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6. 26 금요일
(1278 회)
- 상기하자! 625 전쟁 -
어제 25일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 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발효되면서
3년 1개월 2일, 총 1129일 동안의 전투를 마감하고 휴전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정전협정에 따라 설치된 군사정전위원회가 한반도의 정전체제 이행 여부를 감시하게 되었고 종전협정이 아닌 정전협정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 한국전쟁은 일시 중단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유엔참전국 16개국의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쳐 지켜온 나라입니다.
다시는 이런전쟁이 되풀이 되지않기를 기도드리면서...
625전쟁 당시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한 두분의 전쟁영웅, 이야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 은평평화공원의
윌리엄 쇼 동상 '
서울 녹번동 .
은평평화공원에
군복차림의 동상이 있다.
6·25전쟁 첫 해인
1950년 9월 22일 서울수복작전 때 녹번리 전투에서 29세로 전사한 미국 해군 대위
윌리엄 해밀턴 쇼를 기리는 조형물이다.
동상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의 한국 선교사 윌리엄 얼 쇼의 외아들로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미국 웨슬리언대를 졸업하고
2차 세계대전 중 해군 소위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해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며 한국해안경비대 창설에 기여했다.
제대 후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젊은 부인과 두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재입대했다.
이때 그는 부모와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만 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
유창한 한국어로 맥아더 장군을 보좌하며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그는 해병대로 보직을 바꿔 서울 탈환에 나섰다가 인민군 매복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의 숭고한 사랑에 감명 받은 미국 감리교인들은
아버지 윌리엄 얼 쇼가 공동창립한 대전감리교
신학교(현 목원대)에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교회’를 건립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와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바쳤다.
아들과 며느리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고
내한해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에 힘썼다.
은평평화공원
그의 동상 옆에는 기념비도 있다.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전 문교부 장관 등 60여 명이
‘키가 크고 평양 말씨를 쓰던 벽안의 친구’를 위해
1956년 녹번삼거리에 세웠다가 이곳으로 옮겨온 비석이다.
비석 받침대에는 제자이자 친구인 해군사관학교 2기생들의 헌사가 새겨져 있다.
그와 한국 친구들의 특별했던 우정은 국가 간 우방과 동맹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한국을 위해 목숨보다 더 큰 사랑을 바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매년 6월 6일과 9월 22일 이곳을 찾는다.
금년 현충일에도 그의 동상 앞에 오래 고개를 숙이고 눈물 짓는 사람들이 있었다.
눈물이 납니다.
자기가 태어난 나라
코리아를 자기 조국 이라고 생각하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중
''내 조국에 전쟁이 났는데 어떻게 마음 편히 공부하고 있겠는가.
조국에 평화가 온 다음에 공부를 해도 늦지 않다''고 하며
부인과 아들을 처가에 맡기고 자원 입대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애국충정을 높이 기리며...
' 별을 버린 장군 '
6·25 전쟁에서 연합군 중 프랑스군을 지휘하던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장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군을 상대로 나르비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맹장이었습니다.
전쟁 후 3성 장군까지 계급이 올라갔지만,
6·25 전쟁에 참전할 때는 5단계나 계급이 내려간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 유린당한 나라를
재건하던 프랑스는 해외에 대규모의 파병을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 생각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장은
제2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 많은 예비역을 주축으로
일부 현역 자원병을 지원받아 대대 단위의 부대를 창설했고 스스로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국방차관이 중장이라는 높은 계급으로 대대장을 맡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하자.
스스로 계급을 중령으로 강등하고 참전한 것입니다.
당시 그에게는 새로 태어날 자녀까지 있었기에 아내뿐만 아니라 주변 모두가 만류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계급은 중요하지 않다.
곧 태어날 자식에게 유엔군의 한 사람으로서
평화라는 숭고한 가치를 위해 참전했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
그렇게 대대장이 된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중령은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내어 유엔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지평리 전투 당시 프랑스군은 중공군 3개 사단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이었으나 사흘간의 백병전에서 중공군을 격파했으며 유엔군이 중공군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 전쟁사를 살펴보면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라는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에서
활약할 때 사용한 가명인 '랄프 몽클라르'라는
이름을 6·25 전쟁 당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군인에게 계급이란 때로는 목숨보다도 소중한, 그동안의 명예가 담겨 있는 상징과 같은데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
계급을 낮춘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평화와 자유 등 많은 소중한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 많은 희생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