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전통 종교와 그리스도인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것을 알자는 뜻에서 우리의 전통적이고 전래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이가 부쩍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 전래의 것들이나 전통적인 것들을 미신 또는 미신 행위라 하며 금해 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 신앙인들이 이를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1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바오로 6세가 1975년에 반포한 회칙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에는 전통 종교 또는 민간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수세기를 통하여 이루어진 가톨릭 국가나 다른 포교 지역에서 신과 신앙을 찾고자 하는 특수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오랫동안 순수한 것이 못된다고 때로는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표현들을 어디서나 다시 생각해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적절히 선도되고 특히 복음 선교의 방향으로 선도된다면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민간 신앙은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헌신과 영웅적 희생도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성, 섭리, 사랑, 현존 등 하느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감수성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는 보기 드문 인내심, 일상 생활에서 십자가의 의의, 해탈, 귀의심, 신심 등 내적 자세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민중의 종교심이라고 하기보다 민간 신앙 즉 민중의 종교라고 기꺼이 부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도만 잘된다면 이 대중적 신앙심은 오늘의 일반 대중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점차로 하느님과 참된 상봉을 이루게 해줄 것입니다”(48항).
비교적 길게 인용한 위의 글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개별 문화권의 토속 전통 종교나 민간 신앙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 그 지침을 정하여 주는 공식 문헌이라고 판단된다. 그 이전에도 가톨릭 교회는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공포한 일련의 문헌을 통하여 비그리스도교에 대한 교회의 태도라든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진일보한 자세를 내비치기는 했으나, 전통 종교라든지 민간 신앙을 지적하여 이렇게 명확한 자세를 정리한 것은 최초가 아닌가 한다. 또 공의회 폐막과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반포 25주년과 “현대의 복음 선교” 반포 15주년을 기념하여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0년에 반포한 회칙으로서 선교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른 나라와 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파견된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자신들을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은 활동하고 있는 지방의 언어를 습득하고, 주요한 문화재와 친숙해지고 체험으로 그 장점을 발견해야 한다. 이런 것을 알고서야 감추어진 신비를 신빙성 있게 효과적으로 그 백성에게 알려 줄 수 있다”(53항). “…… 전통적 가치의 보존은 성숙한 신앙의 결과이다”(54항).
그 외에도 교황청 타종교위원회는 ‘전통 종교에 대한 사목적 관심’이라는 더욱 최근의 문헌에서 여러 나라의 고유한 사회 문화적인 환경 속에 지역화한 모형으로 존속한 ‘전통 종교’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다.
이상에 소개한 교회 교도권의 최근 문헌들은 그리스도 신앙의 ‘현지(문화) 적응’(inculturation)과 관련하여 각 민족의 문화와 종교가 갖는, 그중에서도 특히 전통 종교 또는 민간 신앙이 가지는 적극적인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경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다양한 전통 문화와 종교를 보존하면서 저마다 문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현대 세계에 교회를 적응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사정도 이러한 세계 교회의 기류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1960년대를 시발점으로 토착화라든가 한국화의 문제가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토착화를 운위하는 교회 내부의 분위기가 한 세대를 경과하고 있지만, 아직도 민간 신앙이나 전통 종교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여전히 전투적이고 오만하기까지 하다. 대표적 민간 신앙인 무속이 한국인의 종교성을 결정하여 오기는 하나, 그것은 바로 수치스러운 과거의 유물로서 하루빨리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부정 일변도의 표정이 역력하다.
