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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正道의 마지막 支인 바른 삼매는
色界禪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色과 연관되어 있는 세상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욕계의 거친 물질의 세상은 아니어서
욕계 중생처럼 거친 음식을 먹거나 남녀 性이 있어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제4선은 8正道의 마지막 중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제4선은 廣果天(Vehapphalā)과 무상유정천(Asaññā-sattā)과 정거천(Suddhā-vāsā)으로
세분하기도 하는데 앞의 두 天(경지)은 범부들이 태어나기도 하여
어떤 중생들은 이 곳에서 죽어서 욕계로 다시 돌아오기도 하지만
8正道의 마지막 중에 마지막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정거천(Suddhā-vāsā)은
범부들은 태어날 수 없고 불환자만이 태어날 수 있는 세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세존께서도 과거 수많은 세상에 태어났지만 이 세상에는 태어나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한 결과이지만 욕계 인간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지 싶습니다.
또한 7식주 2처에서 색계4선천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정거천 때문인 것으로 짐작합니다.
세존께서도 욕계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깨달음을 얻으신 과정은 4禪-3明입니다.
이와 같이 색계4선(특히 정거천)은 다른 경지와 달리 특별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삼매에 대한 이해는 이런 저런 궁리로는 불가능한 세상이고
실참수행하여 직접 경험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만
경문을 의지해도 이해되지 않는 몇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4선에는 호흡(風大)가 사라지고, 가라앉고, 고요하고, 끊어지고, 멸한다면
제2선에서 이미 地大가 멸하고, 제3선과 제4선 사이에서 水大, 火大가 사라졌다면
더 이상 色이랄 것도 없는데 어째서 색계라고 하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혹시 (色)界를 緣한 (色)想은 아직 존속하는 경지는 아닌지 하는 생각은 듭니다.
또한 S48:40(受가 사라지는 과정)도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제4선을 수행하면 種種界을 꿰뚫게 된다(anekadhātupaṭivedha)고 합니다.
이하 참고 자료입니다.
“kathañca, bhikkhave, bhikkhu passaddhakāyasaṅkhāro hoti?
idha, bhikkhave,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passaddhakāyasaṅkhāro hoti.
3.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몸의 의도적 행위[身行]가 고요한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151) 비구는 몸의 의도적 행위가 고요하다.
151) “제 4선에 들어 들숨날숨이 가라앉은 상태를 뜻한다.”(AA.iii.81)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③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④ '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고요> 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
Passambhati,[Caus.of passambhati] to calm down,quiet,allay (=nirodheti).
ppr.passambhayaṁ
[pa+śrambh] to calm down,to be quiet -- pp.passaddha; Caus.passambheti
“puna caparaṃ, bhikkhave, idhekacco puggalo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4.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so tadassādeti, taṃ nikāmeti, tena ca vittiṃ āpajjati.
그는 이 선(禪)을 즐기고, 이것을 바라고, 이것에 만족한다.
tattha ṭhito tadadhimutto tabbahulavihārī aparihīno kālaṃ kurumāno
vehapphal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그는 여기에 굳게 서고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여기에 많이 머물고 이것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아서
죽은 뒤에 광과천(廣果天)290)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290) '광과천(廣果天)'은 Vehapphalā의 역어이다. 광과천은 색계 4선천의 첫 번째 천상인데 이 천상은 다른 천상보다 그 과보가 수승하기 때문에 광과천이라 부른다고 한다. 4선천은 광과천(Veha-pphalā)과 무상유정천(Asaññā-sattā)과 정거천(Suddhā-vāsā)이다. 4선에 들어서 태어난 이 천상의 경지는 다른 천상에 비하면 그 과보가 엄청나게 크다는 뜻이다.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으로 옮겨지는 Asaññā-satta는 인식에 대해서 혐오하기 때문에(saññā-virāga) 이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무상유정천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6장 §28 등을 참조하고 정거천은 다음 경의 주해를 참조할 것.
vehapphalānaṃ, bhikkhave, devānaṃ pañca kappasatāni āyuppamāṇaṃ.
비구들이여, 광과천의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5백 겁이다.
tattha puthujjano yāvatāyukaṃ ṭhatvā yāvatakaṃ tesaṃ devānaṃ āyuppamāṇaṃ
taṃ sabbaṃ khepetvā nirayampi gacchati tiracchānayonimpi gacchati pettivisayampi gacchati.
