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청년 JAWOO의 자아 찾기
선재도는 아름다운 섬이다. 하루에 두 번, 간조때면 아름다운 모랫길을 내주는 목섬과 10가구가 오붓하게 들어앉은 측도를 거느리고 한사리, 두사리 물때에 맞추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있다. 6년 전 선재대교가 놓인 뒤, 배 대신 차를 몰고 드나들 수 있게 되면서 섬사람들의 삶의 모양새도 조금씩 변해가고 아름다운 선재도를 값비싼 카메라에 담아가는 사진가들도 부쩍 늘었다.
섬에서 나고 자란 청년 김연용도 그들처럼 목섬을, 측도를, 갯벌을, 사진에 담는다. 그가 가진 장비와 독학으로 닦은 기술이란 것은 막대한 자본을 가졌으며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진작가들의 그것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그의 사진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진가 김연용이 피사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다. 그것은 제아무리 기술이 뛰어나고 값비싼 장비를 지닌 사진가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만의 묵묵한 섬사랑인 것이다. 곁에 머무르는 것, 그것이 그의 사랑의 방식이다. 그래서 그는 선재도에, 아버지 곁에, 갯벌에 머무른다.
젊은 혈기를 잠재우고 눈 먼 아버지 곁에 머무르기 위해 뭍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섬으로 돌아온 효자 김연용, 이 사실만으로 그는 공중파 방송에 소개되고 그에 따르는 유명세를 치르고 여전히 각종 매체에 기사화되고 있다. ‘효자’라는 타이틀로 그는 첫번째 전시 ‘아버지의 바다’를 치러 냈다. 그러나 2004년 1회 개인전에서 아버지가 전시의 주제였다면 이번 전시 ‘꿈꾸는 섬’에서 그의 아버지는 섬, 바다, 갯벌과 함께 하나의 담담한 소재가 되어 보여질 뿐 그는 발칙하게도‘효자 김연용’을 만나러 온 사람들에게 섬생활 속에서 일탈을 꿈꾸는 젊은 청년이자 예술에 관해 고민하는 사진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고자 한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공인된 효자로서 인정을 받은 그가 ‘아버지의 바다’ 두 번째 이야기 역시 아름다운 섬의 풍광을 배경으로 더듬거리며 바닷일을 하는 아버지의 사진만으로 일관한다 해도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그의 작업이라는 것 또한 그간 아버지를 찍은 수만장의 작업물들 중 잘나온 사진 몇 장을 골라 그럴듯한 액자를 끼워 걸어 놓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본인도 쉽고 보는 사람도 쉽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런 식이라면 그의 3회, 4회, 5회 개인전도 어떤 모양새가 될 것인가 쉽게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과정들 속에서 우리는 그를 사진가가 아닌 효자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쉬운 길로 가지 않으려 한다.
내가 아는 김연용은 효자라고 불리기를 참 싫어한다.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지 않았으니 정말 싫어하는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당신의 아버지가 그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라고 묻는다. 그가 던지는 이 질문은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다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일종의 반박인 셈이다. 그렇지만 범인(凡人)들에게 그 답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치만은 않다. 현재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직업, 사랑, 꿈 등 많은 저울질과 갈등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문제인 것이다.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그이지만 어쨌거나 드러난 사실은 그에게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과감히 결단을 내리고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그를 효자라고 부르는 이유이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오래도록 회자되어도 두고두고 감동을 전해줄만한 충분한 이야기꺼리임에 분명하다.
꿈많던 청년 김연용이 당뇨합병증으로 인한 아버지의 실명과 절망을 접하고 도시에서의 미래와 꿈을 포기한 채 ‘젊은 혈기를 잠재우고’ 아버지 곁에 어부로서 머무르는 섬에서의 삶을 택했다. 그렇다면, 그의 ‘젊은 혈기’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정말 얌전히 잠을 자고 있을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분출구를 찾고 있었을 뿐이다. 이번 전시 ‘꿈꾸는 섬’에서 그것은 슬그머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동일성(同一性)과 상이성(相異性)의 승부에서 시간은 늘 동일성의 손을 들어주기 때문에, 양갈래길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했었느냐는 이 시점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유토피아(Utopia)에 이르는 길이 멀고 험하다면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를 유토피아로 만들면 된다’ Jawoo 김연용의 모습 속에서 나는 그런 의지를 발견한다. 생계를 위해 가족 모두가 운영하는 음식점 ‘바다향기’에 Jazz 와 Classic음악을 틀고 때마다 즐겁고 특별한 이벤트를 고민하고 손님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려 애를 쓴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틈틈이 서예와 스케치를 하고, 와인과 영화를 즐기며 지인들과 사진작업과 예술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그가 ‘섬청년’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취미들은 무척 사치스러운 편에 속한다.
