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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remier Pas(첫 발자욱) / Claude Ciari 기타연주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계속해서 일어난 도시국가의 전쟁들, 그리스 국가들은 BC 485년부터 BC 362년까지 서로 복잡 미묘한 전쟁에 빠졌다. 그리스 군대의 기병대는 이 기간 동안에 점점더 중요성을 갖으며 진화되었다. 기병대의 새로운 역할과 가치는 일부는 페르시아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또 일부는 전술들이 자연스럽게 진화함으로서 변화된 것이다. 비슷한 그리스 중무장 중심의 보병대는 적에 대해 유리한 점을 얻기 위한 어떤 방법이라도 탐구하였다. 그리고 기병대는 위력을 얻고 승리를 확보하기 위한 한 방법이 되었다.그리스의 기병대는 페르시아의 기병대와는 완연하게 다른 전투 스타일을 개발하였다.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에 대해 몇 개의 중요한 분야들에서 특별히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군대는 근접전투 분야에서는 명백히 우위를 점했던 것은 분명하다.
아테네 기병
이런 협소한 활동장소에서 승리의 요인은 사기, 부대의 단결, 갑옷, 훈련, 그리고 개인의 기량을 말한다. 모든 분야에서 평균적으로 그리스 무장보병은 페르시아 보병의 가장 엘리트 군사들 보다 뛰어났다. 무장보병은 그리스 전쟁 기법의 중심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무장보병이 그리스 기병대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초기의 그리스 군대는 Hippeis(기사급)라고 부르는 작은 엘리트 기병대 조직을 구축하였다. 주로 메시지를 전하거나 정찰활동에 사용하였는데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할 즈음에 사라졌다. 가장 우세한 그리스 도시국가-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기간에 기병대를 전투에 배치하지 않았다. 예비 기병대는 여러 도시국가에 존재했고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페르시아와 연합하였다.
알다시피 테살리(Thessalian)과 보이오티아( Boetian) 기병대는 모두 페르시아 군 편에서 플래타이아( Plataea)에 주둔했다. 그리스에는 효과적인 기병대를 위한 승마 및 전투 기술이 알려지지 않았고 많은 부유한 무장보병들이 전쟁에 나갈 때 탔고 하인들이 그들의 주인이 전투 중에 말을 타고 있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때 그리스의 phalanx 진세에 한 부분으로서 싸웠다. 현존하는 그리스의 도자기에서 중무장 갑옷을 입은 그리스 전사가 말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사가들은 이런 형상은 중무장 보병이 기병대라기보다는 전투하러 나서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중무장 갑옷, 그리고 특히 코린트식 헬멧은 말타고 전투하는 데는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전쟁 이후 그리스를 황폐하게 만든 거의 100년 동안, 진정한 그리스 기병대가 형성되었다. 다른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달리 테살리(Thessaly)에서는 군대에서 기병대가 항상 우세하였다. 테살리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에서 북쪽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테살리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쪽을 향하기 보다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스테피 초원의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와 북동쪽 국경에 있는 트라케인(Thracians)과 같은 중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테살리는 그리스와는 지형학적으로도 달랐다. 광대한 초원이 있는 평원으로 인해 말을 많이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테살리인들의 문화는 부유하고 강력한 인물이 땅과 말을 소유하고 군대의 구조를 결정할 수 있는 봉건제도를 신봉하고 유지하고 있었다.
테살리의 봉건제도의 속성과 말 문화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귀족과 땅에 부과되는 군역으로 부과되는 대표적인 세금으로서 알 수있는 데 80 명의 보명과 40 명의 기병대였다. 기병대는 테살리 군대의 반 정도까지도 채울 수 있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테살리군대의 구성은 BC 7세기에 10,000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으로 되었다고 한다. 테살리 기병대는 그들의 연합군을 포함하여 BC 4세기에는 최고 8,000 명의 기병대에 도달했다. 그들은 뛰어난 기수였다. 그리고 말은 그들의 문화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들의 국가적인 스포츠는 투우이다. 이 스포츠는 현대 미국의 로데오 경기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말을 타고 소를 쫓아가서 소와 싸움을 하기 위해 뛰어 내린다. 또한 아주 열정적으로 말 경주를 좋아하며 사실 제 1회 올림픽 말 경주에서 승리를 했다.
지역적인 전쟁이 그리스를 삼켜버림에 따라 테살리인들은 용병으로서 아주 크게 요구되었다. 이런 용병을 얻거나 승마술을 가지고 있는 다른 그리스인(예를 들어 보이오티아(Boeotians))의 도움을 얻음으로 인해 특정한 편이 반대 진영에 대해 유리한 점을 빠르게 차지하였다. 그러나 말을 타고 하는 전쟁 같은 중요한 기능을 용병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하였다. 1,000 명의 테살리인 용병으로 구성된 기병대는 아테네를 버리고 스파르타에 연합하므로 아테네를 전투에서 패하게 하였다. 피와 패배로 물들은 이런 사건으로 인해 각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들만의 경쟁력있고 믿을 수 있는 기병대를 필요로 하였다.
