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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4 / 살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마2:13-15)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반을 인도할 때면 가장 먼저 소개하는 내용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구약은 ‘비디오’처럼 ‘이미지’로 보라는 것이고, 신약은 ‘오디오’로 즉 ‘설명’으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볼 때 구약과 신약이라는 이 비디오와 오디오가 동시에 작용해야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또 '하시려고 하시는 일'을 알게 되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는데 화면은 보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거나, 소리는 들리는데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어찌어찌 해서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알지 몰라도 영화가 주는 메시지나 감동 같은 것은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한다.’고 할 때도 ‘알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보는 동시에 들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면 구약은 기록된 장면들을 영화의 영상처럼. 신약은 기록된 사건마다 마치 외국 영화의 자막을 보듯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은 신약이 있어야 성경이 되고 신약 또한 구약이 있어야 성경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구약만 있어도 안 되고 신약만 있어도 안 됩니다.
이렇듯 단독으론 성경이 안 된다면 좀 더 구체적인 면에서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구약은 이미지를 통해 신약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으며 신약은 설명을 통해 구약의 내용을 들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이 서로 연결되어야만 한편의 성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미지는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며, 신약의 설명은 무엇을 알게 하려 하는 걸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구약과 신약이 신학적으로는 두 권이지만, 신앙적으로는 한 권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구약과 신약은 결국은 같은 책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두 개를 하나가 되게 해주는 중요한 연결 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연결 고리가 뭘까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여러 등장인물을 통한 이미지로,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여러 사건을 통한 설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용만 보면 별개인 것 같아도 두 책의 기록 목적과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같기 때문에 두 책을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봐도 마태는 다른 복음에서보다 더 강하게 예수님이 구약 예언의 성취자 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2장을 보면 6절에서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미가서 예언의 성취였다. 15절에서 예수님이 어렸을 때 애굽으로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은 호세야서 예언의 성취였다. 18절에서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갓 태어난 아기들이 많이 죽게 된 것은 라마의 통곡에 대한 예레미야서 예언의 응답이었다. 22절로 23절에서 애굽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으로 가지 않고 나사렛으로 가신 것 역시 호세아서 예언의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구약에서 신약까지를 관통하고 계시기에 우린 구약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상징’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신약에서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읽되 제대로 성경 읽기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제하고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성경에는 열심이었으나 예수님을 믿지 않은 바리새인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됩니다. 따라서 우린 언제든 성경을 읽을 때면 예수님을 발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약을 조명해 보면 구약에 펼쳐진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며, 예수님을 통해 신약을 보려 해야 신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성경을 읽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 자신을 보아야만 나 자신과 내 인생의 앞날이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게 되며, 현실의 고민하며 답답해하던 상황에서도 조급해하지 않고 소망 중에 기도하게 함으로써 주어진 환경과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들이 나를 위한 선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왜 이런 일이?’ ‘어째서 이런 결과가?’ 있는가로 괴로울 때라도 그 이유를 알고 그 결과를 믿을 수 있으면 낙심 대신 기대를, 절망 대신 소망을, 포기 대신 인내를 갖고 현재를 견뎌낼 수가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든 우리를 위한 최선의 결과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 불행하게 하실 리 없다!”
이 고백을 믿으신다면 이젠 인생에서 주눅 들지 마시고 어떤 경우에도 한숨 쉬거나 비관하지 마세요.
여러분에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시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뭘까요?
우린 모두가 한 사람의 인간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의 자존감을 낮추지 않는 것을 말하며 삶을 비관하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위한 최선의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에게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판단하고 해석하려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다음엔 예수님을 통해서 찾은 그 교훈들이 주는 의미를 삶에 적용하시면서 하나님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행하지 않으시는 분이신 것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요셉에게 지시하여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시킵니다.
이때 본문의 이야기를 단지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자 하나님이 피하게 해 주셨다. 그러니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죽게 될 일이 있을라치면 피신할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라고만 이해하고 말면 해석이 틀리진 않았지만 정확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애굽으로 피신시키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믿어야 할 것이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매 순간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손길을 받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 확신’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모두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둘째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의외로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많은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은 갖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은 아직 ‘나의 아버지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동행하심에 대한 확신 즉 어디에서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믿을진대 “너희를 고아와 과부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겠다.”고 하신 말씀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때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능히 그 상황을 이기고 나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신다면 하나님과 나 사이엔 취급하는 단위가 다르다는 것도 같이 알아 두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3:8절에 보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께 응답을 재촉하면서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다 하셨으니 1억 원도 1원과 같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제게 더도 말고 1원만 주세요.’라고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래 주마. 그런데 내게는 천년이 하루 같지만, 또한 하루가 천년 같기도 하단다. 그러니 하루만 기다려라.’ 그러시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단위가 다르십니다. 당장에 큰일이 났다고요? 아닙니다. 큰일은 내 생각일 뿐, 하나님껜 작은 일이고 사소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내게 닥친 일들을 보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단위의 차이’를 감안해야 합니다.