그렇지만 현실에서의 그는 가게에서 손님을 맞는 일과 바닷일을 번갈아 하느라 끼니도 제때에 챙기지 못하며, 투박한 손은 늘 비린내와 경운기 기름때에 절고 그물과 말장에 찢긴 작은 생채기 투성이이다. 또한 그의 눈은 행여 길이라도 잃을까 밥을 먹으면서도 늘 눈먼 아버지를 쫓고 찾아온 손님들과 따뜻한 미소로 한번이라도 더 눈을 맞추느라 쉴 사이가 없다. 그러나 그 거친 손으로 묵직하고 매끈한 카메라를 잡았을 때 그 손은 더 할 나위 없이 능숙한 사진가의 손이 되고 그 눈은 피사체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았지만 최상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날카로운 눈이 된다. 그럴 때의 그에게서는 자신을 촌놈이라고 지칭하며 멋적게 웃는 순박한 섬청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순간을 잡아내는 것이 사진이라지만 그의 사진에 담긴 순간은 순간이면서도 순간이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그의 사진에 담기는 피사체들과 함께하는 길고도 오랜 시간이 한 장의 사진에 응축되어 담기는 것이다. 바다와 갯벌과 아버지와 그는 뗄 수 없는 운명이고 그는 기쁠 때나 슬플때나 그들과 함께하면서 대상에 대한 끝없는 바라보기와 사유를 통해 어떤 식으로 찍어야 할 지를 결정하고, 찍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바로 그자리에 있음으로써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자리를 지킨다는 것’의 위력은 시간이 쌓일수록 그의 사진에서 서서히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최근의 작업들에서 그는 피사체가 되는 대상에 자신을 포함시켰다. 그간의 작업들에서는 함께 어우러져 살면서도 사진속에서는 스스로를 관찰자의 입장으로 놓아두었었다면 이번에는 그 대상에 스스로를 포함시켜 바다와 갯벌과 아버지의 곁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지켜본다. 스스로에게 객관적인 시선을 갖기까지 그는 매체가 규정지은 이미지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자칫 아버지에게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 그가 이번 Self Portrate를 통해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효자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염색한 머리, 귀에 매달린 피어싱과 귀걸이들, 뻘에 처박히거나 죄수복을 입은 모습 등 ‘효자’라는 단어에 어깃장을 놓듯 다소 생소한 모습을 연출한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섬생활의 지리멸렬함을 어쩌지 못하는 촌놈의 몸부림쯤으로 치부해 둘까? 어떻게 보면 무척 진지해보이면서도 익살스러워 보이기까지하는 이런 모습들은 그에게 있어 타자의 시선으로 꿰어 맞춰진 자아가 아닌 그 시선 너머에 있는 자신의 욕망과 마주치는 조심스러운 순간이다. 그자신에게는 ‘꿈꾸는 섬’이 사진가로서의 자질을 평가받는 첫번째 개인전과 다름없는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것이다. 자칫 냉엄한 심판대가 될 수도 있는 이 자리에 용기를 내어 선 그를 우리는 따뜻한 격려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꿈꾸는 청년 김연용이 있어 ‘꿈꾸는 섬’이 되었다. 보통의 젊은이들이 흔히 가슴에 품을 만한 꿈들임에도 섬에서 꾸는 꿈은 더 아득하지만 찬란하다.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섬청년 김연용이 어떤 꿈들을 꾸고 이루는지, 그의 유토피아는 무엇인지, 외지인인 우리들에게도 섬과 그 속에 담긴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그의 눈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이애리 / 광고 그래픽 디자이너, 아트디렉터
여러 생명들이 사는 어느 섬, Jawoo의 사진
아트 패브릭위에 프린트한 연접 파노라마 이미지, 한 사람 없는 섬 측도. 코팅안한 판화지과 위에 드럼 스캔한 필름들을 디지털로 피에조(piezo) 인화한 바다 풍경과 어구들과 아이들, 개 그리고 널린 생선 그 옆의 기계와 버려진 물건들 아 그리고 갯벌의 물결무늬와 많은 아버지들. 이게 내 앞에 놓인 자료이다. 자우 김연용, 사진작가라고 하기에는 그의 전업방식이 아직은 경계를 넘나드는 편인 사람. 엄밀한 작업을 계속할 가능성과 함께 진부한 기호-이미지들로 고착될 염려도 함께 지닌 사진가, 아마도 이것이 내가 아는 그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터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한 그 밖의 다른 저널리즘적인 호기심에서 일단 자유롭고자 한다. 