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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의 미메시스적 읽기-최승호
*오세영의 시 깊이와 넓이 p33-40
4. 후기 자연서정시의 제유와 미메시스
오세영의 초기 해체시는 파편적이고 해체된 사물들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반영하는데 그쳤고, 중기 낭만적 연시들은 '님'을 중심으로 총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초기 해체시가 주체의 죽음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면, 중기 낭만적 연시들은 주체중심주의를 그 토대로 하고 있었다. 이것들에 비해 오세영의 후기 자연서정시는 유기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해체적인 구조는 아예 완결된 구조를 부정한다. 사물들 사이의 연속성, 유사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꽉 짜여진 틀을 형성하지 못한다. 사물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가능케 하는 중심 (주체)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심 부재가 바로 환유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유구조로 구성된 사물들은 전혀 모방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이에 비해 은유는 총체성을 지향한다. 초월적인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사물들이 긴밀하게 연속성, 유사성을 띠고 얽혀 있다. 은유적인 형태로 결합되어 있는 사물들은 모방의 대상이 된다.
이에 비해 유기적 구조'는 총체성도 파편성도 거부한다. 사물들 사이 관계가 내적으로 연속성을 보이고 있으면서도 초월적 주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다. 사물들은 서로 부분적으로 독자성을 유지하면서도 내부적으로 긴밀히 연속되어 있다. 초월적인 중심을 부정하면서도 긴밀히 연속되어 있는 사물들은 각자가 하나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사물들은 총체성의 구조에서처럼 논리적이거나 인과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논리가 아니라 직관에 의해 파악되는 이러한 많은 작은 중심들 사이에는 '허(虛, 구멍)가 존재하는데, 이 구멍이 바로 여백이다. 이 여백을 사이에 두고 사물들은 소위 제유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제유란 주지하다시피 부분으로 전체를 설명하고, 부분과 부분이 부분과 전체가 상호 유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15)
한 철을 치악에서 보냈더니라. 눈 덥힌 뒷부리를 치어다 보며
그리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 빈 가지에 홀로 앉아
하늘 문 엿보는 산까치같이
한 철을 구룡에서 보냈더니 / 대웅전 추녀 끝을 치어다 보며
미운 이 생각 않고 살았더니./흰 구름 서너 짐 머리에 이고
바람 길 엿보는 풍경(風磬)같이,
그렇게 한 철을 보냈더니라 이마에 찬 산그늘 품고/
가슴에 찬 산자락 품고 / 산 드릅 속눈 트는 겨울 한 철을/
깨어진 기와처럼 살았더니.
- 「속구룡사시편 전문
앞에서 말했듯이 사물의 제유적 관계란 민주적 관계이다. 인식 주체가 중심이 되어 세계를 자아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조지훈의 말처럼 자아의 대상화와 대상의 자아화가 동시에 대등한 관계로 이루어진다. 소강절이 말하는 '이물관물(以物觀物) 정신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이물관물((以物觀物))이란 서정적 주체가 인식되는 사물의 입장이 되어 사물을 파악한다는 사고방식이다.위의 시에는 이물관물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치악산에 들어와 자연경물(景物)을 바라보는 서정적 자아는 세계를 일방적으로 자아화시키는 위치에 서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서정적 자아는 사물의 하나로 자신을 낮추고 있다. 그는 자신을 빈 가지에 홀로 앉아 하늘 문을 엿보는 산까치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을 흰 구름 서너 짐 머리에 이고 바람 길 엿보는 풍경(風) 같다고, 깨어진 기와 같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풍경이나 깨어진 기와는 원래 인공물이지만 작품 속에서 하나의 자연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산사 속의 삶이라는 것 자체가 자연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화, 인간과 자연이 온전히 하나로 만나고 있는 모습, 소위 이물관물의 완전한 모습은 제3연 '이마에 찬 산그늘 품고/ 가슴에 찬 산자락 품고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인식 주체로서의 서정적 자아는 절대로 사물보다 우위에 서 있지 않다. 그렇다고 아래에 위치해 있지도 않다. 완전히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제유적 세계 인식방법이다. 그런데 제유는 앞의 환유나 은유와 마찬가지로, 세계인식 방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구성 방법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수사학
이란 단순한 도구학을 넘어서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방법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적극적으로 세계구성 방법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오세영의 후기 자연서정시에 있어서 서정적 주체는 세계를 자아화, 타자화 시키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다. 제유란 동일성을 지향하면서도 그 동일성을 주체 중심적으로 폭력적으로 달성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제유란 민주적인 상호 공존을 지향한다. 17)
산이 온종일/ 흰 구름 우러러 사는 것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살 일이다./ 여울이 온종일/ 산그늘 드리워 사는 것처럼/ 그렇게 무심히 살 일이다./ 꽃이 피면 무엇하리요/ 꽃이 지면 또 무엇 하리요/ 오늘도 산(山)에 기대어/ 하염없이 먼길을 바래는 사람아,/산이 온종일 흰 구름 우러르듯이/ 그렇게 부질없이 살 일이다./ 물이 온종일/ 산그늘 드리우듯이 그렇게 속절없이 살 일이다.
