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 대피소 함태식
전국의 산악애호가들은 거의 누구나 '노고단’이라면 곧 ‘함태식(成泰式)', 의 ‘함태식’하면 곧 '노고단’을 생각하게 된다.
등산이 점차 대중화된 70년대 이래 노고단에 한번이라도 올랐던 사람이라면 덥수룩한 수염과 깡마른 체구에 한 유난히 강렬한 눈빛으로 노고단 산장을 지키고 있던 함태식씨에 대한 인상이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더 노고단을 사랑하여 누구될을보다 먼저 노고단에 올라 17년 동안 하루도 변함없이 노고단을 지켜왔던 진정한 '노고단 사람’함태식씨. 그에게는 수많은 일화가 따르고 있지만 노고단에 대한 그의 사랑만큼 감동적인 일도 드물 것이다.
함씨는 노고단을 지킨 17년 동안 모든 등산객에게 한결같이 간곡하게 당부하는 말이 있었다. “조용히, 깨끗이!”가 그것이다. 산에 올라 떠들지 말라,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라도 꺾지 말며 소중히 여기고 자연에 감사하자. 그는 그야말로 물 밀듯이 노고단으로 몰려오는 그 수많은 등산객들에게 일일이 자신의 입이 마르고 닳도록 “조용히, 깨끗이!”를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함씨는 노고단이 좋아 노고단을 지키며 노고단에 살았다. 그는 노고단이란 자연세계의 아름다움과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를 뼈속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고단을 자연상태 그대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려고 했다. 그는 등산객들이 이 노고단을 ‘조용히, 깨끗이’ 보고 지켜줄 것을 갈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고단을 '시끄럽게, 더럽히는 사람에게는 가차없이 추상같은 호통을 쳤다. 그는 특히 카세트나 기타를 메고 올라 '기계소리’를 내는 것을 질색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그는 멋모르는 일부 젊은 층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모래 한줌씩 날라
함태식씨는 노고단 바로 아랫 마을인 구례에서 태어나 지리산 기슭에서 자랐다. 그는 국민학교 때 소풍으로 노고단에 올랐는데 경이의 자연세계와 외국인 선교사 별장이 어린 눈에도 감동적이었다. 그의 ‘노고단 사람'이 되고자 한 의지가 이때부터 가슴 깊이 심어졌던 것이다.
여순(麗順) 반란사건으로 노고단의 별장들이 잿더미가 되고 빨치산과 국군토벌대의 격전으로 노고단이 초토화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함씨는 가장 먼저 노고단에 올라 벽체만 남아있는 별장 한 곳을 택해 산장으로 복구하기로 했다. 그는 고심하던 끝에 구례중학교 교장을 찾아가 학생들이 노고단에 오를 때 섬진강 모래 한줌씩을 날라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당시엔 노고단을 찾는 학생이 적어 한줌씩 나르는 모래가 늘어나기는커녕 바람에 날려 오히려 줄어들었다. 낙심한 함씨는 노고단의 산장 건립 계획을 포기하고 구례를 떠났다.
연세대 철학과 출신의 함씨는 인천의 ‘조선기계'에 근무하던 71년 노고단에 40평짜리 단층 슬라브의 무인산장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직장에 사표를 내고 노고단으로 달려왔다. 70년대 들어 등산객이 늘어나자 한라산의 ‘용진각’ ‘남성대’ ‘입승정’, 설악산의 ‘장수대’ ‘백담’ ‘양폭’ ‘봉정’ ‘희운각’등에 이어 지리산에도 산장(대피소)이 건립된 것이다.
함씨가 노고단에 닿고 보니 세운 지 얼마 안된 산장은 유리가 모두 깨어져 있고 내부에서 불을 지펴 새까맣게 그을려 있는데다 실내에 쓰레기며 분뇨가 쌓여 악취가 진동했다. 함씨는 이 피폐한 산장을 보수하고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한 뒤 산장관리인을 자청하고 나서 72년 8월부터 이곳에 정착, ‘노고단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날이 어두워지면 산장 앞에 장명등(長明燈)을 내걸고 길 잃은 등산객들의 등대수가 되었으며 등산로 안내는 물론 조난객 구조작업에 헌신했다. 등산객은 늘어나도 등산에 무지(無知)한 사람이 많아 ‘하이포서미아(체온저하)’ 현상으로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소생시킨 것을 비롯, 인명구조 사례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몇해 전 여름, 기자가 함씨의 노고단 산장을 찾았을 때 그는 두세 사람분의 침상을 항상 비워두고 있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정을 넘긴 한밤중에 조난객 구조요청이 들어왔고 그 빈 침상은 의식을 잃은 환자를 뉘어 소생시키는 작은 진료소가 되었다.
함태식씨가 노고단의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굳히면서 등산객도 급격히 늘어났다. 함씨는 점차 조난객 구조가 아니라, ‘조용한 노고단’ ‘깨끗한 노고단’을 위해 모든 정력과 신명을 바쳐야 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노고단을 위해 그 자신은 조용하게 입만 다물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곧잘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일부 등산객에게는 함씨가 무섭고 거친 사람처럼 인상지어지기도 했다.
●호화산장에 밀려나
함씨는 80년대 들어 등산객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노고단의 자연훼손이 심각해지고 있음을 지적, 야영장 조성을 당국에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형 야영장은 물론 ‘무장비 등산'을 내건 3층의 현대식 호화산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들어설 줄을 그 자신도 미처 예측못했던 일이었다. 더욱 기막힌노릇은, “새 노고산장은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영이니까 당신은 노고단을 떠나시오. 당신의 구 노고단 산장은 철거를 할 거요”라는 것이었다.
88년 1월 9일, 새 ‘노고산장'이 준공된 것과 함께 함씨의 구 ‘노고단 산장’은 강제 폐쇄되었다. 17년 동안 노고단을 자신의 신체보다 더 소중히 지켜온 그에게 국립공단은 아무런 연고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노고단이 내 것은 분명 아니오. 하지만 거리의 구두닦이도 연고권을 인정해 주는데…. 누가 누구에게 노고단을 떠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까!” 17년 동안 노고단을 혼자 지켜온 함씨에겐 피눈물나는 비통함을, 그것도 그의 회갑을 맞이한 나이에 안게 되었다. 이 세상에 누가 함씨만큼 노고단을 '조용히, 깨끗이’지켜왔다고 나설 수 있는가.
국립공원관리공단도 뒤늦게 깨달음이 있었던지 함씨에게 '피아골 산장'을 관리할 것을 권유, 그는 새 산장이 들어선 지 20여일 만인 88년 1월 31일 정든 노고단을 떠나 피아골 삼거리의 산장으로 옮겨 가게 된다. 지금도 노고단을 찾는 등산객 가운데는 적지 않은 사람이 산장에 들러 “함태식 선생님 뵈러 왔습니다”며 그를 찾는다.
함씨는 그 스스로 ‘노고단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많은 산악인도 함씨가 진정한 ‘노고단 사람'이라고 지금도 변함없이 믿고 있다. 그렇다면 함씨에게 다시 노고산장을 지키게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에서도, ‘자연의 법칙’에서도 옳은 일임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출처:지리산 365일
첫댓글 https://m.blog.daum.net/sanijoen/18149209
2009년 2월28일 40년간의 산 생활을 정리하고 하산 하셨고 2013년 4월14일, 평생 지리산을 사랑했던 함태식(85)선생은 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