기병대는 빠르게 그리스 전투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기병대의 주요 공격 목표는 적 진세의 측면과 후면을 위협하는 것이다. 기병대의 추가적인 임무는 적 진을 적군의 보급 기지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다. 수비를 맡은 기병대는 진세를 적 기병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공격에서의 이점을 얻기 위해 경보병은 공격임무를 맡은 기병대와 혼합되어 창과 돌팔매를 이용하여 수비를 맡은 적군의 기병대에게 공격을 가할 때 추가적으로 위용을 발휘한다. 수비쪽의 기병대는 경보병을 보강하여 통합된 전력으로 수비 진세를 보호하였고 성공적인 경우 수비쪽의 기병대로 적 진세를 위협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팔랑스(phalanx ;밀착형 방어형 전투태세)진세는 그리스 전투의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BC 4세기의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투에 승리하는 것은 점점더 복잡하게 되었다. 최고의 훈련과 무장보병의 돌격 등은 더 이상 전투에서 승리를 하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최고의 무장보병의 전력도 만일 기병대와 경보병의 지원능력이 동등한 정도로 최상의 전력이 아니면 패배할 수도 있었다. 4세기에 그리스에서 승리는 기병대, 경보병, 중무장보병 등 3가지의 연합된 전력이 잘 협력이 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스 기병대의 작전은 펠레폰네소스 전투를 거치면서 진화되어 공격과 수비에 같은 정도의 중요도를 두고 있다. 기병대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대항하는 적의 기병대이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연속적인 궁수의 맹렬한 공격을 통하여 공격하였다. 중무장보병의 영향에 의해 그리스 기병대는 특히 활 같은 던지는 무기에 대하여 별로 중요도를 두지 않았다.
기병대나 중무장보병의 진영이든지 적을 격파하거나 끌어내는 주요 수단은 창과 칼로 하는 접근전이었다. Phalanx 진세는 후면이나 측면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반면에 기병대는 정면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스 기병대는 무릎과 말을 맞대고 적을 무찌르는데 무장보병의 phalanx 진세와 같이 규율, 사기, 훈련 그리고 체력에 의존하였다. 멀리 떨어져서 무기를 투척하는 방식의 전쟁은 존경받지 못하였다. 투척하는 무기에 대하여 그리스의 대책은 신속한 기병대의 돌격이었다. 그리스 기병대의 장비와 기술은 페르시아 것과 흡사하였다. 각 병사들은 육박전이나 투척 등 2중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창으로 무장하였다. 앞이 트인 헬멧과 가벼운 갑옷, 장화나 다리 아래를 감싸기와 검은 그리스 기병대의 표준 복장이었다.
그리스 기병대가 표준 장비에서 없는 것은 활이었다. 대신에 창과 이를 보완하는 2개의 투창이 표준 장비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창은 소지하지 않게 되었다. 약간 혹독한 스내플 형태의 재갈이 말을 부리는데 사용되었다. 말의 신체에 갑옷을 입혀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보호하였다. 이런 가벼운 갑옷은 두꺼운 패드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말의 목이나 넓적다리는 청동으로 만든 갑옷으로 보호했다. 테살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의 최고의 기병대였다. 그러나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4세기 중반까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어느 정도의 기병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군대를 갖으려면 모든 무기에서 뛰어나야 한다. 그리고 기병대는 승리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BC 342년에 그리스의 최북단에서 최고의 그리스 군대가 태어났다. 그것은 바로 마케도이아였다.
BC 359년부터 323년까지 36년 동안 마케도니아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군대 중 하나를 유지하였다. 마케도니아 군대 승리의 공식은 아주 숙련된 보병, 기병 그리고 예외적인 전략적 통솔력과 전술적 통찰력, 필적할 수 없는 개인적 지도력과 용감성이 잘 조합된 경무장 병력을 교묘하게 조합하는 것이었다. 모든 이런 속성 중에서 기병대는 마케도니아의 지도자 필립 II세와 그의 후계자이며 아들인 알렉산더 III세(알렉산더 대제)가 승리를 쟁취하는데 의지했던 무기였다. 마케도니아는 BC 5세기에서 4세기 동안 그리스를 괴롭혔던 여러 가지 전쟁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플라태아 전투에 소규모의 병력을 투입했었다. 마케도니아가 전쟁의 가장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 최북단에 좀 격리된 위치에 있었기에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남쪽의 그리스 국가들은 마케도니아를 반 야만인으로 취급했고 일부분만 그리스인이라고 취급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는 북쪽 그리스의 항구도시 칼키디케(Chalkidike)와 분쟁을 격게 되었다. 칼키디케(chalkidike)는 바다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였는데 봉쇄되어 있던 마케도니아는 바다로의 접근로가 절실 했다. 칼키디케( chalkidike)와 아테네는 아테네 전쟁에서 연합군이 되었고 이것은 마케도니아와 남쪽 그리스 국가들 간의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웃 그리스 국가들과 소규모 전투를 하는 동안 4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주요 관심사는 그의 이웃에 있는 비 그리스 국가였다.: 북동쪽의 Illyria (현재 발칸), 동쪽의 Thrace(현재의 터어키). BC 4세기의 전반부에는 마케도니아가 이들 적들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공격을 하곤 했다.
