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었는가
홍안(紅顔)을 어디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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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 명종 4년)는 전남 나주(다시면 회진리)출신으로 39세로 별세(선조 20년)한 조선중기 천재적 풍류시인이며 명문장가이자 문학가이다.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겸재(謙齋)·풍강(楓江), 소치(嘯痴)·벽산(碧山)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고집이 있는 그는 조선 중기 붕당정치로 혼란스러운 정치와 현실상황을 개탄하며 벼슬도 마다하고 호방한 성품으로 명산을 유람하다가 고향인 회진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평소 사대주의에 매우 회의적이었던 강골의 임제는 그가 죽기 직전 다음과 같은
임종시(臨終詩)인 ‘물곡사(勿哭辭) /곡을 하지 마라’라는 글을 처자에게 유언한다,.
四海諸國未有能稱帝者獨載邦終古不能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
사해의 여러나라들이 황제를 일컬어 보지 않은 나라가 없거늘
우리나라만 예로부터 그래보지 못했다
이와같은 나라에 태어났거늘
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해할 것 있느냐
곡을 하지 말라
-白湖林悌 臨終 誡子 勿哭辭(백호임제 임종 계자 물곡사)-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었는가
홍안(紅顔)을 어디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는고
잔(盞) 잡아 권(勸)하는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유명한 기녀였던 황진이(1506~1567)가 인생 사십에 병에 걸려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하여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는데,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때 고대했던 만남을 바랬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기예(氣藝)가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고, 황진이의 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다. 이후 조정에서 사대부가 기생에게 술을 올리고 그를 기리는 시를 지은 것을 문제 삼아 탄핵해 파직에 이르게 만든다.
영모정(永慕亭)은 임붕(林鵬, 1486~1553)이 중종 15년(1520)에 지은 정자로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이라 하였으나 명종 10년(1555)에 후손이 다시 지으면서 영모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임붕의 손자인 조선시대 명문장가 백호 임제가 시(時)를 짓고 사람을 사귀었던 곳이기도 하다.
백호(白湖) 임제는 39세로 요절한 조선시대의 유명한 문장가이다.
호방한 기개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에 버금갈 정도였으며 가전체 소설을 비롯, 7백여수의 한시와 시조 6수를 남겼다.
그가 남긴 시조들은 대부분 여인들과 이룬 사랑의 문장이었다.
임제는 기생 한우(寒雨)를 좋아했다.
한우는 재색(才色)을 겸비해 시와 글에 능했다.
또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는데 뛰어났고 노래 역시 절창이었다고 한다.
임제와 한우는 술자리에서 몇 번 만났다.
시를 논하면서 술잔을 나누다가 임제가 노래를 부른다.
북천(北天)이 맑다해서 우장없이 나섰더니 산에는 눈이오고 들에는 찬비(寒雨)가 내린다.
오늘은 찬비를 맞았으니 얼어 잘까하노라”
북쪽하늘이 맑아서 비옷도 준비하지 않고 길을 나섰더니만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가 내리더구나.
오늘 차가운 비를 맞았으니 얼은 상태로 자야겠구나.
찬비는 기생 한우(寒雨 찬비) 바로 앞에 있는 기생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우가 이 노래를 듣고 즉시 화답한다.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로 얼어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두고 얼어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왜 얼어잡니까
무슨 일로 언채로 주무십니까
원앙요와 비취 이불이 여기 다 있는데 무슨 일로 추운몸 그대로 잡니까
말도 안되는 말씀 마시고 오늘 나를 만났으니 당신의 찬몸 녹이고 주무시지요
이렇게 답한 것이다.
임제는
한량이요, 풍류를 아는 남자였다.
찬비(寒雨)를 맞았으니 언채로 잘까하고 넘겨짚은 것은 네가 맞아주지 않으면 혼자 고독하게 잘 수 밖에 없구나
어쩔래 하는 남자의 응큼한 복선(伏線)이 깔려있었다.
그러자 한우는
오늘 나(寒雨)여기 있는데 그럴 필요가 뭐있소.
함께 정열을 불태워 언몸을 녹이면 될 것을 하고 호방하고 정겹게 마음을 열어준다.
과연 누가 이같은 표현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수 있을까.
이렇게 서로의 뜻을 확인한 남녀의 밤은 정말 뜨거웠을 것이다.
말을 알아 듣는 꽃, 해어화(解語花).
