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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오랜 역사를 가진 한자는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의 발전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한자의 최초 모습은 기원전 약 1,3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상商(또는 은殷)나라의 갑골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갑골문은 시기적으로 가장 빨리 문자의 형태를 갖춘 한자의 모습이다. 갑골문에 이어 청동기 물에 글자를 새기는 금문(金文), 즉 종정문(鐘鼎文)이 유행하는데 서주(西周) 시기는 청동기 금문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금문 이후로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 전국문자(戰國文字)가 등장하는데, 전국문자는 다시 진(秦)나라 문자인 대전(大篆, 주문(籒文)으로도 불림)과 진나라 외 여섯 나라에서 사용된 '육국문자(六國文字)'가 있었다. 이러한 문자의 난립은 결국 진시황의 문자통일 정책에 의해 소전(小篆)으로 통일된다. 이후로 한자는 전 지역을 관철하는 획일적 문자사용의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문자 통일은 곧 중국을 하나로 묶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다. 오늘날 '한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한(漢)대에는 예서(隸書)가 새롭게 유행하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한자는 한층 정형화된 해서(楷書)로 발전하여 당대에 들어서면 한자의 자형과 서체의 표준화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한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형화되지 않고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한자의 개혁방안을 마련하여 기존 한자의 획을 줄이는 방식의 간체자인 간화자(簡化字)를 만들어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 예가 되며, 근래 디지털 시대의 환경을 고려한 다양한 컴퓨터 자형의 개발 역시 예외가 아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등장한 다양한 글자체는 서법의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다. 각 시대를 대변하는 한자는 예술적 아름다움을 강구하며 일정한 서체로 정착하였고, 이러한 서체에 대한 탐구는 한자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1) 갑골문
갑골은 거북이의 등껍질인 귀갑(龜甲)과 동물의 뼈인 수골(獸骨)에 새긴 글자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의 기록이다. 상나라 후기 왕실에서 점을 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해 '점복(占卜) 문자'라고도 한다. 그러나 갑골문이 문자로 확인된 것은 불과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1899년 금석학자 왕의영(王懿榮)이 당시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샤오둔촌(小屯村)에서 약재로 공급되던 용골(龍骨)에 새겨진 글씨를 발견하고 친구 유악(劉顎)과 함께 갑골편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수천 년의 비밀을 간직한 채 땅속에 묻혀 있던 갑골의 발견은 그야말로 신화의 시대를 역사의 사실로 바꿔 놓은 세기적 사건이었다. 이후 대대적인 발굴작업이 진행되어 허난성 안양의 은허(殷墟) 유적지에서 10만여 편에 이르는 갑골편이 발견되었다. 고증 결과 3,000년 전 상나라의 왕실에서 행해졌던 점복 행위를 기록한 문자로 알려지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현재 발견된 15만 편의 갑골을 통해 4,500여 글자가 확인되고 있으며, 그 중 1,800여 자가 판독되어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고 있다. 갑골에는 정치·사회·문화·군사 등의 분야에서 천문·의학·역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생생한 역사를 실감케한다.
필사(筆寫)의 측면에서 보면 갑골 서체의 특징은 귀갑이나 수골에 칼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직선과 절선이 많으며 필체가 가늘다. 그리고 글자가 고정되지 않아 한 글자에 여러 가지 모양이 있다. 갑골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문자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서체에 대한 예술적 조명도 잇달았다. 그중에서도 고고학자 둥쭤빈(董作賓, 1895~1963)과 작가이자 고문자 학자인 궈모뤄(郭沫若, 1892~1978)는 갑골문 연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꼽힌다.
鼠(쥐 서) | 牛(소 우) | 虎(범 호) | 兔(토끼 토) | 龍(용 룡) | 蛇(뱀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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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말 마) | 羊(양 양) | 猴(원숭이 후) | 鷄(닭 계) | 犬(개 견) | 猪(돼지 저) |
금문, 대우정(大盂鼎) 부분대우정 안의 명문은 19줄에 291자가 적혀 있다. 주나라의 강왕(康王)이 귀족인 우(盂)에게 칙서를 내려 왕조의 송덕을 기릴 것을 훈계하며 함께 하사한 물품을 솥에 모두 기록하고 있다.
(2) 금문
금문(金文)은 상·주(商周)시대 청동기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로, 당시 청동 제기를 대표하는 것이 '정(鼎)'1)이고, 청동 악기를 대표하는 것이 '종(鐘)'이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한다. 상·주시대는 청동기의 전성시대로 청동기물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가 되면 청동기물에 글을 새기는 명문(銘文)의 편 폭도 길어지고 내용도 풍부해진다. 대표적인 금문 중 하나인 모공정(毛公鼎)에는 무려 497자가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다양한 생활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금문은 대개 장식으로 사용되는 특징상 선조와 제왕의 송덕 및 관직의 임명과 공적을 기리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무왕(武王)의 상나라 정벌 같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것도 있어 사회 변화를 조감할 수 있다. 청동 금문은 먼저 흙으로 빚은 틀에 필사체로 새기고 이 틀에 금속을 녹여 부어서 주조했기 때문에 서체가 굵은 것이 특징이며 필획의 기세가 장엄하고 기품이 있다.
