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항) 장애’의 모든 것
같이 교사로 출발했었던 학교 동기동창을 서울 바닥에서 우연히 만났다. 반세기 만이다. 그가 화들짝 놀라는 표정이더니 묻는다. 내가 공황장애를 앓는다는 소릴 들었는데, 괜찮으냐고. 난 너털웃음을 터뜨리곤, 그에게 바로잡아(?) 주었다.‘공황장애’가 아니라 ‘공항장애’라고.
최순실 씨의 공황장애 때문에 전 방송과 신문이 떠들썩하다. 그가 청문회엔가 어딘가에 불출석하면서, 그 사유로 ‘공황장애’를 ‘공항장애’라고 썼다는 것이다. 나로선 아무리 봐도 그게 그건데….
내겐 그렇게 코웃음 쳐도 될 근거가 있다.. 낯선 땅에 올라오자마자 정신 의학과 의원부터 찾아갔었다. 출입문 대형 유리판에, ‘불안증’ ‧ ‘우울증’ ‧ ‘조울증’ 등이 어지럽게 적혀 있는 가운데 유난히 눈에 띄는 게 있다. 바로 ‘공항장애’! 나는 정색을 하고 원장에게 왜 저런 잘못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나더러 날카롭다고 감탄한다. 개업한 지 오래지만, 자신도 모른 채 지내왔다나? 게다가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끝이었다. 그 뒤로도 몇 번 가봤으나, 고쳐지지 않았다.‘공황장애’가 아니고 ‘공항장애’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하니 ‘공황장애’나, ‘공항장애’나 그게 그거다. 원장이 고집하는데, 내가 무슨 이의를 걸랴.
몸서리쳐지는 고백인데 나 자신 그 공황장애(공항장애)를 앓았었다, 20여 년 시골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대도시에 들어오니, 적응하기조차 힘들었었다. 돌파구가 있었으니 문학/ 노인학교/ 유네스코/ 노래/ 군부대 등이었다. 가족을 버리고(?), 노인학교에 뛰어든다. 토요일을 송두리째 반납했다. 미친 짓이었으리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그러다 경로잔치를 몇 시간 앞두고 한지 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거기에서 페니실린 쇼크까지 받을 줄이야!
그로부터 병마에 시달려왔다. 소위 공황장애, 아니 공항 장애의 전조에 시달린 것이다. 그 증상은 이렇다. 꼭 죽을 것만 같다.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사람이 두렵다. 빈맥(頻脈)이 하루에도 여러 번씩 나타난다. 식은땀이 전신을 흠뻑 적신다. 누워서도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어지럽다.
그런 세월과 씨름했다. 어느 날 6학년 아이가 내 방(교장실)에 오더니, 실신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아이는 유명을 달리했다. 병원으로 달려가는 중, 맥박수가 130번 이상 치솟더니 떨어질 줄 모른다. 우황청심원을 먹어도 가슴 두근거림이 멎지 않는다. 수면제를 서너 알씩 털어 넣었는데도 눈 붙이기조차 힘들었다. 엄청난 공포와 실의, 좌절감이 엄습했다. 그야말로 공황 장애의 늪에서 허우적댄 것이다.
한데 난 지난날 겪은 아이 넷의 죽음이 준 충격까지 유령처럼 나를 괴롭혔다. 교사 때 내 반 아이가 둘 죽었었다. 각기 쇠죽솥에 빠졌고, 지나가는 트럭에 치였다. 내가 직접 책임질 일은 아니어서 그냥 넘겼다. 초임 교감 때 일주일 새에 두 명이 비명횡사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물에 빠졌다. 이번엔 달랐다. 학교장이 서울에서 연수중이었으니까. 학교 밖 사고지만, ‘도의(道義)’라는 책임은 내 몫일밖에.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고 다녔다.
돌이켜보면 모두가 허상이다. 공황장애든 공항장애든 그게 무슨 대수이랴. 나는 앓았었고, 지금은 나았으니, 왼소리 즉 죽었다는 소문을 자신이 안 듣는 것만으로도 다행하게 여기자. 다만 밝히고 싶은 게 있어, 긴 사연을 압축하여 표현하려 할 따름이다.