거기서 범부는 그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거기 머물다가 그 기간이 모두 다하면
지옥에도 가고 축생에도 가고 아귀에도 간다.
bhagavato pana sāvako tattha yāvatāyukaṃ ṭhatvā yāvatakaṃ tesaṃ devānaṃ āyuppamāṇaṃ
taṃ sabbaṃ khepetvā tasmiṃyeva bhave parinibbāyati.
그러나 세존의 제자는 그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거기 머물다가
그 기간이 모두 다하면 바로 그 광과천에서 반열반에 든다.
ayaṃ kho, bhikkhave, viseso ayaṃ adhippayāso idaṃ nānākaraṇaṃ sutavato ariyasāvakassa
assutavatā puthujjanena, yadidaṃ gatiyā upapattiyā sati.
비구들이여, 갈 곳과 태어남에 관한 한 이것이 많이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 사이의 차이점이고 이것이 특별한 점이고 이것이 다른 점이다.
“santi, bhikkhave, asaññasattā nāma devā.
saññuppādā ca pana te devā tamhā kāyā cavanti.
비구들이여, 무상유정(無想有情)이라는 신들이 있다.
그들은 인식이 생겨나면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vivicceva kāmehi ... pe ...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ddhāvās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ayaṃ, bhikkhave, upapatti asādhāraṇā puthujjanehi.
그는 거기서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심리현상들이건 알음알이건291)
그러한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292)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정거천(淨居天)293)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294)
비구들이여, 이 [정거천에] 태어나는 것은 범부들과는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291) 즉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를 말하고 있다.
292) “이와 같이 오온에 대해서 삼특상(三特相, tilakkhaṇa, 무상 · 고 · 무아)을 제기하여 꿰뚫어 본 뒤에 세 가지 도와 세 가지 과(즉 예류도부터 불환과까지)를 실현한다.” (AA.iii.126)
오온의 무상 · 고 · 무아를 통찰하는 것은 초기경의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무상 · 고 · 무아의 통찰은 본경처럼 11가지의 통찰로 확장이 되고 다시 『무애해도』 (Ps.ii.238)에서는 40가지 방법으로 심화가 된다. 40가지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XX.18을 참조할 것.
그리고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앞 경에서 언급된 범신천부터 광과천까지는 단지 본삼매 즉 禪만을 닦아서도 갈 수 있지만, 정거천에는 이러한 본삼매 즉 네 가지 禪을 닦고 그리고 반드시 오온에 대해서 무상 · 고 · 무아의 삼특상을 통찰해야 즉 위빳사나를 닦아야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거천은 깨달은 성자들만이 그것도 불환자만이 태어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93) '정거천(淨居天)'은 Suddhāvāsa를 옮긴 것인데 이것은 suddha(청정함)+vāsa(거주)의 합성어이다. 불환자의 정형구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었다.”이듯이 경과 주석서들에 의하면 정거천은 불환과를 얻은 자들만이 태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정거천은 다시 다섯 가지 천들로 구성되는데 불환과를 얻은 자들은 거기에 태어나서 다시는 이보다 더 낮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거기서 열반에 든다고 한다. 정거천에 속하는 다섯 가지 천들은 다음과 같다.
① 무번천(無煩天, 아위하, Avihā): aviha의 어원은 알려지지 않았다. 주석서에서는 자신의 성취로부터 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아위하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VibhA.521; DA.ii.480)
② 무열천(無熱天, 아땁빠, Atappā): atappa는 a(부정접두어)+ √tap(to burn)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이 천상에 사는 천신들은 다른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DA.ii.480; VbhA.521)
③ 선현천(善現天, 수닷사, Sudassā): su(좋은, 쉬운)+√dṛś(to see)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보기에 아주 멋진'을 뜻한다.
④ 선견천(善見天, 수닷시, Sudassī): 선현과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⑤ 색구경천(色究竟天, 아까닛타, Akaniṭṭhā): akaniṭṭhā는 kaññā(어린)의 비교급인 kaniṭṭhā에 부정접두어 a-를 첨가하여 만든 명사이다. 이 천상에 사는 신들은 그 공덕과 행복을 누림에 있어 최상이며 거기에는 어린 자들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DA.ii.70) 색계 천상의 제일 으뜸이라 해서 중국에서는 색구경천으로 옮겼다.