내가 아는 작가로서의 그는 현상과 인화, 드라이마운트 등 전시작업까지 혼자서 다하는 일관 작업자라는 점이 더 중요해 보인다. 다만 나중에 이야기되겠으되 그에게 아버지라는 대문자 주체는 녹녹치 않은 생각거리라고 봐야 맞을 것 같다. 상식이 되어버린 애증의 관건으로서의 아버지 상이 아니라, 반복과 차이를 사유하는 작은 대상으로 전치된 욕망의 주체 아버지. 그렇다 라깡적인 대자적 반복일시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이미지와 형상사유 속에는 물질과 기억이라는 집요한 고착점이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그는 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애쓴다. 아버지의 과거에서부터 바다의 변화와 거기 깃든 인공물, 사람들, 다른 생명들까지 그것들의 흔적을 물질적으로 기록하는 당연히 전통적인 방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서 아마도 그의 작업이 때로는 많이 가라앉힌 실물사진들로 남는 과제를 스스로 떠맡는 것이리라. 문제는 그 안온하고 이따금만 출렁이는 풍경들 속에 어떤 관계의 정치가 숨어 있느냐 하는 좀 엉뚱한 질문이다.
대저 정치란 정치적이길 중단하는 순간을 맞아 가장 확연해진다는 진단이 있다. 쓰임새로만 이해되길 아주 강고하게 거부하는 그런 정치성 말이다. 일종의 윤리적 행위이기도 한 이 입장을 나는 김연용이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가 (작은 타자로서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대상을 이미지로 전유하는 태도와 여러 생명들―심지어 기계와 도구들까지 포섭하려드는 자세에는 그렇게 계속될 수만은 없는 포함적 종합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시 대상들의 자유로운 발현을 수긍하는 연접적 사유로 나아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많이 거친 이항대립의 질문들은, 가령 너는 무엇이냐 혹은 나와 아버지-타자는 무슨 관계인가란 식의 소비적인 의문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좀 구체적으로 거론하자면 일례로 우리가 그의 사진들에 등장하는 어구나 선박들, 갯벌 바지랑대나 인도선 등이 어떤 용도인지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걸 좀 알아 본 다음, 아 그런데 사진 속에선 이들이 그런 용도이기를 그치는 순간이 있구나하고 딴 생각에 빠져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치 고흐의 구두를 놓고 한 철학자와 미술사가가 논쟁하였듯이 대상의 진리성은 그 용도와 주체의 신원을 떠날 수 있을 때 더 확산되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상 이미지들의 기원과 쓰임을 아예 잊어버리는 상식 이하의 짓을 부추기려는 것은 아니다. 기원과 쓰임이 일단 완전히 분리된 채로 그것도 무차별적으로 (재)생산되어 제시되는 시뮬라크라들의 홍수인 시대의 방향에 합류하지 않을 요량이기 때문이다. 대신 매우 순환적이긴 하지만 그 분리를 받아들였다가 폐기해 보는 자유로운 연상이 한결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대상들의 자립과 더 진전된 종합을 기대하는 시선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타자의 정치를 쉽게 수긍하는 대신 (대)타자와 주체의 상호작용이 그 자체가 비정치적인 차원으로 움직여나가도록 깊이 내관하며 밖을 내다보자는 제안인 셈이다.
그럴 때, 일부러 해상도를 떨어뜨리거나 조도를 변화시켜 후반 작업한 그의 여러 풍경 이미지들이 차라리 그렇게 겹 지어진 시선들에 알맞게 들어오게 된다. 그 속에서 아버지란 주체와 또 다른 사물들의 존재감은 점점 희석되어 멀어지거나 반대로 가볍게 떠올라오는 유영을 재현해 내는 것이다. 하나의 다른 예는 하모니카를 부는 아버지이다. 이때 그의 입과 소리 내는 기계로서의 대상 하모니카는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로 일체화를 이루는 것 같다. 즉 몸과 그 연장으로서의 기계가 소리 내는 행위라는 육화를 일종의 상징처럼 이루어내면서 우리에게 인정을 확인하는 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주 흔한 이 장면화가 결국 드러내는 바는 실제적인 것과 잠재적(virtual)인 것의 긴장에 관한 사유이다. 왜냐하면 그 프레임이 포괄하고 있는바 물건과 몸의 다른 기관 되기란 많은 경우 실제적인 영역만을 부각시키거나 아니면 기껏 재현되는 이미지의 순간성 만을 포착하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소리와 바람의 흐름과 갠 하늘과 젖은 갯벌이 인체를 포함한 움직임을 포섭하여 다른 잠재적인 차원으로 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스틸은 유독 원경의 아웃 포커스를 포함하여 반사실적이 됨을 주목하고 싶다.
