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호박꽃
내 고향은 호박꽃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고
일찍이 시집간 누나
인천, 숭의동에 살고
삐악거리던 동생들
종종거리고
삼거리 방앗간 집에
머슴을 가는 형,
그 형의 뒷모습을 보고
학업을 포기한 나는
찢어질 듯한 가난이나
원망하며 눈물짓고
호박꽃은 내 고향
나비 날아다니고
꿀벌 드나들더니
애호박이 열리고
늙은 호박이 되어
게국지를 끓여놓고
호박죽을 끓이는,
일식
누구 혹시 두 시진 넘게
입맞춤해 본 적 있는가?
달이 해를 가렸다고
모쪼록 들썽거리지 마라
까치발선 달의 입맞춤에
해도 질끈 눈을 감았다
울음의 변천사
갓난아기였을 때 기억 전혀 없지만 응애응애 울어본 적 있었을 게야
코흘리개였을 때 기억 희미하기는 해도 앙앙 울어본 적 있는 듯싶어
학창 시절 기억 모람모람 새롭기는 하지만 엉엉 울어본 적 있었던 게야
시쳇말로 황소 같은 눈에서 닭의 똥 같은 눈물 뚝뚝 흘리며 울었던 것 같아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몸에서 마음으로 옮겨 울었던 게야
돌이켜보면 소설처럼 영화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인 듯싶어
아홉수인 예순아홉에 이르자 다시금 마음에서 몸으로 옮겨 울고,
언어 장애도 아니면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듣기만 하던 귀가 우는 게야
이명이 골치 아픈 병이라더니 깊은 밤이면 더 크게 우는 것 같아
지금 나는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내 귀의 울음을 온전히 듣고 있는 게야
박만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 전문가과정 수료
1987년 <<심상>> 등단
시집<<접먹을 생각하며>> <<오이가 예쁘다>> <<붉은 삼각형>>
<<단풍잎 우표>> <<먹물>>
*<<울음의 변천사>>는 박만진이 태어나고 자라난 스산(서산)의 변천사이자 한 가계의 슬픈 변천사이고,
상처난 기억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하는 화자 자신이 지닌 서정의 변천사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할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