불환자가 어떻게 해서 이 다섯 천상에 다르게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믿음[信] · 정진(精進) · 마음챙김[念] · 삼매[定] · 통찰지[慧]의 다섯 가지 기능[五根]과 배대하여 설명한다.(『아비담마 길라잡이』 5장 §31의 4번 해설 참조)
294) 정거천은 4선천이다. 그런데 어떻게 초선을 닦은 성자가 이곳에 태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주석서는 “거기에 안주하여(tattha ṭhito) 제4선을 닦은 뒤에 태어난다.”(AA.iii.126)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거기 즉 초선 혹은 아래 문단의 제2선이나 제3선에 안주한 뒤에 다시 제4선을 닦아서 정거천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bhagavato pana sāvako tattha yāvatāyukaṃ ṭhatvā yāvatakaṃ tesaṃ devānaṃ āyuppamāṇaṃ
taṃ sabbaṃ khepetvā tasmiṃyeva bhave parinibbāyati.
그러나 세존의 제자는 그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거기 머물다가 그 기간이 모두 다하면
바로 그 범신천에서<~색구경천에서: *彼有에서 tasmiṃyeva bhave> 반열반에 든다.]
“katamassa,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uddhaṃsotassa akaniṭṭhagāmino.
imassa kho,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비구들이여,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309)에 이르는 사람310)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은 제거하였지만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고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도 제거하지 못했다.
<* 중반열반자(불환자에 속한다) - 死生間(中陰, 中有) 상태에서 해탈하신 분, 間 = 中>
katamassa,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antarāparinibbāyissa. imassa kho,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도 제거하였지만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는가?
비구들이여,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사람312)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도 제거하였지만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다.313)
312)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사람(antarāparinibbāyī)’은 “정거천(淨居天) 가운데 어느 한 곳에 태어나서 수명의 절반 정도 살 때에 열반에 드는 자이다.”(Vis.XXIII.57) 불환자 가운데서 가장 수승한사람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외움 경」2(A3:86) §3의 주해를 참조할 것.
313)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는 불환과를 얻은 사람이므로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제거하였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 태어남도 없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禪을 증득하여 머물고 있다. 그것은 유익함(kusalatta)이기 때문에 재생으로서의 존재의 조건(paccaya)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므로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은 제거하였지만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다고 설한 것이다.”(AA.iii.130~131)
“katamassa,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arahato.
imassa kho,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재생으로서의]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도 제거하였는가?
비구들이여, 아라한인 사람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도 제거하였다.
... pe ...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bhante, anussatiṭṭhānaṃ evaṃ bhāvitaṃ evaṃ bahulīkataṃ
anekadhātupaṭivedhāya saṃvattati.
imāni kho, bhante, pañca anussatiṭṭhānānī”ti.
…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계속해서 생각[*念]함의 장소이니,
이와 같이 닦고 이와 같이 많이 [공부]지으면 여러 가지 요소[*界]를 꿰뚫게 됩니다.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vijjaṃ tena pajahati, na tattha avijjānusayo anusetī”ti.
…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이것으로 그는 무명을 제거합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idhudāyi,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 pe ...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idaṃ kho ahaṃ, udāyi, aniñjitasmiṃ vadāmi.
25. “우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우다이여, 나는 이것을 동요하지 않는 [법]이라고 말한다.”715)
715) 일반적으로 '흔들림 없음' 혹은 '흔들림 없는 경지(āneñja/aniñjita)'는 무색계를 뜻한다. 그런데 본경의 이 문단은 제4선이 '흔들림 없음' 혹은 '흔들림 없는 경지'에 속한다는 경전적 근거가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서 제3권「수낙캇따 경」 (M105) §11의 주해를 참조할 것.
catutthaṃ jhānaṃ samāpannassa assāsapassāsā niruddhā honti;
‘idhāvuso,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 pe ...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ttha upekkhāsukhaṃ nirujjhati, te ca upekkhāsukhaṃ nirodhetvā nirodhetvā viharantī’ti.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四神)에 들어 머뭅니다.