BC 359년 마케도니아의 Perdiccas와 그의 4,000 병사들은 Illyia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마케도니아 군의 사기는 흩어졌고 Perdiccas의 형제인 Phillip II세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필립은 즉시 군대를 나라의 흥망이 달린 문제로서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기병은 일반적으로 강력하다고 판단했기에 그의 초점은 보병이었다. 그는 사리사(Sarissa)라고 하는 찌르는 창을 보병 무기에 추가했다. 사리사(sarissa)는 일반적인 그리스 전투용 창보다 비교적 길었기 때문에 잘 사용하면 마케도니아 기병에게 접근전에서 명백한 우위를 제공했다. 필립은 또 훈련과 연습을 강조했고 그리하여 최상의 부대 단결과 장병들의 훈련을 가르쳤다. 필립의 개혁은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그들이 패배한지 1년이 지나서 마케도니아인들은 마케도니아 전쟁의 2가지 특징(강력한 기병대의 공격, 전투 후 타격을 주는 추격전)이 나타난 전투에서 필립의 지휘 아래 Bardylis가 지휘하는 Illyia인들을 쳐 부셨다. Illyia인들은 7,000 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의 지정학적 위치와 귀족사회는 마케도니아에서 기마 전통을 발전시켰다. 트라케(Tharace)와 칼키디케(Chalkidike)와 국경을 마주한 마케도니아 동부 지역은 말을 키우기에 적합하였다. 귀족전통은 부의 집중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말을 키우고 유지하고 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들이 Tharace의 때때로 말을 타는 적군들과 어울리면서 경쟁력 있는 기병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주 바뀌고 무심한 지휘력으로 인해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그들의 남쪽에 있는 이웃 Thessalian과 같은 등급보다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보병을 위해서 개발한 엄격한 훈련 방법을 기병대에 적용한 Phillip II세의 훈련과 지휘 아래에서 이런 것들이 변화되었다. 훈련에 의해 기술이 연마된 기병대 전력은 그들을 Thessalian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았다.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마케도니아 문화가 말과 기수에게 바치는 존경심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필립의 아들 알렉산더의 관계와 그의 말 부케팔로스(Bucephalas)은 마케도니아 문화에서 말의 위치에 대한 예를 보여준다. 왕자는 어린 시절에 말을 얻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유명한 전쟁에서 항상 이 말을 탔다. 30세에 이 말은 인도에서의 전투에서 죽었다. 주인과 동료로서 알렉산더와 그의 말과의 관계, 그리고 고대 역사에서 부케팔로스( Bucephalas)가 기록된 방식은 마케도니아 문화에서 각 말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알렉산더와 부케팔로스,마케도니아의 왕자였던 알렉산더가 12살 때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난폭한 말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길들이려고 올라탔지만 여지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말이 자신의 등에 올라탄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놀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의 위치를 바꿔서 올라탔다. 그 이후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더의 애마가 돼 전쟁터를 누볐다. 부케팔로스는 인도 원정 때 알렉산더를 보호하려다 죽었다고 알려졌다. 알렉산더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명마에 대한 전설은 많다. 이는 말을 신성한 동물로여겼기 때문이다.또한 영웅을 상징하는 영물이자 힘과 파괴력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동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말은 주로 하늘과 지상을 오가는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은 고구려 장천 1호 고분에 그려진 백마,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국보 207호인 천마도,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말 모양을 활용한 토기나 토우 등에 반영돼 있다. 특히 날개 달린 천마는 신이 타고 하늘을 달린다고 믿어져 왔기 때문에 말은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신의 사자이자 사람과 신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는 말이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실어 나른다는 생각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실제 말을 죽여서 무덤에 넣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말을 산신이나 수호신으로 여기며 신성시하는 등 동양에서는 공히 말이 신의 대리인 또는 메신저로서의 기능을 한다.
서양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그리스신화에서는 네 마리의 천마(페가수스)가 태양신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를 끄는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마차의 흐름에 따라 하루 해가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우리 풍습에도 말과 태양을 직접 연결하는 대목이 있다. 혼인 풍속에 신랑이 백마를 타고 신부집에 가는데, 이는 말이 하늘의 상징인 태양을 나타내고 태양은 곧 남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의 신성성은 곧바로 왕의 탄생이나 영웅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상징으로도 연결된다.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 이 때 그가 태어난 알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운반한 동물이 백마였다. 중국 역사에서는 항우의 오추마와 관우의 적토마 등 영웅들에게는 반드시 조력자로서의 명마가 있었으며, 이들 말은 모두 주인과 운명을 함께한 것으로 돼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벨로로폰이라는 영웅이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칠 때 날개 달린 페가수스를 타고 공격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말을 타고 바다를 달리며, 이 말은 파도의 거대하고 파괴적인 힘을 나타낸다. 또한 동서양 모두 말은 국력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많은 말을 보유하기 위해 노력했다.말은 다양한 상징성 외에도 조상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동반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말이 지닌 다양한 권능은 그것이 타는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기 위해서는 인간과 교감이 필요했고, 말 또한 편자와 같은 보조기구가 필요했다. 초원지대가 아닌 산지가 많은 한반도에서는 대체로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말을 탔다. 아울러 전통시대 말은 군사와 같은 공무에 사용하는 국가 기간산업에 속했으므로 말의 건강을 기원했다.
음력상 말날(午日)에는 말을 소중하게 여겨 팥떡을 해서 마구간 앞에 놓고 말의 무병과 건강을 비는 풍속도 있다. 또한 역참(驛站) 마을에서는 말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심지어 말은 죽어 갈기는 갓으로 가죽은 신발과 주머니로, 힘줄은 활로, 심지어 똥은 마분지(馬糞紙)라 해서 종이 원료로 쓰이는가 하면 고기는 식량으로도 이용되는 등 조상들과 뗄 수 없는 실용적인 동물이었다.근대 이전까지 전쟁의 승패는 얼마나 훌륭한 군마를 많이 보유했느냐가 결정했다. 탁월한 기동력과 수송력을 자랑하는 말은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무기였던 셈이다. 그래서 유명한 영웅 곁에는 항상 명마가 있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영웅과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돼 전쟁터를 누비는 명마는 후세까지 이름을 떨쳤다. 역사와 전설의 경계를 오가며 그 능력이 과장되기도 했다.
