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4 / 태초부터 계신 예수님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장 24~25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나옵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요한복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고귀합니다. 생명은 LIFE로서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어둠이 있습니다. 어둠이 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일시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참 생명을 찾을 수 있을까요? 돈을 벌고 권력을 잡고 인기를 얻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어둠은 일시적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 안에 참 생명이 있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참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참 생명을 찾고 참 생명으로 우리의 인생이 밝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세기의 태초와 달리 시공이 시작되기 전을 의미합니다.
천지를 만들기 전의 그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시공간이 없는 때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는 때입니다. 예수님은 그때 말씀으로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계시고 시공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말씀은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습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표적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신하는 표적을 보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믿음을 고백하며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신하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왕의 신하는 네 아들이 병이 나았다는 말씀을 믿고 집에 갔습니다.
집에 가니 아들은 병이 나아있었습니다. 병이 나은 때를 알아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때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신하는 이를 통하여 말씀이 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시는 것을 믿고 그 온 집이 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말씀이 유대인의 담장을 넘어 로마에 전파되었습니다.
말씀은 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실 뿐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전한 그 말씀이 시간을 넘어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2000년에 걸쳐서 많은 사람이 그 말씀으로 변화되었습니다.
2천 년 전에 중동지방에서 쓴 요한복음 말씀이 지금 여기서 살아서 일하십니다.
말씀은 시간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우리가 한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2천 년이 지난 지금 한국 땅에서 일하십니다.
또한 말씀은 인격적입니다. 말씀은 사상과 감정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표적과 기적을 통해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병 고침을 통하여, 시험이나 직장, 자격 합격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적과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맺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표적과 기적보다는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관계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지구는 없어져도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신앙이 변하지 않습니다.
표적 신앙은 그들의 믿음이 일시적입니다. 방언을 하고 환상을 보아도 쉽게 뜨거웠다가 쉽게 식어버립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기초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분명히 다른 분인데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창세기 2장 말씀을 통해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하나가 될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두 명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다른 분이지만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령님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며 함께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라면 우리는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목자라면 우리는 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생명으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될 때 생명이 태어나듯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이 하나가 되어 거기서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의 빛입니다.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은 사람들의 생명에는 어둠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인생에 어둠이 있습니다. 죽음의 그늘이 덮여 있습니다. 그 안에 죄가 있습니다.
슬픔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교만합니다. 자기중심적이고 거짓됩니다.
이런 죄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사람들의 삶에 어둠이 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떠난 생명은 잠시 살아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시들어버리고 나중에는 말라버립니다.
그들이 어떻게 어둠을 물리칠 수 있습니까? 생명의 빛이 비치면 어둠이 물러납니다.
어둠은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 생명이 참 생명 되신 예수님과 접붙일 때 우리 생명은 살아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연결되면 우리 안에 어둠이 물러갑니다.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맛볼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실하고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완전하게 어둠이 물러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도 부활하여 우리는 완전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때 완전한 기쁨과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