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kritik)에 관하여] ㅡ kjm / 2020.8.14
한겨레, 안영춘 기자의, '비판이 피해자를 만났을 때'를 읽으며, 학부 때 칸트를 팠던 시절을 떠올리며.
'kritik der reine Vernunft' (크리틱 데어 라이네 페어눈프트)
순수 논리 이성에 대한 비판, 즉 '순수이성비판'이다.
여기서 '비판'은 "판다", 즉 "파헤친다", 다시 말해서 "끝까지 파고 든다"로 이해하면 된다. 그런데, 단, 전제는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만이다.
실생활에서조차 이런 지경이라면 대인 관계는 빵점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나간다. 누군가가 나를 끝까지 파헤치려 든다면 어느 누가 견뎌낼 수 있겠는가.
학문적이 아니라면, 그건 'praktische' 프락티셰, 즉 실천적인 문제가 된다.
칸트는 이마저도 '비판'하려 했다. 즉, 파고 들어 끝장을 내려 했다.
실로 3대 비판서를 읽어보면 실감이 난다.
어쨌거나, "비판이 피해자를 만났을 때"를 가정해 보자.
여기서의 '비판'은 학문적 탐구가 아니다. 실천적 관점에서, '옳음'과 '옳지 않음'을 분리해내는 일이다.
"옳지 않음"은 배리법으로 제거해 나가면서, "옳음"을 (당위)법칙적으로 찾아가는 일이 바로 '비판'이다.
'당위'는 "(보편적)인간으로서의 도리"에서 추출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에게 있어서나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라는 (간주관적)준칙으로 보완한다.
언듯 이해하기 쉽게,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거나 시키지 말라"는 공자의 말씀과도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최근의 피해자를 예로 들자면, 조국 전 법무부장관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 피해자 둘을 대표로 들 수 있겠다.
이 둘에게 '비판'이 가해지는 건 아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에 있어서만 비판이 들어선다. 비판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주목한다. 그리고 보편성과 간주관성의 (공정한)기준에서 판가름해 낸다.
무엇이 틀렸고 무엇이 옳은지를.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인신공격에 해당하므로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따라서 사건을 보는 '이성'의 판단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이라 안 하고 '비난'이라 한다.
조국과 그 일가에 대해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 나아가 그로부터 도덕적 규정을 시도하는 것을 감히 '비판'이라 이름붙일 수 없다. 단지 짐승의 무리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공격하는 야만의 모습일 뿐이다.
고 박원순 전 시장의 성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도 '비판'이라 이름붙일 수 없다. 단지 인간이 얼마나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의 실험장이 되어가는 것일 뿐이다.
'조국 백서'의 편찬이 그나마 '비판'의 범주에 들 수 있겠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비판'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왜냐하면 내재된 (불완전한)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칸트가 말하는 'reine'(순수)의 영역, 즉 논리적 이성의 재현이 무척이나 어렵다.
지금의 어지러운 상황을 표현한다면, "누구나 옳다. 그러나 누구도 옳지 않다."라고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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