-산문(門)에 기대어 전문
제유로 이루어진 동양적 산수시, 자연서정시에 있어서도 시적 대상은 완벽한 이상적인 자연으로 나타난다. 서정적 자아가 다가가 하나로 합일하고 모방하고 닮고 싶어하는 대상은 당위적인 관념화된 자연이다. 인간의 유토피아적인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자연이다. 모방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결코 일상적인 것에 멈출 수가 없다. 오히려 세속적이고 일상적이고 찰나적인 것.분요한 것을 버리고 자연 속에 들어와 자연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런 자연스런 삶은 근대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하나의 미학적 저항이 된다. 심미적인 저항 방식으로서의 근대 자연서정시에는 서정적 진보, 도덕적 진보를 향한 열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상적 대상, 관념화된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이미 단순한 'nature'가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의미를 내포한 형이상학적 자연이 된다.18) 오세영의 후기 산수시에는 이처럼 신격화된 자연이 나온다. 이 자연은 하나의 낙원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낙원으로서의 자연은 서정적 주체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지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은유가 과거와 미래로
연결되고 있어서 회복되는 낙원'을 지향한다면, 제유는 '언제나 발견될 수 있는 낙원'을 지향한다. 제유적 세계인식에 있어서 자연은 항상 낙원으로서 우리 주위를 감싸고 있다. 단지 인식 주체의 마음이 흐려서, 욕심 때문에 자연이 낙원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탁한 마음을 정화시키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낙원으로서의 자연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유에 있어서 낙원으로서의 자연은 상실된 적이 없었으니 회복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신과 같은 자연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
이러한 완벽한 자연, 신으로서의 자연이 바로 모방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제유적 사고에 있어서 모방은 소위 정경교융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제유에 있어서 대상은 은유에서보다 위상이 한층 더 높아진다. 동양에서 심신수양을 말할 때 자연을 들고 나오는 것 자체가 자연의 높아진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산수시나 산수화의 이념은 세속 가운데서 혼탁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산수의 완전함을 보고 닭고 배우고 베껴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격수양이란 자연을 모방하는 데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경론에서 이루어지는 서정적 합일은 결코 주체 중심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초기 해체시에는 낙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낙원을 가능케 하는 신이 죽어 있거나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중기의 낭만적 서정시에서 신은 숨어 있거나 잠시 떠나 있다. 낙원의 회복이란 잠시 떠나있던 신이 다시 도래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후기 자연서정시에 있어서는 낙원이 항상 우리 주위에 놓여 있다. 신은 죽지도 떠나지도 않고 언제나 인간 주위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 낭만적 서정시에 있어서 낙원은 회복되는 것이지만, 동양적 자연서정시에 있어서 그것은 발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유에 있어서 서정적 동일성은 인위적인 것이라기보다 자연적인 것이다. 이물관물은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아와 사물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것을 이상시한다.
다람쥐 좋아 바위 넘으면/ 여울물 막아서고/ 여울물 좇아 계곡 건너면/ 물푸레 막아서고, 물푸레 좇아 숲 오르면/ 언덕에 다소곳이 서 있는 소나무/ 여름 한나절 길기도 하여/ 청솔 그늘 아래 오수는 달다/ 하늘은 못내 심심하여/ 흰 구름을 날리고/ 흰 구름은 짐짓 솔바람 흘리고/ 솔바람은 살풋/ 코끝 간질이는데 어이할거나/ 하늘문 앞에 두고 잠자는 그대 내 심심하여 눈감은 그대.