그 옛날 발병 앞뒤로 나는 녹차에 미쳐 있었다. 김대철 한국여천차문화원장을 사사했고, 나름대로 연구를 했지만, 난 ‘과유불급(過猶不及)’에 대비하지 못했다. 내친김에 적어 보자.
나는 무모하게도 ‘차인(茶人)’이 되고 싶었다. 시조창(사설시조) '팔만대장’을 부르면서 차를 마셨고, 눈물을 주르르 흘릴 경지(?)까지 도달했으나, 거기가 변곡점이었다. 삶을 한 차원 높게 끌어올리려는 의욕이 되레 무지(無知)로 변해 날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을 줄이야! 난 내 방(교장실)을 마치 전통 찻집처럼 꾸미고, 어린이며 직원들은 물론 때론 나그네에게 풍성하게 녹차를 대접했다. 정형근 ‧ 허태열 의원 내외, 배학철 시의회 부의장 및 권익 ‧ 배상도 청장, 이태효 교육장 등도 단골(?)이었다.
내 ‘끽다(喫茶)’ 생활은 극성으로 치닫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만 일곱 회 곱하기 3, 하루 스물한 잔 내외, 거기다가 두 번씩의 茶積(차를 워낙 좋아하는 나머지 차 잎을 씹어 먹음)을 거르지 않았다. 차에도 다량의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난 때로 뻐기며 그 짓거리를 해댔다. 참으로 가관 아니고 무언가? 모든 세포가 이미 카페인에 침식되어 있을 때 소리 없이 공황장애가 나를 덮쳤다는 표현도 가능하리라.
어느 누구의 충고를 듣고 찻잔을 멀리하자, 내 몸은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밤낮으로 매달려 부른 복음 성가 ‘살아 계신 주’도 그 절묘한 시점에서 내 손을 들어 주었다. 나는 하릴없는 사람처럼 정약용의 유명한 허언(?)을 곱씹곤 하며 쓴웃음을 날렸다. 차를 마시는 사람(국민)은 흥한다?
그로부터 몇 해가 흘렀다. 여긴 객지다. 5년, 단 한 번도 발작하지 않고, 건강한 일상을 보낸다. 촌로 주제에 거창한 직함이 인쇄된 명함을 지갑에 넣고 다닌다. 26기계화보병사단 홍보대사/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 ‧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대한가수협회 회원에다 <실버넷뉴스> 기자 등등. 이를 받는 이들 중 더러는 날 가관이라 여기리라. 하나 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사단홍보대사, 흠결 없이 3년 동안 일해 왔고 난 그곳을 떠나 살 수 없을 정도로 장병을 사랑한다. 액수는 비밀이지만, 아내의 전폭적인 이해로 병사들에게(만) 지원도 한다. 문단의 경우? 회비를 어김없이 내고 있으며 청탁이 오면 부족하지만 글을 쓴다. 자의로 카페에 올리든지….나만큼 노래를 많이 부르는 원로가수(?)가 없다고 자부한다. 최고의 신문 <실버넷뉴스> 취재라면 부산까지 간다. 대한민국 어디든지 발길로 훑는다.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나는 이런 카톡 문자를 받았다. 내 생명의 은인 신세계 신경 정신 의학과 박두성 원장으로부터다. 이제 나를 오히려 본받고 싶다나? ‘공항장애’를 고집하는 원장은 구두로 내게 전했다.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서 건강인 10명을 손꼽으라면, 두 번째에 내 이름을 들먹이겠다고. 이제 환자가 아니다.
도대체 ‘국정 농단’을 파헤치는 것과 ‘공황 장애’를 잘못 쓴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일부 국회의원들이 맞춤법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볼썽사납고말고. 그러는 그들이 어떤 사유서를 쓴다 치자. 단언컨대 그들 중 상당수가 최순실 씨를 못 따라잡는다.
아무튼‘공황장애’든‘공항장애’든, 최순실 씨는 다 자유롭다. 그는 많은 커피를 마신다지 않던가? 또 죄를 짓고 하루를 마감한다. 잡문으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을 오늘 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