이렇듯이 한국 전통 종교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지금의 태도는 외면상으로는 아직까지도 대부분 거부와 배척으로 일관한다. 그것은 첫째, 한국의 종교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부족과, 둘째, 불교와 함께 무속을 배척했던 조선조에서 당시 시대 정신의 제약을 받았던 유학자 출신의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 종교관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비판없이 추종하면서, 셋째, 서구 문화 우월주의에 입각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던 과거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에 주로 기인한다고 보인다. 이들은 민중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전통 종교적인 특성이라고 여겨지는, 현실 도피라든가 기복 행위 따위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부각시키고, 전통 민간 신앙은 한국에서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지금, 가장 먼저 판독되어야 할 시대의 징표는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지니는 다양한 가치의 인정이 아닌가 한다. 그것을 종교 문제에 국한해서 보면, 종교들 사이의 상이성과 저마다의 타당성을 존중해 주는 일에서 시작한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한 바른 믿음(orthodoxie)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지 않고, 지구촌 안에서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구원 사업을, 표현을 달리하면, 하느님의 선교 활동을 지금 여기서 내가 체현(體現)하기 위한 바른 실천(orthopraxis)에 더 많은 힘을 기울이는 일이다.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술은 예수의 인물과 행적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 진술이기 이전에, 일차적으로 예수가 제시하는 비전에서 힘을 얻고 매력을 느껴 그분과 동의하고 동행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언술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 종교에는 자기 부정적인 요소라든가 남을 위한 헌신적인 측면들이 개인적 차원이나 가족의 범위 안에서 꽤 발견되지만, 한 차원 높은 사회 비판 의식이나 개혁 실천적인 면에서는 부족하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는 전통 종교에서 역동적이고 실제적인 살아 있는 종교성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며, 전통 종교는 ‘굿 정신’의 이상적인 모습인 공동체성을 체현(體現)하는 쪽으로 힘을 모아 나아가야 할 터이다. 이렇게 될 때 현하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 종교는 상호간에 지평의 확대와 융합을 하게 된다. 이렇게 만나는 종교에는 상대방을 흡수 · 병탄하는 파괴적 개종의 강요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비옥화한 종교성의 심화가 이루어지리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사회 의식, 역사 의식, 예언자적 사명을 깨우치고 올바로 실천해야 할 근본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당면 과제는 이러한 올바른 실천을 거교회적 관심으로 의식화하고 대중화하는 일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다종교 상황에 놓여 있다. 여기 오늘 이땅에 사는 종교인들한테 특별한 과제가 주어졌다고 본다. 종교인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각 종교 · 종파의 풍부한 유산과 활력을 가지고 누리와 겨레의 해방에 공헌해야 하며, 나아가 하나의 거대한 도시로 변하고 있는 세계 즉 지구시(地球市) 라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의 새로운 원리를 찾아내야 한다. 각각의 종교는 상호 선교의 주체로서 자기 전통과 정체를 보존하는 동시에, 자신을 피선교의 대상으로 내어 놓음으로써 각자의 성스러움을 더욱 심화하여 세계 평화를 위해 효과적으로 공헌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통 종교를 보는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성급하게 원시적 미신으로, 우상 숭배로, 사회 근대화와 발전의 장애물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막연하게 호감을 나타내어, 전통 종교야말로 한국 종교의 모태(母胎)라든지, 종교 심성의 기반이라고 하는 등 무조건 찬양 일변도의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민간 종교성의 기능과 공헌을 제대로 평가하는 한편, 민간 서민에 국한되는 계층성이나 피지배층의 종교성 대변이라는 한계 또는 역기능을 균형 있게 보는 태도가 요구된다. 민중 종교의 강한 역동성, 그 내적인 폭발력은 고등 종교의 예언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의식과 조우할 때에 물신주의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한국 문화와 분리할 수 없는 무속 · 불교 · 유교의 … (신앙 내용과)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바라다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말씀의 씨를 기쁨과 경이를 가지고 발견하도록 노력”하려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이상과 같은 자세는 하나의 역사, 특정한 문화로 제한되지 않는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인류 정신사에 나타난 제종교들이 같은 하느님의 다양한 현현(顯現)임을 살펴서, 나의 신앙 체험을 재조명하고 심화하는 일이라 보기 때문이다.
* 박일영 요한 교수는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교에서 종교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강대와 성심여대를 거쳐 지금은 대구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있고 한국종교학회 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5년 1월호, 박일영 요한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