역사 속의 유명한 영웅과 함께한 명마는 어떤 활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을까.알렉산더와 부케팔로스말고도 항우와 오추마가 있다. 어느 마을에 용 한 마리가 호수에 내려와 말로 변해서 사납게 날뛰는데, 아무도 그 말을 타지 못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항우가 이야기를 듣고 이 용마를 길들였으니 이 말이 바로 오추마다. 오추마는 항우와 함께 역시 전장을 누볐다. 해하 전투에서 패한 항우가 오강에 이르러 죽음을 결심하고 오추마를 뗏목에 태워 보냈다. 그러나 오추마는 항우의 죽음을 예견하고 구슬피 울다가 물에 뛰어 들어 죽고 말았다고 한다.여포, 관우의 적토마가 있다. 온 몸이 선혈처럼 붉고,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적토마(赤兎馬)는 삼국지연의를 통틀어 최강의 무장으로 꼽히는 여포와 관우의 애마였다. 관우와 적토마는 소설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설에도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오자 적토마를 탄 관우의 혼령이 나타나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곳곳에 있다. 적토마 역시 관우가 죽은 후에 식음을 전폐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주몽과 이성계의 명마 이야기도 있다. 금와왕의 배다른 형제들과 갈등을 겪던 주몽은 자신이 점 찍어 둔 명마를 일부러 굶겨서 볼품없는 말로 만들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어머니인 유화가 건네준 바늘을 말의 혀에 꽂아서 삐쩍 마르게 했다고 한다. 금와왕은 이 볼품없는 말을 주몽에게 줬다. 주몽은 다시 이 말을 잘 돌봐서 예전의 명마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에게도 명마가 있었는데, 이성계는 이 명마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내기를 했다. 화살을 쏜 후에 말을 타고 출발해서 목적지까지 먼저 도착하면 여물을 두 배로 주지만, 늦게 도착하면 목을 베어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활을 쏘고 말을 타고 목적지에 가보니 화살이 떨어져 있었다. 이성계는 가차 없이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화살이 날아와 땅에 떨어지는게 아닌가! 어제 쏜 화살을 그만 착각한 셈이다. 뒤늦게 후회한 이성계는 함흥의 반룡산에 명마를 기리기 위해 치마대라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지역마다 달라서 견훤, 흑치상지, 남이장군 등도 등장한다.소설 <삼국지>에는 유비 장비 관우 여포 제갈공명 조조 등 수많은 영웅호걸들 뿐만 아니라 하루에 천리길을 달렸다는 ‘천리마’도 등장한다. 관우가 탔다는 말 ‘적토마’와 항우가 탔다는 ‘오추마’가 그 천리마들이다. 적토마는 몸 전체가 불꽃같이 붉다고 붙여진 이름이었고 ‘오추마’는 검은 털에 흰 털이 간간이 섞여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이야기지만 형편없는 똥말도 있다. 96전96연패의 ‘똥말’. ‘을(乙)들의 희망’으로 불리는 경주마 ‘차밍걸’이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긴 이래 최다연패 신기록을 세워 화제가 됐었다. 2005년 태어난 8세 암말 차밍걸은 지난 5월 26일 경기도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제6경주에 출전해 11마리 중에서 9번째로 골인, 한번도 우승하지 못하고 96연패라는 연패 신기록을 세웠다. 차밍걸은 다른 경주마보다 몸무게가 100kg 덜 나가는 430kg으로 왜소하다. 그러나 1등은 못하지만 끝까지 열심히 뛰는 ‘소시민(小市民)’또는 성실한 ‘을’로 비유되면서 ‘화제마’로 떠올랐다. ‘한 방의 인생역전’을 꿈꾸는 경마의 세계에서 쉬지 않고 성실하게 달려 자기 밥벌이만 간신히 하는 별종인 셈이다. 우리의 힘은 어쩌면 그런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민중으로 지금 이 땅에 서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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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 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제각기 거의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동맹을 이끌었다. 해군은 아테네 쪽이 강했고, 육군은 스파르타 쪽이 강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도 전쟁을 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BC 445년 30년조약을 맺고 휴전을 했으나, BC 433년 아테네가 코르키라와 동맹을 맺으면서 협정을 위반했다. BC 431년 봄,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테베가 아테네의 동맹국인 플라타이아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결말이 났다. 아테네 해군은 이 해전에서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은 스파르타 해군에 참패를 당했다. 아테네는 BC 404년 4월 스파르타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문화적으로 가장 진보한 그리스 도시국가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8권으로 된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인데 기원전 411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다. 문체는 이 책의 약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연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조법과 같은 당시의 수사학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창출해 내고 있다. 하나하나의 문장은 사상이 지나치게 응집되어 추상적 문구의 지나친 사용과 함께 때때로 난해한 흠이 있으나 사색의 발자취가 그대로 문장에 남아 있다는 점에 투키디데스 문체의 독특한 매력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를 뒤흔든 기마군단사
목차
1. 말의 진화
2. 우르의 자개 상자
3. 메소포타미아 흥망은
4. 전차의 위용과 유럽어족의 출현
5. 마리안누라는 귀족과 KIKKULI 교본
6. 이집트 파라오 그리고 투랑카멘
7 .투랑카멘 전차로 본 이집트 전차
8. 기원전 1275년 카데서 전차 전쟁
9. 지구상 기병의 첫 출현, 앗시리아
10.히타이트와 스키타이
11.바람의 제국 스키타이 1
12.바람의제국 스키타이 2
13. 스키타이와 흉노
14.페르시아 기병
15. 페르시아 AKHAL-TEKE말과 니사에만 군마
16. 그리스 페르시아전쟁(살라미스 해전)
17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플라타이아 전투)
18. 키루스 대왕과 크세노폰
19. 그리스 내전 그리고 마케도니아 기병
20. 마케도니아 기병의 알렉산더 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자료정리중
21. 마케도니아 기병의 알렉산더 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료정리중
22. 흉노와 한나라 1
23. 흉노와 한나라 2
24. 흉노와 한나라 3
25. 흉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26.말을 사랑한 한무제
27. 문무왕이 흉노족이라는
28. 고조선의 수레-------현재 이시점으로 쓸려고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Le Premier Pas(첫 발자욱) / Claude Ciari 기타연주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고 계속해서 일어난 도시국가의 전쟁들, 그리스 국가들은 BC 485년부터 BC 362년까지 서로 복잡 미묘한 전쟁에 빠졌다. 그리스 군대의 기병대는 이 기간 동안에 점점더 중요성을 갖으며 진화되었다. 기병대의 새로운 역할과 가치는 일부는 페르시아로부터 얻은 교훈으로 또 일부는 전술들이 자연스럽게 진화함으로서 변화된 것이다. 비슷한 그리스 중무장 중심의 보병대는 적에 대해 유리한 점을 얻기 위한 어떤 방법이라도 탐구하였다. 그리고 기병대는 위력을 얻고 승리를 확보하기 위한 한 방법이 되었다.그리스의 기병대는 페르시아의 기병대와는 완연하게 다른 전투 스타일을 개발하였다.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에 대해 몇 개의 중요한 분야들에서 특별히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군대는 근접전투 분야에서는 명백히 우위를 점했던 것은 분명하다.