여기서 평온과 행복이 소멸하고, 평온과 행복을 모두 소멸한 그들이 머뭅니다.'라고,
<*희열이 사라진 평온에 의한 행복도 사라진 捨(upekkhā < upa√ikkhati)>
catutthampāhaṃ, bhikkhave, jhānaṃ nissāya āsavānaṃ khayaṃ vadāmi;
비구들이여, 제4선을 의지해서도 번뇌가 다한다고 나는 말한다.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 pe ...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catutthampāhaṃ, bhikkhave, jhānaṃ nissāya āsavānaṃ khayaṃ vadāmī’ti,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물질이건 느낌이건 인식이건 심리현상들이건 알음알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려버린다.
그는 이런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경지로 마음을 향하게 한다.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이것은 모든 형성된 것들[行]이 가라앉음[止]이요,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放棄]이요,
갈애의 소진이요, 탐욕의 빛바램[離慾]이요. 소멸[滅]이요, 열반이다.'라고,
그는 여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번뇌가 다함을 얻는다.
만일 번뇌가 다함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법을 좋아하고 이러한 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정거천에] 화생하여
그곳에서 완전히 열반에 들어 그 세계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을 얻는다.
idha, bhikkhave, bhikkhu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paṭighasaññānaṃ atthaṅgamā
nānattasaññānaṃ amanasikārā ‘ananto ākāso’ti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so yadeva tattha hoti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그는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건 인식이건 심리현상들이건 알음알이건,
그 모든 법들을 무상하다고 괴로움이라고 병이라고 종기라고 화살이라고 재난이라고
질병이라고 남[他]이라고 부서지기 마련인 것이라고 공한 것이라고 무아라고 바르게 관찰한다.
“puna caparaṃ, āvuso,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 pe ...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ttāvatāpi kho, āvuso, sambādhe okāsādhigamo vutto bhagavatā pariyāyena.
tatrāpatthi sambādho. kiñca tattha sambādho?
yadeva tattha rūpasaññā aniruddhā hoti, ayamettha sambādho.
6. “다시 도반이여,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 제4선(四禪)에 들어 머뭅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구속 가운데서도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세존께서는 방편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도 구속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는 무엇이 구속입니까?
여기서는 물질에 대한 인식이 소멸되지 않으면 그것은 구속입니다.”
<*色界을 緣한 色想 cf. sabbaso rūpasaññānaṃ samatikkamā>
[욕계 - dukkhindriya가 존속 <*거친 地(수화풍)大 상황>
초선 - domanassindriya가 존속 dukkhindriya가 제거. <*거친 물질 제거, 미세한 地(수화풍)大 상황>
2선 - sukhindriya가 존속 domanassindriya가 제거. <*미세한 地大가 제거, 미세한 (수화풍)大 상황>
3선 - somanassindriya가 존속 sukhindriya가 제거.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風大 상황>
4선 - upekkhindriya가 존속 somanassindriya가 제거. <*風大가 제거, 色想 존속>
상수멸 - upekkhindriya가 제거.]
10. uppaṭipāṭikasuttaṃ (SN 48.40) 이례적인 순서 경(S48:40)439) Uppaṭipāṭika-sutta
439) “본경은 법의 맛에는 순응하여(yathā-dhamma-rasena paṭipāṭiya) 설해졌지만 이 기능의 분별(Indriya-vibhaṅga)에 속하는 다른 경들처럼 설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례적인「순서 경」 (Uppaṭipāṭika-sutta)이라는 제목을 가졌다고 알아야 한다.”(SA.iii.241)
“즉 본경은 버려야 할 순서(pahāna-kkama)대로 설한 것이지 다른 경들처럼 육체적인 즐거움의 기능부터 시작하는 순서대로 설하지 않았다는 뜻이다.”(SAȚ.iii.198)
♦ 510. “pañcimāni, bhikkhave, indriyāni. katamāni pañca?
dukkhindriyaṃ, domanassindriyaṃ, sukhindriyaṃ, somanassindriyaṃ, upekkhindriyaṃ.
3.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기능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 평온의 기능이다.”
