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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과 현실》 2020년 상반기호 <내가 읽은 시조>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시조, 현실 속 가능성을 사유하게 하는 시조
우은진
자본주의 시스템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사회는 우리 삶의 대부분이 돈으로 교환되거나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넓게 퍼뜨린다. 존재와 삶의 가치는 시장의 잣대로 계산되고, 사람 사이의 이해, 존중, 관계를 바탕으로 한 방식들은 자본의 논리로 대체되곤 한다. “혼자서 열악한 일터 지키다가 쓰러졌”던 “스물네 살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군”, “구의역 김 군”(박시교, <우리 모두 죄인이다·2>) 등의 안타까운 사고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경제적 효율성을 내세워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를 느끼곤 한다. 그러면서도 택배로 배달되는 상품이 “당신”으로 물신화(物神化)되는 동안, 그것을 “현관까지만 배달하고” 오는(박명숙, <택배>) 일을 하루에도 수백 번씩 반복해야 하는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소비사회 시스템의 속도와 지속을 위한 수단과 같은 존재로 밀려나기도 하는 현실이 일상 아래 깔려 있는 우리 생활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차에 치인 노루”처럼 기계의 속도에 의해 “목숨”을 잃은/잃어가는 존재들이 있어도 “한 방울 슬픔 없이 보험료가 계산되”는, 즉 생명의 존엄과 삶의 가치가 시장의 잣대로 판단되고 그렇게 해서 정해진 금액만으로 존재의 죽음이 충분히 보상될 것이라 하는 세계에서 문학은 “울먹”이는 “서녘 놀”을 말함으로써 냉혹한 사회에 애도의 정서와 사유를 불러오는/더하는 시선을 만들어낸다.(이승은, <그해 여름>) 이는 자본 권력의 계산에 의해서든, 시인의 자기반성 차원에서든 “멋쩍은 트림 같은 걸/ 시입네”(이승은, <탈고>), 글입네 쓰고 있다고 여겨지더라도 우리가 문학을 해나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의미 중 하나이다. 이러한 문학의 역할과 의미를 《서정과 현실》 2019년 하반기호에 수록된 시조들을 조금 더 자세히 읽어보며 생각해보려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 굳게 새긴 마음무늬
또렷했던 그 무늬 햇살 따라 풀어져서
닳도록 믿고 싶었던 기억마저 흐려져서
내가 나를 증명 못한 한순간 뼈저리다
번번이 거절당한 낡은 지문 밖에서
시간은 또 누구 편에서 손 흔드나, 해맑게
―김미정, <지문> 전문
김미정 시인의 시조 <지문>은 점점 닳아가는 신체와 그로 인해 밀려나는 현실을 슬며시 돌아보게 한다. 사회 시스템은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강령에 따라 살아가다 보면 일정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얼핏 “햇살” 같아 보이는 꿈을 사람들에게 기입해 놓는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지문’이 “닳도록” 일을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었던 혹은 “믿고 싶었던” 개인들의 “기억”은 자본 권력이 조절하는 속도와 움직임에 맞춘 노동 패턴을 따르는 동안 “흐려”진다. 그 과정에서 개인들은 불공정한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실현되기 쉽지 않은 믿음을 주입하고 부추긴 부조리한 시스템의 영향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기존재마저 잊게 된다. 자기존재가 “닳도록” 노동을 한 결과는 “낡은 지문” “내가 나를 증명”하지 못하는/할 수 없는 아이러니, “번번이 거절당”하는 현실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나’의 존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판단에 따라 규정될 뿐이며, 그 안에서 ‘나’의 “마음무늬”, 주체성은 왜곡 또는 상실되어간다. 이때 사회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정한 듯 “해맑”은 표면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욕망과 법칙을 보이지 않게 통제함으로써 우리 일상의 “시간”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감추고 있다.