아테네 기병
이런 협소한 활동장소에서 승리의 요인은 사기, 부대의 단결, 갑옷, 훈련, 그리고 개인의 기량을 말한다. 모든 분야에서 평균적으로 그리스 무장보병은 페르시아 보병의 가장 엘리트 군사들 보다 뛰어났다. 무장보병은 그리스 전쟁 기법의 중심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무장보병이 그리스 기병대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초기의 그리스 군대는 Hippeis(기사급)라고 부르는 작은 엘리트 기병대 조직을 구축하였다. 주로 메시지를 전하거나 정찰활동에 사용하였는데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할 즈음에 사라졌다. 가장 우세한 그리스 도시국가-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기간에 기병대를 전투에 배치하지 않았다. 예비 기병대는 여러 도시국가에 존재했고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대부분이 페르시아와 연합하였다.
알다시피 테살리(Thessalian)과 보이오티아( Boetian) 기병대는 모두 페르시아 군 편에서 플래타이아( Plataea)에 주둔했다. 그리스에는 효과적인 기병대를 위한 승마 및 전투 기술이 알려지지 않았고 많은 부유한 무장보병들이 전쟁에 나갈 때 탔고 하인들이 그들의 주인이 전투 중에 말을 타고 있는 것을 걱정하고 있을 때 그리스의 phalanx 진세에 한 부분으로서 싸웠다. 현존하는 그리스의 도자기에서 중무장 갑옷을 입은 그리스 전사가 말 위에 올라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사가들은 이런 형상은 중무장 보병이 기병대라기보다는 전투하러 나서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중무장 갑옷, 그리고 특히 코린트식 헬멧은 말타고 전투하는 데는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인한 전쟁 이후 그리스를 황폐하게 만든 거의 100년 동안, 진정한 그리스 기병대가 형성되었다. 다른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달리 테살리(Thessaly)에서는 군대에서 기병대가 항상 우세하였다. 테살리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에서 북쪽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테살리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쪽을 향하기 보다는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그리고 스테피 초원의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와 북동쪽 국경에 있는 트라케인(Thracians)과 같은 중동에서 영향을 받았다. 테살리는 그리스와는 지형학적으로도 달랐다. 광대한 초원이 있는 평원으로 인해 말을 많이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테살리인들의 문화는 부유하고 강력한 인물이 땅과 말을 소유하고 군대의 구조를 결정할 수 있는 봉건제도를 신봉하고 유지하고 있었다.
테살리의 봉건제도의 속성과 말 문화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지표는 귀족과 땅에 부과되는 군역으로 부과되는 대표적인 세금으로서 알 수있는 데 80 명의 보명과 40 명의 기병대였다. 기병대는 테살리 군대의 반 정도까지도 채울 수 있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테살리군대의 구성은 BC 7세기에 10,000명의 보병과 6,000명의 기병으로 되었다고 한다. 테살리 기병대는 그들의 연합군을 포함하여 BC 4세기에는 최고 8,000 명의 기병대에 도달했다. 그들은 뛰어난 기수였다. 그리고 말은 그들의 문화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들의 국가적인 스포츠는 투우이다. 이 스포츠는 현대 미국의 로데오 경기와 아주 비슷하다. 그들은 말을 타고 소를 쫓아가서 소와 싸움을 하기 위해 뛰어 내린다. 또한 아주 열정적으로 말 경주를 좋아하며 사실 제 1회 올림픽 말 경주에서 승리를 했다.
지역적인 전쟁이 그리스를 삼켜버림에 따라 테살리인들은 용병으로서 아주 크게 요구되었다. 이런 용병을 얻거나 승마술을 가지고 있는 다른 그리스인(예를 들어 보이오티아(Boeotians))의 도움을 얻음으로 인해 특정한 편이 반대 진영에 대해 유리한 점을 빠르게 차지하였다. 그러나 말을 타고 하는 전쟁 같은 중요한 기능을 용병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하였다. 1,000 명의 테살리인 용병으로 구성된 기병대는 아테네를 버리고 스파르타에 연합하므로 아테네를 전투에서 패하게 하였다. 피와 패배로 물들은 이런 사건으로 인해 각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그들만의 경쟁력있고 믿을 수 있는 기병대를 필요로 하였다.
기병대는 빠르게 그리스 전투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기병대의 주요 공격 목표는 적 진세의 측면과 후면을 위협하는 것이다. 기병대의 추가적인 임무는 적 진을 적군의 보급 기지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다. 수비를 맡은 기병대는 진세를 적 기병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공격에서의 이점을 얻기 위해 경보병은 공격임무를 맡은 기병대와 혼합되어 창과 돌팔매를 이용하여 수비를 맡은 적군의 기병대에게 공격을 가할 때 추가적으로 위용을 발휘한다. 수비쪽의 기병대는 경보병을 보강하여 통합된 전력으로 수비 진세를 보호하였고 성공적인 경우 수비쪽의 기병대로 적 진세를 위협하는 데 활용할 수 있었다. 팔랑스(phalanx ;밀착형 방어형 전투태세)진세는 그리스 전투의 중심축이었다.