(i)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
idha, bhikkhave, bhikkhuno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dukkhindriyaṃ.
so evaṃ pajānāti —
4.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 때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이 일어난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uppannaṃ kho me idaṃ dukkhindriyaṃ,
tañca kho sanimittaṃ sanidānaṃ sasaṅkhāraṃ sappaccayaṃ.
tañca animittaṃ anidānaṃ asaṅkhāraṃ appaccayaṃ dukkhindriyaṃ uppajjissat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나에게는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이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고 형성됨이 있고 조건이 있다. 440)
근거 없이 이유 없이 형성됨 없이 조건 없이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440)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고 형성됨이 있고 조건이 있다.'는 sanimittaṃ sanidānaṃ sasaṅkhāraṃ sappaccayaṃ을 옮긴 것인데 주석서는 이 넷은 모두 조건[緣]의 동의어(paccaya-vevacana)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i.241)
so dukkhindriyañca pajānāti, dukkhindriyasamudayañca pajānāti, dukkhindriyanirodhañca pajānāti,
ya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tañca pajānāti.
그는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을 꿰뚫어 알고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의 일어남도 꿰뚫어 알고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의 소멸도 꿰뚫어 안다.
그는 일어난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이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지, 그것도 꿰뚫어 안다.
[yaṃ kho, bhikkhave, kāyikaṃ dukkhaṃ, kāyikaṃ asātaṃ,
kāyasamphassajaṃ dukkhaṃ asātaṃ vedayitaṃ — idaṃ vuccati, bhikkhave, dukkhindriyaṃ.
비구들이여, 육체적인 괴로움, 육체적인 편안하지 않음,
몸에 닿아서 생긴 괴롭고 편안하지 않은 느낌 이를 일러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이라 한다.”]
ka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그러면 일어난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441)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일어난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 442)
441)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아래 '(iv)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 의 “일어난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까지는 『청정도론』IV.186에 인용되어 나타난다. 본경에 해당하는 주석서의 설명은 『청정도론』 IV.186 ~ 189와 상응한다. 역자는 아래의 주해에서 중요한 점만을 뽑아서 실었다.
그리고 『청정도론』에서도 『아비담마 길라잡이』 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부터 평온의 기능까지의 다섯을 각각 즐거움, 고통, 기쁨, 불만족, 평온으로 옮겼는데 아래 주해들에서 인용할 때는 모두 정신적 즐거움 등으로 바꾸었음을 밝힌다.
442) “언제 그들을 버리는가? 네 가지 禪들에 근접하는 순간(upacāra-kkhaṇa)에 버린다. 정신적 즐거움은 제4선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 괴로움과 육체적 즐거움은 각각 초선과 제2선과 제3선의 근접순간에 버려진다. …
그런데 왜 오직 그 禪에서 소멸한다고 했는가? … 완전한 소멸(atisaya-nirodha)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선 등에서 완전히 소멸하기 때문이다. 근접의 순간에도 소멸하지만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전향을 가진(nānāvajjana) 초선의 근접에서 비록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이 소멸했다 하더라도 파리와 모기 등에게 물리거나 혹은 불편한 자리로 인한 피로로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본삼매(appanā)에서는 그렇지 않다. 혹은 근접삼매(upacāra)에서 그들이 소멸했다 하더라도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반대의 [기능인 육체적 즐거움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삼매에서는 희열의 충만으로 온몸이 행복에 흠뻑 젖어 있다. 온몸이 행복에 흠뻑 젖어 있는 사람에게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은 완전히 소멸한다. 반대의 [기능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청정도론』 IV.185~187에서 발췌)
ettha cuppannaṃ du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ññāsi dukkhindriyassa nirodhaṃ,
tadatthāya cittaṃ upasaṃharati’”.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는 육체적 괴로움의 소멸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443)라고 한다.”
443) '그는 이러한 상태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는 Ee, Se: tathattāya cittam upasaṃhāsi를 옮긴 것이다. Be에는 tadatthāya …로 나타나고 있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아직 얻지 못한 자(alābhī)는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uppādanatthāya), 이미 얻은 자(lābhī)는 그것을 증득하기 위해서(samāpajjanatthāya) 마음을 향하게 한다는 뜻이다.”(SA.iii.243)
(ii)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
♦ “idha pana, bhikkhave, bhikkhuno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domanassindriyaṃ. so evaṃ pajānāti —
5.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 때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이 일어난다. [214]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uppannaṃ kho me idaṃ domanassindriyaṃ,
tañca kho sanimittaṃ sanidānaṃ sasaṅkhāraṃ sappaccayaṃ.
tañca animittaṃ anidānaṃ asaṅkhāraṃ appaccayaṃ domanassindriyaṃ uppajjissat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
so domanassindriyañca pajānāti, domanassindriyasamudayañca pajānāti,
domanassindriyanirodhañca pajānāti,
yattha cuppannaṃ d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tañca pajānāti.