우리조상들은 직설적 화법보다는 은유적 화법에 통달한 언어의 달인(達人) 들
이었다.
한우는 일개 기생이 아니었다.
당대의 문인이요
대단한 풍류남을 상대해 이렇듯 교묘하게 받아넘길 수 있는 정열의 시인이었다.
한우는 정말 정많고 순발력있는 여성이었다.
그런 어른들이 살았던 이 나라 세태가 이렇게각박해 졌는지...
손님을 봉으로 밖에 보지 않는 술집문화여,
감정조차도 마를대로 말라버린 세상이 아쉽고 또 아쉬울 뿐
이다.
임제와 기생 일지매(一枝梅)
와의 로맨스는 유명한 이야기다.
일지매(一枝梅)는 색향으로 이름난 평양의 명기였다. 그녀는 용모자태와 문장가무가 뛰어났는데, 그런 만큼 성품이 매우 도도했다. 부(富)도 권력도 그녀를 사로잡을 수 없었다. 뭇 남성들의 희망의 대상이었다.
어느 해 여름, 임제가 평양에 들렀다. 일지매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자신의 시재를 동원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남루한 옷차림(생선장수의 차림)으로 황혼 무렵 그녀의 문전에 이르렀다. 몸종과 생선을 흥정하는 체하며 시간을 끌어, 그 집 문간방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그는 홀로 쓸쓸한 방에서 팔을 베고 누워 생각에 잠겼다. 때마침 교교한 달빛이 휘영청 창살을 밝혔다. 그때 낭랑한 거문고 소리가 달빛을 타고 흘렀다.
주연(酒宴)의 은성함에 비해서 홀로 있는 밤은 일지매에게 못견디게 외로움을 안겨 주었다. 자신의 생활이 후회스러웠다. 한 가정의 주부이고 싶었다. 한 남편의 아내이고 싶었다. 두 남매의 어머니이고 싶었다. 엄습하는 고독이 그녀로 하여금 거문고를 희롱하게 했다. 적막한 달밤의 거문고 소리는 유난히 청아했다. 그 소리가 임제의 방에 들린 것이다.
임제에게 때는 온 것이다. 그는 허리춤에서 피리를 꺼내 거문고 소리에 화답했다. 절세의 화음이 여음을 남긴다.
놀란 것은 일지매. 자신의 거문고 소리에 화답한 사람은 누구일까? 일지매는 끌리듯 뜰에 내려섰으나 기척도 없다. 담장 너머를 쳐다보며 기웃거려도 사람의 그림자도 없다. 그냥 섬돌 위에 올라서는 일지매.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며 탄식이 새어 나온다.
"원앙금을 누구와 함께 잘까...."
일지매의 독배.
"나그네의 벼갯머리 한 끝이 비었는데...."
임제의 대구(對句)다.
일지매는 다시 한 번 놀란다. 문간방에 든 사람은 생선 장수였는데, 틀림없는 생선장수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녀는 문간방 앞으로 다가가며
"어인 호한(好漢)이 아녀자의 약한 간장을 녹이는고...."
새옷을 갈아 입은 한량과 술상을 사이에 둔 일지매! 정담(情談)과 화창으로 밤 가는 줄 모른다.
또 하나의 일화. 한 번은 임제가 좋아하는 기생에게 부채를 선사하였다. 부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엄동에 부채를 선사하는 이 마음을
너는 아직 나이 어려 그 뜻을 모르겠지.
그리워 깊은 밤에 가슴에 불이 일거든
오유월 복더위 같은 불길을 이 부채로 시키렴.
막괴융동증선지(莫怪隆冬贈扇枝) 이금년소기능지(爾今年少豈能知)
상사반야흉생화(相思半夜胸生火) 독승염증육월시(獨勝炎蒸六月時)
엄동설한 추운 겨울에 부채를 보내는 심사는 심술궂지만, 그 차원 높은 역설의 논리엔 정회(情懷)와 낭만(浪漫)이 넘친다. 정녕 그리운 정경이다.
임제는 풍류한량에 장분방한 시인으로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호방한 성격에 시, 술, 검과 퉁소를 좋아했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여인이 있고, 술이 있고, 시가 있었다. 모르는 기생이 없고 안 가본 색주가가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발길이 가지 않은 명승이 없었고 산수로 오유하며 풍류속에서 살았던 그를 당대 사람들은 기이한 인물로 평했다고도 한다.
시성(詩聖) 임백호(林白湖)를 추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