그러나 BC 4세기의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투에 승리하는 것은 점점더 복잡하게 되었다. 최고의 훈련과 무장보병의 돌격 등은 더 이상 전투에서 승리를 하는데 충분하지 않았다. 최고의 무장보병의 전력도 만일 기병대와 경보병의 지원능력이 동등한 정도로 최상의 전력이 아니면 패배할 수도 있었다. 4세기에 그리스에서 승리는 기병대, 경보병, 중무장보병 등 3가지의 연합된 전력이 잘 협력이 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스 기병대의 작전은 펠레폰네소스 전투를 거치면서 진화되어 공격과 수비에 같은 정도의 중요도를 두고 있다. 기병대가 초점을 두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대항하는 적의 기병대이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연속적인 궁수의 맹렬한 공격을 통하여 공격하였다. 중무장보병의 영향에 의해 그리스 기병대는 특히 활 같은 던지는 무기에 대하여 별로 중요도를 두지 않았다.
기병대나 중무장보병의 진영이든지 적을 격파하거나 끌어내는 주요 수단은 창과 칼로 하는 접근전이었다. Phalanx 진세는 후면이나 측면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반면에 기병대는 정면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스 기병대는 무릎과 말을 맞대고 적을 무찌르는데 무장보병의 phalanx 진세와 같이 규율, 사기, 훈련 그리고 체력에 의존하였다. 멀리 떨어져서 무기를 투척하는 방식의 전쟁은 존경받지 못하였다. 투척하는 무기에 대하여 그리스의 대책은 신속한 기병대의 돌격이었다. 그리스 기병대의 장비와 기술은 페르시아 것과 흡사하였다. 각 병사들은 육박전이나 투척 등 2중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창으로 무장하였다. 앞이 트인 헬멧과 가벼운 갑옷, 장화나 다리 아래를 감싸기와 검은 그리스 기병대의 표준 복장이었다.
그리스 기병대가 표준 장비에서 없는 것은 활이었다. 대신에 창과 이를 보완하는 2개의 투창이 표준 장비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창은 소지하지 않게 되었다. 약간 혹독한 스내플 형태의 재갈이 말을 부리는데 사용되었다. 말의 신체에 갑옷을 입혀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보호하였다. 이런 가벼운 갑옷은 두꺼운 패드나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말의 목이나 넓적다리는 청동으로 만든 갑옷으로 보호했다. 테살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의 최고의 기병대였다. 그러나 모든 무기를 능숙하게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4세기 중반까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어느 정도의 기병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군대를 갖으려면 모든 무기에서 뛰어나야 한다. 그리고 기병대는 승리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BC 342년에 그리스의 최북단에서 최고의 그리스 군대가 태어났다. 그것은 바로 마케도이아였다.
BC 359년부터 323년까지 36년 동안 마케도니아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군대 중 하나를 유지하였다. 마케도니아 군대 승리의 공식은 아주 숙련된 보병, 기병 그리고 예외적인 전략적 통솔력과 전술적 통찰력, 필적할 수 없는 개인적 지도력과 용감성이 잘 조합된 경무장 병력을 교묘하게 조합하는 것이었다. 모든 이런 속성 중에서 기병대는 마케도니아의 지도자 필립 II세와 그의 후계자이며 아들인 알렉산더 III세(알렉산더 대제)가 승리를 쟁취하는데 의지했던 무기였다. 마케도니아는 BC 5세기에서 4세기 동안 그리스를 괴롭혔던 여러 가지 전쟁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플라태아 전투에 소규모의 병력을 투입했었다. 마케도니아가 전쟁의 가장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서 최북단에 좀 격리된 위치에 있었기에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남쪽의 그리스 국가들은 마케도니아를 반 야만인으로 취급했고 일부분만 그리스인이라고 취급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는 북쪽 그리스의 항구도시 칼키디케(Chalkidike)와 분쟁을 격게 되었다. 칼키디케(chalkidike)는 바다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였는데 봉쇄되어 있던 마케도니아는 바다로의 접근로가 절실 했다. 칼키디케( chalkidike)와 아테네는 아테네 전쟁에서 연합군이 되었고 이것은 마케도니아와 남쪽 그리스 국가들 간의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웃 그리스 국가들과 소규모 전투를 하는 동안 4세기에 마케도니아의 주요 관심사는 그의 이웃에 있는 비 그리스 국가였다.: 북동쪽의 Illyria (현재 발칸), 동쪽의 Thrace(현재의 터어키). BC 4세기의 전반부에는 마케도니아가 이들 적들에게 공격을 당하거나 공격을 하곤 했다.
BC 359년 마케도니아의 Perdiccas와 그의 4,000 병사들은 Illyia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마케도니아 군의 사기는 흩어졌고 Perdiccas의 형제인 Phillip II세가 왕권을 이어받았다. 필립은 즉시 군대를 나라의 흥망이 달린 문제로서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기병은 일반적으로 강력하다고 판단했기에 그의 초점은 보병이었다. 그는 사리사(Sarissa)라고 하는 찌르는 창을 보병 무기에 추가했다. 사리사(sarissa)는 일반적인 그리스 전투용 창보다 비교적 길었기 때문에 잘 사용하면 마케도니아 기병에게 접근전에서 명백한 우위를 제공했다. 필립은 또 훈련과 연습을 강조했고 그리하여 최상의 부대 단결과 장병들의 훈련을 가르쳤다. 필립의 개혁은 즉시 효과가 나타났다.