'나에게는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이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고 형성됨이 있고 조건이 있다.
근거 없이 이유 없이 형성됨 없이 조건 없이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그는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을 꿰뚫어 알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의 일어남도 꿰뚫어 알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의 소멸도 꿰뚫어 안다.
그는 일어난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이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지, 그것도 꿰뚫어 안다.
[* 제2선(二禪)은 身(= 色) 중에서 地大가 존속하지 못하는 세계. 혹은 빅뱅 이전의 세상.
제2선천 이상의 천신들은 신통이 아니면 땅위에 서 있을 수가 없다.
마치 물이 모래 틈 사이로 스며들 듯이.]
kattha cuppannaṃ d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vitakkavicārānaṃ vūpasamā ajjhattaṃ sampasādanaṃ cetaso
ekodibhāvaṃ avitakkaṃ avicāraṃ samādhijaṃ pītisukhaṃ du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그러면 일어난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문다. 일어난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 444)
444) “여러 가지 전향(āvajjana)을 가진 제2선의 근접에서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을 버렸다 하더라도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을 조건으로 몸이 피로하거나 마음이 상할 때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이 일어난다.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을 때 그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 곳에서는 그것은 일어난다. 제2선의 근접에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2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조건이 버려졌기 때문이다.”(『청정도론』 IV.188)
그런데 초선의 정형구에 의하면 초선을 증득하면 이 정신적 괴로움(domanassa)을 포함한 모든 해로운 법[不善法]들이 이미 다 버려졌다. 그러므로 정신적 괴로움이 제2선에서 소멸한다는 것은 이런 사실과 맞추기가 쉽지 않다.
ettha cuppannaṃ d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ññāsi domanassindriyassa nirodhaṃ,
tadatthāya cittaṃ upasaṃharati’”.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는 정신적 괴로움의 소멸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라고 한다.”
(iii)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
♦ “idha pana, bhikkhave, bhikkhuno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sukhindriyaṃ. so evaṃ pajānāti —
6.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 때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이 일어난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uppannaṃ kho me idaṃ sukhindriyaṃ,
tañca kho sanimittaṃ sanidānaṃ sasaṅkhāraṃ sappaccayaṃ.
tañca animittaṃ anidānaṃ asaṅkhāraṃ appaccayaṃ sukhindriyaṃ uppajjissat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so sukhindriyañca pajānāti, sukhindriyasamudayañca pajānāti, sukhindriyanirodhañca pajānāti,
yattha cuppannaṃ su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tañca pajānāti.
'나에게는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이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고 형성됨이 있고 조건이 있다.
근거 없이 이유 없이 형성됨 없이 조건 없이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그는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을 꿰뚫어 알고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의 일어남도 꿰뚫어 알고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의 소멸도 꿰뚫어 안다.
그는 일어난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이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지, 그것도 꿰뚫어 안다.
[*정신적 즐거움(sukhañca kāyena)은 아직 존속하는 제3선]
kattha cuppannaṃ su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pītiyā ca virāgā upekkhako ca viharati
sato ca sampajāno sukhañca kāyena paṭisaṃvedeti
yaṃ taṃ ariyā ācikkhanti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그러면 일어난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문다.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몸으로 행복을 경험하고
또한 이 [禪 때문에]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성자들이 묘사하는
제3선(三神)에 들어 머문다. 일어난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 445)
445) “제3선의 근접(upacāra)에서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을 버렸더라도 희열과 [함께한 마음에서] 생긴 수승한 물질로 충만한 몸을 가진 사람에게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3선에서는 그렇지 않다. 제3선에서는 육체적 즐거움의 조건인 희열이 완전히 소멸했기 때문이다.”(『청정도론』 IV.189)
ettha cuppannaṃ su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ññāsi sukhindriyassa nirodhaṃ,
tadatthāya cittaṃ upasaṃharati’”.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는 육체적 즐거움의 소멸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라고 한다.”
