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신문 `남대문 시장 220201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
남대문시장
- 남대문시장-칠패시장-연못골-상정승골-솔고개
남대문시장
- 남대문시장-칠패시장-연못골-상정승골-솔고개
숭례문 앞 저자가 이른 새벽 열리어
칠패 사람들의 말소리 성 너머로 들려 오네
바구니 들고 나간 계집종이 늦는 걸 보니
신선한 생선 몇 마리 구할 수 있겠구나
-다산 정약용의 시 <춘일동천잡시> 중
배오개와 종루 그리고, 칠패는
도성 안의 유명한 3대 시장이라네다.
온갖 공장(솜씨 좋은 장인)과 상인들이 많이도 모여들고
이문을 쫓는 만물화가 수레바퀴 돌듯 하네다.
-정조 때 중신 박제가의 <한양성시전도가>(漢陽城市全圖家)
남대문시장은 조선 초부터 뜨내기 장사치들이 비정기적으로 모여든 허름한 시장이었다. 그러다가 영조 2년, 1726년, 세곡 수납소가 이곳에 세워지면서 번창하게 된다.
남대문(숭례문) 주변은 조선 건국 때부터 인근 종로 시전행랑(市廛行廊)의 영향으로 크고 작은 장이 섰다.
본격적으로 시장 공간이 된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였다. 조선 후기 인문지리서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한양 장시(場市·정기시장)는 4곳. 현 종각 주변인 종루가상(鐘樓街上)과 종로4가 부근 이현(梨峴), 서소문 바깥 소의문외(昭義門外), 그리고 남대문의 칠패(七牌)였다. ‘배오개시장’이라고도 불리던 이현 장시와 남대문 밖의 칠패 장시는 각각 오늘날의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의 모태가 된다.
'칠패'는 원래 왕을 호위하던 어영청 소속 군인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초소가 남대문 근처에 있어 남대문시장을 칠패장이라 불렀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소금과 자기, 볏짚이나 싸리, 대나무 제품과 젓갈류를 많이 취급했다.
남대문시장 근처에는 관리들에게 봉급을 주던 선혜청(宣惠廳)이 있었다. 관리들은 근무처에서 지급받은 봉급표를 선혜청에서 쌀로 바꿨는데, 봉급 때가 되면 쌀을 바꾸러 온 관리들을 상대로 거래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면서 시장이 번창하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남대문시장을 '센청시장'이라고도 불렀는데, ‘센청’은 '선혜청'에서 나온 말이다.
난전(亂廛) 성향이 강했던 시장이 지금 위치에 정착한 건 1897년 도시근대화 사업의 하나로 선혜청 창고 터에 창내장(倉內場)이란 시장을 만들면서부터다. 현 남대문시장 A동과 B동 사이쯤이다. 선혜청 창고터에 있었기에 ‘창내’란 이름이 붙었다. 매일 새벽에 열리던 아침시장(朝市)과 구분되는 근대적 상설시장이 최초로 탄생한 것이다.
개항 직후라 해외 상인도 몰렸는데 1907년 기준 조선인 50%, 일본인 30%, 중국인 20%로 구성됐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시장 규모 2위였던 동대문시장보다 거래액이 2.6배 이상 컸다.
융성하던 시장도 일제강점기는 비켜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는 1914년 구식시장이라며 남대문시장의 해체를 시도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시장이 살아남은 건 친일파 덕분(?)이었다. 매국노 송병준(1858∼1925)이 운영하던 조선농업회사가 운영권을 따내며 허가 취소를 막은 것. 그 대신 엄청난 자릿세를 뜯어갔다. 이후 남대문시장은 일본인 전직 관료나 경제인이 관리하며 이권을 챙겼다.
광복 이후에도 고초는 이어졌다. 6·25전쟁과 1000여 점포가 전소한 1954년 대화재도 한몫했지만, 깡패조직 명동파의 지류였던 ‘엄복만파’가 상인들의 고혈을 짜냈다. 1922년생으로 알려진 엄복만은 대화재 때 전국에서 보낸 성금까지 착복할 정도였다. 1957년 서울시가 남대문시장 상인 연합회에 운영권을 이양하며 주먹들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50년대 말부터 남대문시장은 ‘양키시장’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며 발전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뭐든 구할 수 있고, 단속반을 피해 잽싸게 치고 빠진다는 명성을 얻었다.
1967년 동아일보 ‘횡설수설’은 “외국 언론이 (남대문시장을) ‘악마의 골목(devil's alley)’으로 번역해 소개했다”고 전했다. 월남한 실향민이 다수 정착해 ‘아바이시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1968년 남대문시장은 또다시 화재를 겪었지만 발 빠르게 회복하며 지금 모습으로 자리잡아갔다. 1980년대에는 주방용품 주단포목 공예품 골목이 형성되며 전문상가 중심 시장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1990년대부터 외환위기와 동대문시장의 성장으로 부침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과 영향력을 지닌 남대문시장은 한국을 상징하는 아이콘 중 하나이다.
남대문시장 근처에는 옛날에 여러 마을들이 있었다.
지금의 상동교회 근처에는 상정승골(상동=尙洞)이 있었다. 조선 인조 때의 상진 정승이 살았던 곳으로 지금의 남대문로1가, 남대문시장 근처다.
주변에는 솔고개(송현.松峴. 한국은해 부근), 수각다리(수각교.水閣橋. 신세계 백화점 자리), 창골(창동.倉洞. 시장 남쪽), 연못골(연지동.蓮池洞.남대문 밖) 등의 마을이 있었다.
상진 정승의 풍류가 깃든 솔고개
상진 정승은 지금의 남대문 시장 근처에 살았다. 상진 정승이 살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상정골이었고 한자로는 상동(尙洞)이라 했다. (지금 그곳에는 상동교회가 있디.)
그는 달 밝은 밤이면 근처의 솔고개, 지금의 소공동에 있는 남송현(南松峴)에 자주 올라 시상(詩想)을 살리곤 했다. 솔고개가 좋아 호를 '송현(松峴)'이라고까지 하였다.
상 정승은 누구보다도 달을 좋아한 듯하다. 그래서 그가 읊은 달 노래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는다.
'뉘 둥근 달이 하늘 위에 있다 하뇨
취해 보니 술잔 밑에 분명히 있네
잔을 기울이니 달 또한 내 창자 속에 드는구나
몸 안팎으로 달빛이 오가니 그 아니 좋은가
상 정승은 달이 너무 좋아 달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아예 달을 먹어 버렸다. 자기 생각으로는 달이 완전히 자기만의 것이어서 몸 속에 넣어 독점해 버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