나는 큰일났기에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작은 일이기에 능히 처리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당장엔 사는 게 어렵고 힘들지라도 다른 건 다 안 되고 못 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믿음만 가진다면 그 믿음만이 내가 살 길이고 내가 모르는, 그러나 나를 향해 다가오는 더 큰 위기를 피하여 나를 최선의 자리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서라면 때론 꿈으로도 역사하고 급할 때는 천사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데 왜 내게는 꿈으로도 안 해주시고 천사도 안 보내 주시느냐?’고도 하지 마세요.
본문의 상황만 보면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지만 아직은 공생애 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를 어떻게 알리셔야 했을까요?
그래서 당시엔 꿈을 이용했고 천사를 동원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예수 시대”입니다. 이젠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싶다면 성경을 읽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어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을 찾고 만나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행여라도 요셉에게처럼 내게도 천사가 꿈에라도 나타나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모세처럼 내 눈앞에서 가시나무가 불붙었으나 타지 않는 이적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이 요셉 당시엔 그러셨을지라도 지금은 꿈이나 천사가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도 닥쳐올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들을 피하고 이기게 해주십니다.
다시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고자 할진대 우리가 꼭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당시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하나님 덕분에 요셉 가족은 살았다 쳐도 그럼 당시에 죽은 아기들과 그 부모는 무슨 죄인가요?
똑같은 위기 상황에서 요셉 가족만 피신시키시고 다른 가족들은 죽게 놔두셨다면 뭔가 불공평하고 편파적인 하나님으로 보여지지 않으시나요?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선 단위가 다르듯이 관점이나 판단 또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르기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결과는 매번 불신이고 불만이고 불안이게 됩니다.
그럼. 답을 찾아보자고요. 왜 요셉 가족만 살리셨냐고요? 왜 죄 없는 베들레헴의 수많은 아기들은 죽게 놔두셨냐고요?
답은 하납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아기일지라도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또 반문하실 겁니다. 당시에 죽은 애들은 예수를 믿을 기회조차 없지 않았느냐고.
논리적으론 타당한 말 같지만, 과연 이런 논리로 아기들이 죽은 것이 하나님 탓일까요?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알면 말씀이 주는 의미를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21:6절에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불신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 훈련 시간에도 배우셨습니다만, 여기서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시어’라는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나요?
사실 광야 사막은 이스라엘이 도착하기 전부터도 이미 불뱀이며 전갈 천지인 곳입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보자면 그런 곳에서 여지껏 불뱀에 물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입니다.
팩트는. 광야의 불뱀은 하나님이 보낸 게 아니라는 겁니다.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겁니다. 따라서 불뱀에게 물렸다고 하나님께 ‘어찌하여 불뱀을 보내셨나이까?“라고 따지고 불평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라는 말은 뭘까요?
분명 하나님이 보냈다고 기록해 놓고도 안 보냈다니요?
그래서 말씀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알아야 의미를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던 겁니다.
세상에서 불뱀에게 물렸으면 하나님께 따질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셨다는 말은 세상이 주는 불뱀에게 물렸으니 이젠 그 불뱀때문에라도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이 왜 나에게 불뱀이 있게 하셨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엔 ‘하나님이시라면 불뱀을 없게 하실 수 있으시다.’를 믿으라는 것이고, 그다음엔 ‘하나님! 이 불뱀을 내게서 없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라는 겁니다.
만약에라도 살다가 불뱀을 만났다면 그땐 ‘불뱀을 보낸 하나님’이 아니라 ‘불뱀을 처리하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는 단지 신학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를 받으려면 받겠다는 일념이 간절해야 합니다.
요즘 올림픽 경기가 한창인데 유도 중곈가를 보니 승패가 결정된 후에 해설자가 총평하기를 ‘승자나 패자 모두 실력은 엇비슷한데 이겨야겠다는 절박함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도 그래야 합니다. ‘절박함의 차이’가 ‘은혜의 차이’를 만듭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하신다는데 안 부를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이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는데 절박하지 않다면 간절히 기도할 이유도 없게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데리고 먼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생되는 일입니까? 게다가 성경을 보면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났다고 했으니 과연 떠날 준비나 제대로 했을는지요?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는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믿은 요셉과 마리아의 순종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게 구약 아브라함의 ‘여호와 이레’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쉬운 일, 편한 일, 내가 원하는 일만 순종하는 것은 절반의 순종일 뿐입니다. 어렵고 힘들지라도 순종하는 것까지가 참 순종입니다.
구약의 모든 이미지를 봐도, 신약의 모든 설명을 들어도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최선의 자리로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잃지 말고 매 순간 예수님만 앞세워 살아가는 여러분의 앞날에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