혼밥 먹고 혼술 마시며 늘 헤매던 그 사람
흔들리는 가지 끝에 후조처럼 앉았다가
먼 벼랑, 건너 건너서
한 점 섬이
되었다
―서일옥, <섬> 전문
서일옥 시인의 <섬>은 현대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개인의 모습을 “한 점 섬”으로 비유하고 있는 시조이다. “혼밥”과 “혼술”은 자유롭게 선택한/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생활방식일 뿐이겠지만, “흔들리는 가지 끝”밖에 차지할 수 없는 사람들, 그 불안정한 자리에조차 충분히 머무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을 위해 인관관계를 포기한 채 홀로 “헤매”는 외로운 생활, 고립감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다른 시인들의 시조에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이해될 수 있다. “목구멍을 달”랠 “밥” 한 그릇을 마련하기 위해 “굽은 등”, “달달 떨”리는 “오금”으로도 “새벽같이 길바닥을 눈 뒤집고 살피”며 “빈 병 하나 박스 하나”를 줍는 노인의 목소리(김덕남, <한 끼>), 재개발 바람에 “홀씨는 날려 보내고 지팡이만 남”은 노년의 풍경(정희경, <민들레 경로당>), 시간에 쫓기는 일과 속에서 바쁘게 끼니를 때우기 위해 마련해두었던 “컵라면”을 유품으로 남기게 된 “비정규직 청년”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이때 문학은 소외된 계층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외면하는 사회 시스템과 그에 의해 밀려난/밀려나고 있는 개인들에 대한 사유와 사유방식을 우리에게 건네는 언어로서 존재한다. 그와 동시에 문학은 공고해져 벗어나기 어려운 사회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생각과 길을 열어가며 살아가야 할/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끔 하는 공간으로서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너는 내게 증거다 안녕의 저울이다 빛들의 연한 잠을 무반주로 낮게 깔고 심장이 들썩하는 사이 질주하듯 다가왔지
내 진한 오후가 뜨겁게 출렁일 땐 너를 위해 노래하고 경배도 올렸지 사랑할 그 순간을 위해 눈물샘도 말렸지
이마를 긁적이던 구부정한 저녁답엔 숲속을 배회하던 노을빛이 달려와 귀 붉은 서녘 들 밟고 너를 위해 기도했지
―우은숙, <오늘> 전문
우은숙 시인은 시조 <오늘>을 통해 자기 삶의 아침, 오후, 저녁을 선명하게 느끼며 ‘나’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기 위한 자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시조의 발화주체는 우선 자신의 ‘오늘’을 생명력 있고 대화할 수 있는 ‘너’로 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한 ‘나-너’의 관계를 바탕으로 ‘너’라는 ‘오늘’이 ‘나’에게 다가와 ‘나’의 “안녕”을 증명해준다면, ‘나’는 ‘나’와 상호소통 가능한 ‘나’의 ‘오늘’을 위해 움직이고 생각한다. 그러한 발화주체의 말에 따르면, “질주하듯”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나’의 “심장이 들썩하는” 감각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때, 그 ‘오늘’의 순간을 통해 ‘나’는 자신의 “안녕”을 스스로 재고(“저울”) 확인할(“증거”)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눈물샘”을 말려야 하는 상황도 ‘나’의 ‘오늘’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하여 “사랑할 그 순간”이라는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희망할 수 있을 때, 진정하게 ‘나’가 선택한 인내가 될 수 있다. 또한 불확실한 현실도 “뜨겁게 출렁”이는 변화가능성의 의미로 바뀌어갈 수 있다. 그리고 “구부정”히 지친 “저녁”에도 “이마를 긁적이며” ‘오늘’을 반성할 수 있고, “배회하”듯 떠돌던 다른 존재들과 함께 서로를 위해 혹은 ‘우리’의 ‘오늘’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때, ‘오늘’은 ‘나’ 또는 ‘우리’를 위한/에게 속한 시간이 될 수 있다.
근심 걱정 다 던지고 줄기찬 함성 찾아
산의 정기 한 아름씩 가슴 뿌듯이 맞는 날은
좀처럼 돌아설 수 없는 포용 속에 잠겼다
계절이 바뀌어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친 나날 일깨우며 일관되게 고해주는
그 울림, 그리움을 새기는 못 잊을 절규였다
― 김교한, <회상의 완월폭포> 전문
김교한 시인의 시조 <회상의 완월폭포>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변화가능성의 ‘오늘’을 만들 수 있는 연대와 저항의 힘에 대해 사유하는 발화주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산 완월동은 3.15의거, 부마민주항쟁 등의 역사와 관련된 장소이다. ‘지금-여기’의 “근심 걱정”을 “던지”기 위해 무학산을 찾은 발화주체는 ‘완월폭포’의 물줄기 앞에서 그 역사의 “줄기찬 함성”을 회상한다. 그 “함성”은 부조리한 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의지이자, 당대와 현재의 민중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정신이다. 발화주체에게 그 “함성”의 정신은 “계절이 바뀌”고 시대가 달라져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울림”으로 인식된다.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끔 “지친 나날”의 이면과 원인을 고발하듯 “일깨”워주는 “울림”, 저항의 의지를 그리워하게 하는 “못 잊을 절규”로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민중의 항쟁을 통해 개선된 사회라 할지라도, 더 교묘한 방식으로 유지되는 불공정한 시스템, 그리고 현 사회의 고착화 과정 또는 결과로 인해 재생산되는 부조리한 시스템 등을 완전히 막거나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 직시의 시선과 변화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 시스템의 논리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는, 그래서 ‘변화가능성’의 힘을 내재하고 있는 ‘나’와 ‘오늘’을 만들어갈 수 있다. 이때 문학은 ‘나’의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가운데, 다른 이들의 삶과 죽음, 목소리를 돌아보게 함으로써, 사유와 연대의 힘을 깨닫게 해준다. 또한 실패하거나 좌절하기 쉬운 사회에서 “단단한 안의 것 더 깊이 쏘아 올리려” 떨어지는 중이라는 전환적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시인들은 당장 전해지지 않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더라도 “소지(燒紙)로 날리”듯(강현덕, <꽃지 해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언어를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놓아두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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