시 장산군도의 해양도와 장자도 등을 정밀 탐사 하기를 권합니다.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는 중국과 북한이 석유를 개발하기 위해서 서한만 일대를 탐사할때 어쩌면 발견 될 지도 모릅니다. 遼時開州鎭國軍 金時石城縣 元時屬東寧路鳳凰城 金鳳凰城 당나라때 안동도호부에 속했었고, 발해에 들어 용원부, 요나라때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금나라때 석성현, 원나라때 동령로 봉황성, 금나라때 봉황성. (신라와 고려때를
제외시킴) 성의 둘레가 20리이다. 설인귀가 고구려를 치고 사냥을 하였다는 곳이 이곳이다. 다음에 제시한 신,구당서에는 신라의 금성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모두 다 성의 둘레가 8리정도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봉황성의
규모는 둘레가 20리로서 신라 금성의 두배 반이나 큰 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北鄰高麗。東西千里,南北二千里。有城邑村落。王之所居曰金城,周七
八里。 南瀕海,北高麗。而王居金城,環八里所,衛兵三千人。 지금까지 고조선사에서 난해한 대목으로 등장하였던 동옥저의 위치에 대해서 몇가지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합니다. 마치 봉황성의 위치에 대한 설명에서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빈해(濱海)에 이른다" 는 대목과 같이 동옥저의 위치를 비정하는 대목에서도 '동쪽으로 빈대해(濱大海)'라는 대목이 공통성을 갖는 위치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옥저의 생산품 중에서 소곰이 나는데 봉황성의 동남쪽 대양하 바다 근처에 있는 대염주 (大鹽州)와 소염주(小鹽州)가 그곳입니다. 이곳의 소곰 생산은 의외로 산에서 소곰을 파내는 염장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안선 지형의 특성상 옥저의 영토는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길어 천리가 된다는 표현을 이해할수 있을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 많은 인용이 있었기에 번역은 생략합니다. 고구려의 개마대산과 한나라의 단단대령은 같은
산맥입니다. 時時小異。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 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為縣。漢光武六年, 다음 기록에서 신라의 동북 국경으로 등장하는 천정군이나 덕원군의 위치를 국내의 학계에서는 함경도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었으나, 역시 잘못된 기록으로 들어나고 있습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하여 발해군을 추격하였는데 도중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 동사자가 속출하자 양국군대를 해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당나라군이 발해군을 추격하기 위해서 함경도지방까지 출전하였다는 말이 되는데 도대체가 이해할수없는 부정적인 기록입니다.
기록이네요. 그러니까 천정군이나 덕원군등은 함경도가 아니라 니하의 상류인 장백산 근처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정을 하게 합니다. <요사>등의 지리지에서도 지명이 몇번인가 바뀐 흔적들을 볼수 있습니다. 또하나의 놀라운 사실은 대동강이 발해바다와 접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발해접계'를 발해국과 접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론도 할 수 있으나, 여기서 국경 이라는 경계 자체가 모두 발해와 신라의 국경이기에 이중으로 발해를
들먹일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당나라는 신라의 만주지역 점유 사실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다가 서기 735년에 만주지방의 동북경계는 덕원, 서북경계는 발해로 흐르는 개주(蓋州) 대동강(니하)이남으로 인정한 것이지요. 이러한 사실은 당시 신라로 하여금 발해국 세력의 확장을 저지해보자는 정략이 담겨 있었다고 볼 수 있겠 습니다. 그런데 국내의 역사학계에서는 만주의 국경선인 개주(蓋州)의 니하(대동강)에서 한반도의 평안남도의
대동강까지 후퇴시켰으니 그 죄를 어디다 물어야 옳은 것인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시켰다. 신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 정벌에 동참하도록 하였으나 대설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연합군을 해체하고 싸움을 중지하였다고 하였다. 이듬해에도 또 다시 당나라는 군사를 크게 일으켰는데 이번에는 발해의 연 충 린 장군과 말 갈 병의 연합 군에게 요서의 대산 남쪽에서 크게 패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까지 이르렀다. 이 공격에 대하여 발해는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라,당 연합군을 격파 하였던 것이다. 당나라는 735년 패강 이남의 통치권을 신라 성 덕 왕에게 허락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경은 아래와 같이
변하였다. 이르렀다. 『해동역사 속 권 7』] 古泥河. <<新唐書>> 渤海大氐本粟末靺鞨, 附高麗國. 高麗滅, 保東牟. 直營州東二千里, 以泥河爲境. 萬歲通天中契丹反,
東渡遼水保大白山之東, 北阻奧婁河, 自固. 故名蓒芋泊. 源出聖水山流至述眞山散漫爲遼時之蓒芋泊, 今爲蓒芋濼. 水多蓒芋之草, 與朝鮮境內之浿江不同.
[盛京通志卷二十七 山川三 吉林各屬 (九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