- 낮잠」 전문
제유에는 '주인'이 따로 없다. 앞의 은유에서 보이던 주종관계가 사라진다. 모두가 손님으로 생명잔치에 평등하게 초대되었을 뿐이다. 제유에서는 우주를 거대한 생명의 꽃밭, 잔치 밭으로 인식한다. 제유는 한마디로 생명시학 내지 생태시학을 지향한다. 모든 사물들이 각기 타고난 생명적 본질을 최대한 발휘하며 자신의 생명력을 구가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근대 체험 이후 동양의 생명시학은 근대의 부정성을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파시스트적 속도에 끌려 다니거나 휘둘리지 않으려는 태도는 멀리 1930년대 후반 문장과의 자연시에서도 발견된다. 자연시의 이념이 전근대까지는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작용하였다면, 근대 이후는 산업화 이데올로기의 부정성에 저항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다.20) 전근대에 있어서 자연시의 이념이 통합을 강조할 때, 그 통합이 새로운 생성을 억압하는 쪽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자연 서정시의 이념은 지나친 해체에 대한 경계, 저지의 수단이 된다. 이제 서정시는 하나의 이념적 수단이다.
앞의 시 낮잠은 제목에서부터 매우 반근대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느림 또는 게으름의 철학은 근대라는 거대한 폭풍 속21) 에서 자신의 주체성,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전략이다. 그래서 청솔 그늘 아래 오수는 달다. 낮잠은 시적 주체가 근대라는 폭풍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생명력을 즐기는 행위이다. 근대 이후 서정시라는 것 자체가 오수의 꿈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명의 공간은 한결같이 정적(靜한 상태로 나타난다. 단순한 정적(靜寂)이 아니라 적막(寂)에 가깝다. 적막은 불교적인 미감과 연결된다. 적막한 가운데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긴밀하게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생명력을 즐기고 있다. 이러한 이상적인 자연 속에서의 삶을 모델로 하여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모방은 언제나 당위적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인간의 관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유 역시 서정적 진보를 꿈꾸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근대의 부정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려는 하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22)
분분히/ 하얀 설편(雪) 흩날려서/ 봄 미나리 파란 새순에 앉아 겨울 꽃이다. / 물색 없이 노란 강아지 한 마리가 천방지축/ 눈밭을 헤집고 다닌다// 흰 나비떼를 좇아/팔랑팔랑 장다리 꽃밭을 뛰어다니는/ 해맑은 소녀의 원피스
- 「풍경」 전문
위의 작품은 하나의 이상적인 제유적 세계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적인 면에서 개체들은 서로 조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약동을 보이고 있다.
즉 생명력의 면에서 모든 사물들이 상호 확산적인 교감을 보이고 있다. 소위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작품 속 사물들 사이에만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 곧 제유적인 관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서정적 자아와 대상 전체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풍경'이란 자아중심주의를 벗어난 이물관물의 상태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동양의 산수시가 일종의 시(詩)로 되어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풍경시에서 바로 이물관물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평등하고 민주적인 관계로, 제유적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들은 각기 자신의 생명력을 즐기면서 상호 확산적으로 교감하고 있다. 이 교감의 방식이 곧 미가 실현되는 방식인데, 그 교감은 소위 '영원한 찰나', '영원한 현재'에서 이루어진다. 제유에서의 낙원 발견은 항상 순간적이면서도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현재시제로 나타난다. 순간적으로 직관적으로 파악된 우주의 생명현상이 영원성, 무시간성을 띠며 나타난다. 이 무시간성, 영원성은 세속적인 시간을 벗어난 곳에 고고하게 존
재하며, 서정적 자아로 하여금 미학적 진보, 도덕적 진보를 이루어가게 유도한다. 제유적인 서정시가 꿈꾸는 세계는 바로 이러한 영원성의 세계이다. 이 영원성이 바로 모방의 대상이 되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제유의 시간은 항상 '현재'에 맞추어져 있다.23) 환유에서는 시간이 파괴되어 있고, 은유에서는 시간이 과거와 미래로 방향이 설정되어 있는 것에 비해, 제유에서는 이처럼 시간이 항상 현재로 맞추어져 있다. 왜냐하면제유적 자연 서정시에서의 낙원은 항상 현재적인 것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아가 마음만 잘 고쳐먹으면 그 낙원은 언제든지 발견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