그들이 패배한지 1년이 지나서 마케도니아인들은 마케도니아 전쟁의 2가지 특징(강력한 기병대의 공격, 전투 후 타격을 주는 추격전)이 나타난 전투에서 필립의 지휘 아래 Bardylis가 지휘하는 Illyia인들을 쳐 부셨다. Illyia인들은 7,000 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의 지정학적 위치와 귀족사회는 마케도니아에서 기마 전통을 발전시켰다. 트라케(Tharace)와 칼키디케(Chalkidike)와 국경을 마주한 마케도니아 동부 지역은 말을 키우기에 적합하였다. 귀족전통은 부의 집중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말을 키우고 유지하고 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들이 Tharace의 때때로 말을 타는 적군들과 어울리면서 경쟁력 있는 기병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주 바뀌고 무심한 지휘력으로 인해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그들의 남쪽에 있는 이웃 Thessalian과 같은 등급보다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보병을 위해서 개발한 엄격한 훈련 방법을 기병대에 적용한 Phillip II세의 훈련과 지휘 아래에서 이런 것들이 변화되었다. 훈련에 의해 기술이 연마된 기병대 전력은 그들을 Thessalian과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았다.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마케도니아 문화가 말과 기수에게 바치는 존경심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 필립의 아들 알렉산더의 관계와 그의 말 부케팔로스(Bucephalas)은 마케도니아 문화에서 말의 위치에 대한 예를 보여준다. 왕자는 어린 시절에 말을 얻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유명한 전쟁에서 항상 이 말을 탔다. 30세에 이 말은 인도에서의 전투에서 죽었다. 주인과 동료로서 알렉산더와 그의 말과의 관계, 그리고 고대 역사에서 부케팔로스( Bucephalas)가 기록된 방식은 마케도니아 문화에서 각 말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알렉산더와 부케팔로스,마케도니아의 왕자였던 알렉산더가 12살 때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난폭한 말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길들이려고 올라탔지만 여지없이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말이 자신의 등에 올라탄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놀란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의 위치를 바꿔서 올라탔다. 그 이후 부케팔로스는 알렉산더의 애마가 돼 전쟁터를 누볐다. 부케팔로스는 인도 원정 때 알렉산더를 보호하려다 죽었다고 알려졌다. 알렉산더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부케팔로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명마에 대한 전설은 많다. 이는 말을 신성한 동물로여겼기 때문이다.또한 영웅을 상징하는 영물이자 힘과 파괴력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동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말은 주로 하늘과 지상을 오가는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은 고구려 장천 1호 고분에 그려진 백마,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국보 207호인 천마도, 신라와 가야 고분에서 발견된 말 모양을 활용한 토기나 토우 등에 반영돼 있다. 특히 날개 달린 천마는 신이 타고 하늘을 달린다고 믿어져 왔기 때문에 말은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신의 사자이자 사람과 신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는 말이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실어 나른다는 생각으로까지 확장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실제 말을 죽여서 무덤에 넣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말을 산신이나 수호신으로 여기며 신성시하는 등 동양에서는 공히 말이 신의 대리인 또는 메신저로서의 기능을 한다.
서양 사상의 토대를 이루는 그리스신화에서는 네 마리의 천마(페가수스)가 태양신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를 끄는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마차의 흐름에 따라 하루 해가 움직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우리 풍습에도 말과 태양을 직접 연결하는 대목이 있다. 혼인 풍속에 신랑이 백마를 타고 신부집에 가는데, 이는 말이 하늘의 상징인 태양을 나타내고 태양은 곧 남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말의 신성성은 곧바로 왕의 탄생이나 영웅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상징으로도 연결된다.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 이 때 그가 태어난 알을 하늘에서 지상으로 운반한 동물이 백마였다. 중국 역사에서는 항우의 오추마와 관우의 적토마 등 영웅들에게는 반드시 조력자로서의 명마가 있었으며, 이들 말은 모두 주인과 운명을 함께한 것으로 돼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벨로로폰이라는 영웅이 괴물 키마이라를 물리칠 때 날개 달린 페가수스를 타고 공격한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말을 타고 바다를 달리며, 이 말은 파도의 거대하고 파괴적인 힘을 나타낸다. 또한 동서양 모두 말은 국력의 상징으로 여겼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많은 말을 보유하기 위해 노력했다.말은 다양한 상징성 외에도 조상의 일상 생활과 밀접한 동반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말이 지닌 다양한 권능은 그것이 타는 도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타기 위해서는 인간과 교감이 필요했고, 말 또한 편자와 같은 보조기구가 필요했다. 초원지대가 아닌 산지가 많은 한반도에서는 대체로 신분이 높은 사람만이 말을 탔다. 아울러 전통시대 말은 군사와 같은 공무에 사용하는 국가 기간산업에 속했으므로 말의 건강을 기원했다.
음력상 말날(午日)에는 말을 소중하게 여겨 팥떡을 해서 마구간 앞에 놓고 말의 무병과 건강을 비는 풍속도 있다. 또한 역참(驛站) 마을에서는 말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심지어 말은 죽어 갈기는 갓으로 가죽은 신발과 주머니로, 힘줄은 활로, 심지어 똥은 마분지(馬糞紙)라 해서 종이 원료로 쓰이는가 하면 고기는 식량으로도 이용되는 등 조상들과 뗄 수 없는 실용적인 동물이었다.근대 이전까지 전쟁의 승패는 얼마나 훌륭한 군마를 많이 보유했느냐가 결정했다. 탁월한 기동력과 수송력을 자랑하는 말은 그야말로 가장 뛰어난 무기였던 셈이다. 그래서 유명한 영웅 곁에는 항상 명마가 있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영웅과 인마일체(人馬一體)가 돼 전쟁터를 누비는 명마는 후세까지 이름을 떨쳤다. 역사와 전설의 경계를 오가며 그 능력이 과장되기도 했다.