(iv)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
♦ “idha pana, bhikkhave, bhikkhuno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somanassindriyaṃ. so evaṃ pajānāti —
7. “비구들이여, [215] 여기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이 일어난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uppannaṃ kho me idaṃ somanassindriyaṃ,
tañca kho sanimittaṃ sanidānaṃ sasaṅkhāraṃ sappaccayaṃ.
tañca animittaṃ anidānaṃ asaṅkhāraṃ appaccayaṃ somanassindriyaṃ uppajjissat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so somanassindriyañca pajānāti, somanassindriyasamudayañca pajānāti,
somanassindriyanirodhañca pajānāti,
yattha cuppannaṃ s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tañca pajānāti.
'나에게는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이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고 형성됨이 있고 조건이 있다.
근거 없이 이유 없이 형성됨 없이 조건 없이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그는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을 꿰뚫어 알고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의 일어남도 꿰뚫어 알고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의 소멸도 꿰뚫어 안다.
그는 일어난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이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지, 그것도 꿰뚫어 안다.
kattha cuppannaṃ s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sukhassa ca pahānā dukkhassa ca pahānā
pubbeva somanass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ettha cuppannaṃ somanass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그러면 일어난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이 소멸되었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에 들어 머문다.
일어난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은 여기서 남김없이 소멸한다. 446)
446) “마찬가지로 제4선의 근접에서 정신적 즐거움(기쁨, somanassa)의 기능을 버렸더라도 가깝기 때문에, 또 본삼매를 얻은 평온이 없어 완전하게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은]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4선에서는 그렇지 않다.”(『청정도론』 IV.189)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ññāsi somanassindriyassa nirodhaṃ,
tadatthāya cittaṃ upasaṃharati’”.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는 정신적 즐거움의 소멸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라고 한다.”
(v) 평온의 기능
♦ “idha pana, bhikkhave, bhikkhuno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uppajjati upekkhindriyaṃ. so evaṃ pajānāti —
8.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방일하지 않고 근면하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머물 때
평온의 기능이 일어난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uppannaṃ kho me idaṃ upekkhindriyaṃ,
tañca kho sanimittaṃ sanidānaṃ sasaṅkhāraṃ sappaccayaṃ.
tañca animittaṃ anidānaṃ asaṅkhāraṃ appaccayaṃ upekkhindriyaṃ uppajjissatī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i’.
so upekkhindriyañca pajānāti, upekkhindriyasamudayañca pajānāti, upekkhindriyanirodhañca pajānāti,
yattha cuppannaṃ upe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tañca pajānāti.
'나에게는 평온의 기능이 일어났다.
이것은 분명 근거가 있고 이유가 있고 형성됨이 있고 조건이 있다.
근거 없이 이유 없이 형성됨 없이 조건 없이 평온의 기능이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그는 평온의 기능을 꿰뚫어 알고 평온의 기능의 일어남도 꿰뚫어 알고
평온의 기능의 소멸도 꿰뚫어 안다.
그는 일어난 평온의 기능이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지, 그것도 꿰뚫어 안다.
kattha cuppannaṃ upe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idha, bhikkhave, bhikkhu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ṃ upasampajja viharati,
ettha cuppannaṃ upekkhindriyaṃ aparisesaṃ nirujjhati.
그러면 일어난 평온의 기능은 어디서 남김없이 소멸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문다.
여기서 일어난 평온의 기능은 남김없이 소멸한다.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ññāsi upekkhindriyassa nirodhaṃ,
tadatthāya cittaṃ upasaṃharatī’”ti.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비구는 평온의 소멸을 [216] 완전히 이해했다.
그는 이러한 상태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라고 한다.”
dasamaṃ.
첫댓글 색계4선 정리에 감사드립니다. 공부에 많은 도움 됩니다.
atthi cevāyaṃ darathamattā yadidaṃ — imameva kāyaṃ paṭicca saḷāyatanikaṃ jīvitapaccayā’ti.
바로 생명을 조건으로 하고, 이 몸을 의지하는
여섯가지 감각장소와 관련된 번잡함이다.'라고,
imameva kāyaṃ paṭicca saḷāyatanikaṃ
이 身을 緣한 六處. <六處는 舊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