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핵심가치는 자유주의다.”라고 하는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국인 모두는 자유주의에 대한 학습을 반드시 하여야 합니다.
자유주의는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가 아니어서 그것에 대한 학습을 체계적으로 하여야 하는데, 학생들에 대한 학습은 교육감이 수행하고 일반인에 대한 학습은 시민단체가 수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통상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와 신자유주의(neo liberalism)로 구분하는데, 고전적 자유주의에 대하여서는 협의와 광의로 나눌 수 있다고 본인이 설명드린 바가 있으며 이번에는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 신자유주의에 대한 좌파의 비난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좌파의 용어전술에 의하여 이미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는 좌파는 그 핵심전략으로 통일전선전략과 진지전전략을 구사하고 있고 실행전술로는 용어전술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좌파의 용어전술은 참으로 교묘한 것이어서 학습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대중은 그에 휘말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좌파의 용어전술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좌파를 진보라 부르고 우파를 보수라 부르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참된 가치로 인식시킨 것도 좌파의 용어전술의 하나입니다. 그 외에도 친일프레임이나 극우프레임도 모두 좌파의 용어전술인 것입니다. 윤대통령을 내란수괴라 부르는 것도 용어전술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좌파의 용어전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불평등을 낳은 원흉이라고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1980년대 이후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심화시킨 주범이 바로 신자유주의라고 하면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제3의길’이나 ‘자본주의 4.0’ 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들으면서 신자유주의는 21세기에는 맞지 않는 사상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한마디로 버릴 수 있는 사상이 아닙니다. 본인은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고개가 숙여지게 되고 더욱 공부를 하여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3. 신자유주의를 실천한 정치인
신자유주의에 대하여는 그것을 주장한 학자와 그것을 실천한 정치인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실천한 정치인으로는 영국의 대처수상과 미국의 레이건대통령이 가장 유명합니다. 대처수상과 레이건대통령에 대한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1) 마가렛 대처 수상
대처는 1979년 5월부터 1990년 11월까지 11년 반 동안 집권하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대처 이전의 영국은 케인스주의로 인한 국가개입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노조가 사실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풍토였습니다. 노조의 합의를 얻지 못하면 어떠한 정책도 펼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1978년 겨울에는 공공노조의 총파업으로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 되어 거리에는 쓰레기가 넘쳐나고 중환자들이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쫓겨나며 죽은자들이 매장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영국인들은 불만의 겨울을 겪은 후 더 이상 노조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아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것이 대처를 선거승리로 이끌면서 수상으로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처는 집권하는 동안 모두 세 번의 전쟁을 치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첫째가 포클랜드전쟁 둘째가 탄광노조와의 싸움 셋째가 복지에 물든 국민들과의 싸움이었습니다. 대처는 그 세 번의 전쟁에서 물러서지 않는 투지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대처는 1년간에 걸친 탄광노조와의 씨움에서 승리한 후 노동법을 개정하여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고, 대규모의 민영화와 주식공개를 통하여 중산층을 양성하였으며, 복지의 축소를 통하여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의존문화를 근절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풍토를 조성하였습니다. 대처 이후 세계사는 사회주의와 복지확대의 물결에서 벗어나서 경쟁을 통한 번영에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처리즘이라는 정신혁명이었습니다.
(2)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
2차대전 이후 세계는 한편으로는 공산화의 물결이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개입과 복지 확대의 물결이 휩쓸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케인스주의를 바탕으로 국가개입의 비중이 점점 늘어났습니다. 1964년 대통령선거는 복지확대와 소수자의 인권확대를 앞세운 민주당의 존슨과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규제개혁과 감세정책을 내세운 공화당의 골드워터의 대결이었는데 레이건은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선거는 존슨의 압승으로 끝났으나 레이건은 그 연설로 얻은 지명도로 1967년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되었고 1981년 현직 대통령인 카터를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레이건이 대통령이 된 후 내세운 정책의 핵심은 ‘작고도 강한 정부’였습니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줄이고 기업에 대한 감세정책을 펴면서 시장경제가 활성화되도록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노조의 불법행동에 대하여는 엄격한 법적용을 하여 법치주의를 확립하였습니다.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 8월에 항공관제사노조가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면서 불법파업을 하였습니다. 레이건은 48시간내에 업무복귀하지 않으면 전원해고하겠다는 예고를 하였고 실제로 업무복귀하지 않은 11,359명(87%) 전원을 해고하였으며 동일업종에의 재취업을 영구적으로 불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항공관제사노조는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한 노조였으나 레이건은 엄격한 법적용을 관철시켰고 그것이 미국에서 노조의 불법행동이 사라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세 학파
1980년대에 등장한 대처와 레이건으로 세계사는 대변화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국가개입을 강조한 케인스주의는 쇠퇴하면서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시장경제가 회복되었습니다. 대처와 레이건의 정책이 나오게 된 이론적 배경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였습니다.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학파로는 통상 오스트리아학파, 시카고학파, 질서자유주의학파의 세 학파를 꼽습니다.
