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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창간 15주년을 맞아 응원하는 릴레이 기고를 시작합니다. 글과 인터뷰, 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여기>가 첫 마음을 잃지 않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론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전기가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귀족들이나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었을까? 거대한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언론의 세계에서 인터넷 언론의 탄생은 그야말로 힘없는 시민들에게 힘을 가져다주는 빛이었다.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이 등장하고 뒤이어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인터넷 언론이 등장하자 대자본 중심의 언론계 지형을 흔들어 주었다.
우리 가톨릭에서도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런 생각도 하기 전에 어느 날 갑자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등장했다. 놀랍게도!
산실의 주역은 우리신학연구소다. 말 그대로 신학연구소지만, ‘우리 신학’을 일구어 내려는 지향을 가진 연구소이니 ‘지금 여기 세상’에서의 일에 바탕을 두어야 하므로 대중운동의 일환으로 인터넷 언론을 선택한 일은 어떻게 보면 늦은 감은 있지만 모두가 놀라워하고 반가워하며 환호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작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그 당시 우리신학연구소 네 개의 방 중에서 하나를 따로 배정하여 한상봉 씨를 편집인으로 선정하고, 처음 시작하였을 때는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카페로 등록하였다. 한상봉 씨의 독특하고 유능하고 놀라운 재능으로 카페는 순식간에 관심을 끌면서 독립 사이트, 즉 현재의 <지금여기> 모양새로 거듭나고 나날이 발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빠른 시일에 주목받는 인터넷 언론으로 성장한 이유가 무얼까?
부산교구에서 생태학습관이라는 시설을 만들었고, 직무상 건설을 담당하던 나는 <가톨릭신문>과 <가톨릭평화신문•방송>에 홍보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두 신문사 기자들을 초청하여 시설을 보여 주고 인터뷰를 하였다. 그중에 <평화신문> 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인터넷 언론 <지금여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인데 기자가 묻는 말이, <지금여기>의 필진들을 대체 어디서 발견하고 섭외를 하였나? 그런 훌륭한 필진들을 우리는 알지 못했기에 묻는 말이었다.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기자님은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진 30여 명의 평신도 신학자들에 대해 그 면면을 알고 있느냐? 기자의 답은 짐작한 대로 묵묵부답.... 기존 가톨릭 언론사들이 한국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한 연구소가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을 뿐 아니라 접촉도 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지금여기>의 카페 시절에 독자들이 놀라워하고 환호한 이유 역시 무엇보다 필진들의 진지한 자세, 훌륭한 필력, 쉽게 풀어주는 솜씨, 교회의 문제를 보는 시각을 한 단계 높여 주는 정보 제공 등등에 있었다. 도대체 이런 훌륭한 필진들이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등장했을까? 그 이유는, 기존의 교계 언론들에서는 상대해 주지 않는 사람들, 즉 평신도 신학자들이기에 그들이 몰랐을 뿐, 열심히 연구하고 일하던 사람들이라는 답뿐이다.
사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는 데에 우리 한국 교회의 문제점과 한계점이 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우리신학연구소는 오랜 기간 여러 교구와 수도회들을 위한 연구 작업과 컨설팅 의뢰를 통해 한국 교회를 위한 일들을 많이 해 왔다. 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15주년을 넘겼다. 주간과 월간뿐인 한국 교회의 언론 지형에서 드디어 일간이 만들어진 셈이고, 더구나 15년을 이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우리신학연구소’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를 모른다는 이 현실이 안타깝다.
나도 초창기 필진 중의 한 사람이다. 2008년부터 수년 동안 장례이야기 시리즈, 전례이야기 등등 칼럼을 많이 써 왔다. 그러나 한 번도 원고료를 받은 적이 없다. 나만 그러지 않고 대부분의 필진이 그랬다. 원고료를 지불하면 운영이 어려운 이 열악한 언론매체가 <지금여기>다. 열정을 가진 자는 배고프다 하여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다. 반대로 배고프면 저항하기에 교회 쇄신을 주장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지키기 위해 순교할 각오로 일하며 산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 아닐까!
<한겨레>가 시민들의 모금으로 시작한 신문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 독재정권에 저항하고자 그 당시 뜻있는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주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또는 가장 공정한 신문으로 선정된 이력이 매우 많다. 독자들은 당연히 구독으로 그의 노력과 헌신에 답해 주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어느 가난한 신학연구소, 평신도들이 만든 언론매체다. 교회 쇄신을 위하고 신자들의 신앙의 깊이를 더해 주려는 노력에 매진하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일간지인 셈이지만 늘 가난한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어떻게 답해야 할까? 독자 한 사람인 나는 후원금으로 답한다. 좋은 기사와 훌륭한 글들로 나를 채워 주는 언론에게 작으나마 나의 후원금을 보탬으로써 <지금여기>가 유지하도록 격려하고 더 나아가서는 확장할 수 있도록 응원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욕심을 내어 본다면 주변에 <지금여기>를 소개하고 함께하도록 홍보해 주는 일도 매우 필요하다. 후원자 숫자가 지금보다 몇 배로 늘어나야 비로소 기자들에게도 월급다운 월급을 주고 필진들에게도 소액이지만 원고료를 지불할 수 있다. 양이 질을 만드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는 대차대조표를 기대해 보고 싶다.
이런 일들을 교회 당국이 담당해야 하건만 평신도들이 만든 가난한 신학연구소와 인터넷 언론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정 넘치게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있으니 신부인 나는 부끄럽고 부끄러울 때가 참 많다. 몇 년 전에 광주교구 정형달 신부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우리신학연구소에 많은 돈을 기탁하셨다. 그러면서 후배 신부들에게 당부하셨다. 평신도들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신학연구소가 우리 한국 교회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지 않으냐. 부디 신부들이 앞서서 관심가지고 돕자. 그 말씀처럼 신부들이 돕는 건 당연하지만 나는 또 이렇게 말하고 싶다. 평신도가 평신도를 돕지 않으면 누가 도우랴?
조욱종 신부
부산교구 은퇴 사제. 오랜 시간 노동사목과 농촌•환경사목, 대학생과 청년사목을 담당하였고, 은퇴하여 그늘진 곳에서 살고자 오지에서의 삶을 지향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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