이제 우리가 보기에 섬과 자화상과 군상이 연결되는 일련의 흐름에 대한 것이 논평의 마지막 단계가 되어야 하겠다. 이전의 작업들과 이번 전시가 다른 점은 바로 이 연접하는 사유를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쫒아가는 듯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계열의 움직임을 이미지-운동으로부터 이미지-사건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본다. 잘 아는 대로 이미지-사건은 시간 속의 새로운 발현이며 도착이자 군집을 이루는 생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화상들조차 각기 다른 개인들로 되어서 각개 약진하고 또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순간에 도착하기도 한다. 이런 것을 일러 한 삶들의 다수성이라고 불러보고 싶다. 짐작컨대 아마 김연용은 이것을 독특성에 더 연루시키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으나, 독특성과 다중으로서의 삶은 별개가 아니니 아무래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그의 사진들이 도달하는 지점은 바로 그런 구체로의 하강과 새로운 삶의 보편으로 다시 솟구치는 순간들일 것이다. 그의 사진들이 잠시 아득하다.
손지태 / <갤러리 환> 디렉터, 문학박사
An Island Inhabited By Lives, Jawoo's Photographs
Jitae Sohn, Ph.D. Art Director and Independent Researcher
A panoramic image printed on art fabric in which you can see a desert island. Piezoelectricity-driven film cuts of the drum scanned print incorporating naval scenic views, fishing tackles, laughing children, a dog alongside of dried croakers, devastating machinery near them, and O! watermarks on the fens trampled down with his father's dragging footsteps. All these are the raw materials to which I should address for now. Jawoo Kim Youn-yong, a photo artist, who I understand works in and out of redrawing boundaries of working flows in the technique. A lot of potentials with exactness in the field, not withstanding a latent apprehension that you suspect underlies headlong adherences to banal sign-images, this is what I know of him all and all. But for a while, I should exempt myself from any indulgence into journalistic interests in him. The Subject of father figure though deserves much attention from a critique of his work. Not as a much rendered Oedipal object of love and hatred, but Lacanian reflective repetitions within a range of petit á, the father figures in these works surely make it enriched to think differences in their terms. On the other hand, in his images and figurative thinking lie tenacious fixations on matter and memory, as he has tried to remember various objects. For he adheres to a naturally traditional way of registering in materialistic forms a wide variety of traces of experiences from his father's past, inventories of throw-outs, people, to other natural habitants and else. Probably his works thus remain entrenched in a more downstream still-photo crafts. There arises a rather occult problematic of thinking what politics of the relation dwell in these placid but occasionally floating landscapes. Politics comes to be most apparent, it appears to say, when it ceases to be political at all. It is quite certain this politic resists to being useful in any sense. It seems to me that Jawoo shares this standpoint with many other contemporaries, which is a kind of ethical acts as well. Because his positionality in ways of appropriating into images objects including a father, and subsuming many lives and even machineries and implements, proceeds with an ever-reaching comprehension to the connective thinking which affirms all the manifestations of them. Hence an opening for the harsh binaries of questions concerning what it is to us or what relationship we do have with the others such as fathers. To be more specific, for instance, I presume we need to digress into another thought that all of a sudden makes uninstrumental at all various objects in the photos like fishing outfits, vessels, clot hespoles, and leads on the wetland after recognizing them in their uses. It is more likely in the moment that reminds us of an encounter between Martin Heidegger and Meyer Schapiro through Jacques Derrida on the truth in painting. There we can acknowledge the truth might become prolific again as it takes off from the usages and subjective origins of its object. It goes, however, without saying that we do not want to urge ourselves to precipitate a commonplace trend of certain amnesia contemporaneous with profusions of simulacra in abundance. In lieu of this, we subscribe to a rather recurring association