(1) 오스트리아학파
오스트리아학파는 신자유주의를 이끈 대표적인 학파라 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학파에 속하는 이론가로는 창시자 멩거부터 미제스, 하이에크, 라스바드, 커즈너, 호세 등을 꼽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하이에크입니다.
하이에크는 1930년대부터 대공황의 원인과 해결방안에 대하여 케인스와 격렬한 토론을 전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 당시 토론의 승자는 케인스였고 그후 자본주의세계는 케인스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하이에크는 한동안 잊혀졌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고 1989년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1991년 소련의 해체로 공산주의가 붕괴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이 실현되었습니다.
하이에크의 저서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44년에 발간한 “노예의 길”입니다. 그 저서는 하이에크가 자신의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일찍이 겪었던 전체주의의 물결이 2차대전 도중에 영국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보고 경고를 한 책입니다.
하이에크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무지를 인정하고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경쟁은 각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암묵적 지식을 발견하는 과정이므로 경쟁이야말로 사회를 다양하게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본인은 하이에크를 “20세기의 소크라테스”로 부릅니다. 종교를 창시하지 않았으면서도 너 자신을 알라고 하면서 무지의 인정을 통한 지혜를 가르쳤던 소크라테스가 세계 4대성인의 한명으로 인정받듯이 하이에크는 “20세기의 현자”로 추앙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를 한국의 현실에서 알리려 한 대표적인 사상가는 민경국교수입니다. 한국에서 우파운동을 하는 모든 지도자들은 민경국교수와 하이에크의 저서들을 통하여 스스로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생적 질서인 시장경제의 위대함을 발견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시카고학파
윤석열대통령이 언급하였던 밀턴 프리드만이 시카고학파의 대표이며 조지 스티글러, 프랭크 나이트, 로널드 코즈 등을 시카고학파의 인물들로 봅니다.
프리드만의 대표적인 저서는 1962년에 저술한 “자본주의와 자유”로 그는 시장경제이론에 공헌한 공로로 1976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프리드만의 저서 중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책은 1980년에 저술한 “선택할 자유”로 그 책을 윤대통령이 자주 언급한 것입니다.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20세기의 미국에서 사용되는 “자유주의(liberalism)”라는 용어가 복지와 평등을 지향하는 정부 개입의 확대를 요구하는 용어로 잘못 사용되는 것을 한탄하고 정부 권한을 축소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는 원래의 의미로 사용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자본주의와 자유”가 개인의 자유와 시장경제를 신뢰하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원칙적인 측면을 강조한 총론이라고 한다면, “선택할 자유”는 각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한 각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리드먼이 제시한 정책의 예를 들면 소득계층간의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제도로 “부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를 제시한 것과 학부형에게 학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바우처제도”를 제시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3) 질서자유주의학파
신자유주의를 선도한 학파는 오스트리아학파이고 그것을 미국에서 정책으로 실현시킨 학파는 시카고학파라 할 수 있지만, 1930년대부터 실질적으로 정책으로 반영된 것은 케인스주의로 그때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정부개입은 계속 확대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이에크와 프리드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대처와 레이건의 정책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서독의 질서자유주의학파는 2차대전이후부터 바로 정책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을 실현한 정치인은 에르하르트였고 이론가는 오이켄과 뢰프케였습니다. 오이켄은 히틀러의 나치정권말기에 전체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시장경제를 내세운 질서자유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의 핵심은 정부의 역할은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는 것에 한정하고 민간의 경제활동 그 자체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이켄의 질서자유주의는 라인강의 기적을 낳은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것을 달리 “사회적 시장경제”로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오이켄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동료교수들과 질서자유주의를 제시하였으므로 그들을 “프라이부르크학파”로 부르기도 합니다.
5.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차이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모두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작은 정부를 내세운 것은 동일하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개입주의를 겪은 후에 나온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적인 성격이 강한 고전적 자유주의에 비하여 법치를 강력하게 세운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처와 레이건 모두 국가의 안위를 위협하는 외적에 대하여는 강력한 국방력을 강조하였고, 내부적으로는 특히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무관용의 법치를 실현하였습니다.
6.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적용
신자유주의는 좌파의 용어전술에 의하여 불평등의 원인이 된 시대착오적인 사상이라는 누명을 쓰면서 이미 상당히 오염된 용어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론화한 오스트리아학파, 시카고학파, 질서자유주의학파의 석학들의 저서를 한권도 제대로 읽지 않은 이들이 그렇게 매도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본인은 신자유주의의 이론가 중 가장 뛰어난 이는 하이에크이고 하이에크의 자유주의를 한국의 대중에게 가르친 대표적인 이는 민경국교수라고 생각합니다. 하이에크와 민경국교수의 저서 전부를 읽고난 후 좌파의 용어전술을 깨뜨리고 한국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숙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육감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을 갖춘 후 초중등교육과정에 자유주의를 어떻게 심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입니다.
2025. 2. 18.
글쓴이 : 자유시민연합 대표 최태열. 010-3219-8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