역사 속의 유명한 영웅과 함께한 명마는 어떤 활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을까.알렉산더와 부케팔로스말고도 항우와 오추마가 있다. 어느 마을에 용 한 마리가 호수에 내려와 말로 변해서 사납게 날뛰는데, 아무도 그 말을 타지 못했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항우가 이야기를 듣고 이 용마를 길들였으니 이 말이 바로 오추마다. 오추마는 항우와 함께 역시 전장을 누볐다. 해하 전투에서 패한 항우가 오강에 이르러 죽음을 결심하고 오추마를 뗏목에 태워 보냈다. 그러나 오추마는 항우의 죽음을 예견하고 구슬피 울다가 물에 뛰어 들어 죽고 말았다고 한다.여포, 관우의 적토마가 있다. 온 몸이 선혈처럼 붉고, 하루에 천리를 간다는 적토마(赤兎馬)는 삼국지연의를 통틀어 최강의 무장으로 꼽히는 여포와 관우의 애마였다. 관우와 적토마는 소설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설에도 등장한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오자 적토마를 탄 관우의 혼령이 나타나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곳곳에 있다. 적토마 역시 관우가 죽은 후에 식음을 전폐하다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주몽과 이성계의 명마 이야기도 있다. 금와왕의 배다른 형제들과 갈등을 겪던 주몽은 자신이 점 찍어 둔 명마를 일부러 굶겨서 볼품없는 말로 만들었다. 기록에 따라서는 어머니인 유화가 건네준 바늘을 말의 혀에 꽂아서 삐쩍 마르게 했다고 한다. 금와왕은 이 볼품없는 말을 주몽에게 줬다. 주몽은 다시 이 말을 잘 돌봐서 예전의 명마로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에게도 명마가 있었는데, 이성계는 이 명마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고 내기를 했다. 화살을 쏜 후에 말을 타고 출발해서 목적지까지 먼저 도착하면 여물을 두 배로 주지만, 늦게 도착하면 목을 베어버린다고 했다.
그래서 활을 쏘고 말을 타고 목적지에 가보니 화살이 떨어져 있었다. 이성계는 가차 없이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런데 그때 화살이 날아와 땅에 떨어지는게 아닌가! 어제 쏜 화살을 그만 착각한 셈이다. 뒤늦게 후회한 이성계는 함흥의 반룡산에 명마를 기리기 위해 치마대라는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설의 주인공은 지역마다 달라서 견훤, 흑치상지, 남이장군 등도 등장한다.소설 <삼국지>에는 유비 장비 관우 여포 제갈공명 조조 등 수많은 영웅호걸들 뿐만 아니라 하루에 천리길을 달렸다는 ‘천리마’도 등장한다. 관우가 탔다는 말 ‘적토마’와 항우가 탔다는 ‘오추마’가 그 천리마들이다. 적토마는 몸 전체가 불꽃같이 붉다고 붙여진 이름이었고 ‘오추마’는 검은 털에 흰 털이 간간이 섞여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이야기지만 형편없는 똥말도 있다. 96전96연패의 ‘똥말’. ‘을(乙)들의 희망’으로 불리는 경주마 ‘차밍걸’이 1922년 조선경마구락부가 생긴 이래 최다연패 신기록을 세워 화제가 됐었다. 2005년 태어난 8세 암말 차밍걸은 지난 5월 26일 경기도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제6경주에 출전해 11마리 중에서 9번째로 골인, 한번도 우승하지 못하고 96연패라는 연패 신기록을 세웠다. 차밍걸은 다른 경주마보다 몸무게가 100kg 덜 나가는 430kg으로 왜소하다. 그러나 1등은 못하지만 끝까지 열심히 뛰는 ‘소시민(小市民)’또는 성실한 ‘을’로 비유되면서 ‘화제마’로 떠올랐다. ‘한 방의 인생역전’을 꿈꾸는 경마의 세계에서 쉬지 않고 성실하게 달려 자기 밥벌이만 간신히 하는 별종인 셈이다. 우리의 힘은 어쩌면 그런 성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 민중으로 지금 이 땅에 서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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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로폰 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제각기 거의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로 이루어진 동맹을 이끌었다. 해군은 아테네 쪽이 강했고, 육군은 스파르타 쪽이 강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전에도 전쟁을 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BC 445년 30년조약을 맺고 휴전을 했으나, BC 433년 아테네가 코르키라와 동맹을 맺으면서 협정을 위반했다. BC 431년 봄,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테베가 아테네의 동맹국인 플라타이아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 결말이 났다. 아테네 해군은 이 해전에서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은 스파르타 해군에 참패를 당했다. 아테네는 BC 404년 4월 스파르타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문화적으로 가장 진보한 그리스 도시국가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8권으로 된 투키디데스의 역사서인데 기원전 411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다. 문체는 이 책의 약 4분의 1을 점하고 있는 연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조법과 같은 당시의 수사학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창출해 내고 있다. 하나하나의 문장은 사상이 지나치게 응집되어 추상적 문구의 지나친 사용과 함께 때때로 난해한 흠이 있으나 사색의 발자취가 그대로 문장에 남아 있다는 점에 투키디데스 문체의 독특한 매력을 찾아 볼 수 있다.
세계를 뒤흔든 기마군단사
목차
1. 말의 진화
2. 우르의 자개 상자
3. 메소포타미아 흥망은
4. 전차의 위용과 유럽어족의 출현
5. 마리안누라는 귀족과 KIKKULI 교본
6. 이집트 파라오 그리고 투랑카멘
7 .투랑카멘 전차로 본 이집트 전차
8. 기원전 1275년 카데서 전차 전쟁
9. 지구상 기병의 첫 출현, 앗시리아
10.히타이트와 스키타이
11.바람의 제국 스키타이 1
12.바람의제국 스키타이 2
13. 스키타이와 흉노
14.페르시아 기병
15. 페르시아 AKHAL-TEKE말과 니사에만 군마
16. 그리스 페르시아전쟁(살라미스 해전)
17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플라타이아 전투)
18. 키루스 대왕과 크세노폰
19. 그리스 내전 그리고 마케도니아 기병
20. 마케도니아 기병의 알렉산더 1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자료정리중
21. 마케도니아 기병의 알렉산더 2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료정리중
22. 흉노와 한나라 1
23. 흉노와 한나라 2
24. 흉노와 한나라 3
25. 흉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26.말을 사랑한 한무제
27. 문무왕이 흉노족이라는
28. 고조선의 수레-------현재 이시점으로 쓸려고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