which accepts and then nullifies those divisive identifiers amongst subjects and origins, and therein a new vision emerging from inside can we expect that creates newer establishments of object and their development in syntheses. And then comes a suggestion that directs toward the apolitical terrain instead, where we both introspect and outlook at the same time without being easily subjugated by the politics of others. In doing so, a doubled perception can place into its arena his images of landscape, which he has downplayed the resolutions and made various the intensity of illumination afterwards. Therein the father-subject and the presence of others either regress to dissolution, or on the contrary rise to the surface and represent a line of flights. Another typical instance is a body standing upside down in the pit hole with a shovel as an extension of itself. It seems that in this moment the limb and the tool incorporate into a body without organ on the earth. This act of incarnation symbolizes a moment of approval from us, when the body and a machine-tool as its extension can assimilate with each other. In the event, a very commonplace frame of the shot suggests the latent tension between the real and the virtual, that in usual this inclusion subsumed in being another organ of things and body stands out a realm of the real, or rather merely recaptures immediate images, but here transgresses to the virtuality bringing all the movements of human subjects in the wind, clear-off sky, and on the wetland. This still, therefore, becomes unrealistic with the out-focused backdrop. Now the last commentary of the works might comprise of a flow that connects the islands, self-portraits and a group of people. A different phase from his previous work, I observe, arrives with an intensional pursuing of that thought in connections. Again I presume this movement a shift from image-movements to image-events. The image-event, as you all may know, calls for the new manifestations, arrivals and creations in multitudes. Even those self-portraits turn out to be many individualities and develop towards a naturally congregating moment of their subjects. And it could be termed as the multitudes of a life. Presumably, Kim would like to relate it to the singularity, but the one and the other are inseparables after all. His photo works in their last instance attain to the point where they accomplish the double contours of descending to the particular and soaring unto universal lives. All on a sudden, his photographs remain silent and far in the dist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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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멋진사나이~ 자우님... 항상 건강하시길...^^
응원하고 기대합니다. ^^
자우님! 축하혀고요.....자우님 자신이 정 ~말 만족하는 시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바빴을텐데... 전시회 준비까지... 애쓴 보람만큼 좋은 전신회 되었으면 좋겠네요.. 축하합니다....
난 왜! 안보이지? 착하게 살았는데..... ;;
답글로 글 내용을 달아 놓았습니다...
봤어요~ 정말 멋진 팜플렛과 ....... 자우는 어깨가 괜 찮은지 몰라 ~ .;;
오빠.. 너무 멋지당!!! 쵝오~~~^^
음...답글 지웠음.
음.. 아마추어 같지가 않아.. 프로 할껴? 제1회 사진작가 김연용님의 전시회가 기다려 지네^^
오빠~ 꼭 보러 갈께여^^*
시간이 더 있었으면하는 아쉬움들이..듭니다. 바다향기앞 마네킹 데리고 올라가서 설치작업도 하나 할 예정이고요, 그전시기간동안 설치물에 관람객들이 오브제를 덧붙여서 완성되는 퍼포먼스도 할생각. 오프닝때 다과도 준비해야하고, 사진이 판매되려면 좀더 시스템화된 경로를 만들어야하고요, 작품보증서, 포트폴리오 등.. 프로젝터로 간단히보여줄 소스도 만들어야하고 잔잔한 음악도 있어야하니까, 음향시설도.. 에휴~ 갤러리에서 연락이왔는데, 일주일 연장전시 하자네요~
연장 전시면....두배로 축하할 일이죠?^^ 몸도, 맘도 바쁘겠어요. 건강 조심하고 애 쓴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길 빌어요.
애고고... 저 행복한 고민하는거 봐봐봐봐~~~서툴더라도 하다보면 됨...
한생곤형님 부친상때문에 부랴부랴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시간이 갑자기 모자라게 되었어요. 올라오면 전시하루전인데... 다과회 도움주실분!!!
도움어케 드리면 되나요? 수요일에? 그나저나 생곤오빠 아버지? ㅠ.ㅜ 아..............
도움이야...같이 있어주는 것만 해도 도움이 될 수 있겠죠...그저 시간 봉사가 큰 도움이려니 하는 생각을 합니다...눈치도 같이 있어야 하겠죠...입구에서 어서옵쇼...하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될 듯...
자우가 너무 바쁜데..... 마음만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으니....
역시 주인장 인기폭발~~애리언뉘 글 굿^^
잘 올라왔습니다. 다과회는 날개님께서 도맡아주기로 하셔서 마음 한시름 놓입니다. 시간없다 아자아자!! 다들 고마워요~
이런.. 도 맡아라니요...민망하네요. 같이 도와 준 동생, 언니가 더 수고가 많았는걸요. 자우도 애 많이 썼어요.좋던걸요.사진도...설치물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