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담무갈은 중국말로는 법용(法勇)이라 한다. 성(姓)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어 곧 고행(苦行)을 닦았다. 계율을 지니고 경전을 독송하여 은사가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법현(法顯) 등이 몸소 부처의 나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는, 슬퍼서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는 서원[忘身之誓]을 세웠다.
마침내 유송(劉宋)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과 담랑(曇朗) 등의 무리 25명을 불러모았다. 번개(幡蓋)와 공양(供養) 도구를 갖추고, 북쪽 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하남국(河南國)에 이르렀다. 이어서 해서군(海西郡)으로 나와 고비 사막으로 진입하여, 내처 들어가 고창군(高昌郡)에 도착하였다. 구자국(龜玆國)과 사륵국(沙勒國) 등의 여러 나라들을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에 올라 설산(雪山)을 넘었다. 장기(障氣:毒氣)는 천 겹이고, 층층이 쌓인 빙설은 만 리요, 아래로는 큰 강이 쏜살같이 흘렀다.
동쪽과 서쪽의 두 산허리에 굵은 줄을 매어 다리로 삼았다. 열 사람이 일단 건너가 저쪽 기슭에 도착하면, 연기를 피워 표지로 삼았다. 뒷사람은 이 연기를 보고 앞사람이 이미 도착했음을 알아, 비로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일 오랫동안 연기를 보지 못하면, 사나운 바람이 그 줄을 흔들어 사람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음을 알았다.
설산을 넘은 지 3일이 지나 다시 대설산(大雪山)에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절벽에는 모두 곳곳에 오래된 말뚝 구멍이 서로 마주 대하고 늘어 서있었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을 쥐었다. 먼저 아래의 말뚝을 뽑아, 손으로 위의 말뚝을 더위잡고 기어올랐다. 계속해서 서로 바꿔가며 기어 올라갔다. 하루를 지내고야 가까스로 넘어왔다. 평지에 도착하여 서로 점검해 보니, 동료 열두 명을 잃었다.
계속 나아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에 예배하였다. 1년 남짓 계빈국에 머무르는 동안 범서와 범어를 배웠다. 이곳에서 범문(梵文)으로 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한 부를 구했다.
다시 사자의 입[師子口]이라 해석하는 신두나제하(辛頭那提河)에 이르렀다. 하천을 따라 서쪽으로 월지국(月氏國)에 들어가 부처님의 육계(肉髻)와 불정골(佛頂骨)에 예배하였다. 저절로 물이 끓어오르는 목방(木舫)을 친견하였다.
그 후 단특산(檀特山) 남쪽에 있는 석류사(石留寺)로 갔다. 그곳에서 머무르는 승려 3백여 명은 모두 3승(乘)의 교학을 배웠다. 담무갈은 이 절에 머물러 구족계를 받았다.
천축국의 선사 불타다라(佛馱多羅)는 중국말로 각구(覺救)라 한다. 그 지방에서는 모두 말하였다.
“이미 도과(道果)를 증득하셨다.”
담무갈은 불타다라를 초청하여 화상(和上)으로 삼고, 중국 사문 지정(志定)을 아사리(阿闍梨)로 삼았다.
이 석류사에서 머물며 석 달 동안 하안거를 하였다. 다시 길을 떠나 중천축국(中天竺國)으로 향했다. 길은 텅 비고 광활하였다. 다만 벌꿀만을 가지고 식량을 삼았다. 동행자 열세 명 가운데 여덟 명이 길에서 죽고, 나머지 다섯 명이 같이 다녔다. 담무갈은 비록 자주 위험을 겪었지만, 모시는 『관세음경(觀世音經)』에 생각을 집중하여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차차 사위국(舍衛國)에 이를 무렵, 들판에서 산 코끼리[山象]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은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신명을 다하여 가르침에 귀의하였다. 곧 수풀 속에서 사자가 튀어 나와, 코끼리떼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달아났다.
뒤에 항하(恒河)를 건넜다. 또 들소 한 떼를 만났다.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막 사람을 해치려 하였다. 담무갈은 귀의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윽고 커다란 솔개가 날아오니, 들소들이 놀라 흩어져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응하여, 위험에 처하여 구제 받은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뒤에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로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그가 겪은 일의 자취는 별도로 전기(傳記)가 있다. 그가 번역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은 오늘날 서울에 전한다. 후에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