소전 「역산각석(嶧山刻石)」 부분진시황 28년에 진시황이 역산에 올라 자신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비석을 세웠다. 높이 190㎝, 너비 48㎝의 비석에는 소전체로 모두 222자가 새겨져 있다.
(3) 소전
소전(小篆)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 문자로, 통일 전 진나라의 문자인 대전의 자형을 간략하게 하여 만들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승상 이사(李斯)를 시켜 소전을 만들게하고, 그 외의 다른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문자를 통일했다. 진시황의 문자통일령으로 탄생한 소전은 형체가 가지런하고 규격화되어 있어 글자를 쓰기에 대전보다 용이하였다. 당시 진시황은 "문장은 같은 글로 쓰고, 수레는 동일한 바퀴로 한다(書同文, 車同軌)."라는 문자와 도량형 통일 정책을 강제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소전은 육국의 문자를 소멸시키고 예서가 나타나는 전한(前漢) 말까지 줄곧 사용되었다.
소전의 자형은 형체가 길쭉하고 둥글면서 균등하게 배열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자체가 지니는 아름다움 때문에 후세의 서법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필획이 복잡하고 형태의 변화가 심해 위조 방지에 적합하여 도장의 서체로도 널리 활용되었다.
예서 「조전비」 부분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산시성(陝西省) 합양(郃陽)에서 출토된 후한 때 비석이다. 장방형의 비석 양면에 예서로 조전의 공덕을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으며, 예서를 익히는 표본으로 통한다.
(4) 예서
예서(隸書)는 한나라 때 통용된 서체로 하급관리인 '예인(隸人)'이 행정의 효율을 기하기 위해 속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글자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바로는 진나라 말 옥사를 관리하는 정막(程邈)이 대전에 근거하여 복잡한 부분을 삭제하고 수정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소전이 진나라의 공식적인 서체였다면, 예서는 실용적으로 사용되다가 후한 때 이르러 본격적으로 유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예서가 다른말로 '팔분체(八分體)'라고 불리는 것처럼 두 글자체가 병합되는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자의 발전 과정에서 예서의 등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서는 이전의 둥글고 곡선 위주의 상형적 형태를 벗어나 직선 위주의 실용적 서사 방식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이는 종이의 발명 등 서사도구의 혁신과 학교의 설립 및 문사의 양성으로 지식 보급이 확산된 데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서의 특징은 횡으로는 길고 수직으로는 짧은 장방형꼴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다. 둥근 필획을 직선으로 펼쳐 한층 필사에 유리하게 하였으면서도 여전히 일부분 둥근곡선의 느낌이 남아 있어 예서가 주는 장중하면서 날렵한기세 때문에 후세 서법가들의 표본이 되었다. 특히 「조전비(曹全碑)」, 「을영비(乙瑛碑)」, 「장천비(張遷碑)」 등의 한대 비각은 예서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5) 해서, 초서, 행서
해서(楷書)는 예서에서 변화 발전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에 확립된 서체로 예서보다 단정하고 필법이 법도가 있어 이를 '진서(眞書)' 혹은 '정서(正書)'라고도 한다. '해서'라는 명칭 속에 본보기가 되는 단정한 글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쓰는 한자체의 표준이 되는 서체이다. 해서로 이름을 날린 서법가로는 「구성궁예천명(九成宫醴泉銘)」으로 유명한 당의 구양순(歐陽詢)을 비롯해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 그리고 원(元)의 조맹부(趙孟頫) 등이 있다.
한편, 초서(草書)는 빠른 필사를 위해 만들어진 서체에 속한다. 자형이 간소하고 필획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특징이 있다. 허신이 "한나라가 흥함에 초서가 있었다(漢興有草書)."라고 말한 것처럼 한대 초기부터 필사의 편리를 위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예서를 간소하게 흘려 쓴 장초(章草)를 사용하다가 후한 말의 장지(張芝)와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에 전수되어 새로운 필법으로 탄생하여 금초(今草)로 불리게 되었고, 당대에 이르면 한층 대담하게 변모하여 광초(狂草)가 생겨나는데 특히 장욱(張旭)의 광초가 유명하다. 변화가 많고 활발한 필체의 특징 탓에 시가(詩歌)의 필법으로 즐겨 애용되었다.
행서(行書)는 해서와 초서의 중간에 해당하는 서체이다. 필사 속도가 느린 해서와 식별이 난해한 초서의 단점을 절충해 필사를 위주로 만든 행서는 필획의 연결이 자연스럽고 쓰기에 편리하면서 초서만큼 알아보기 어렵지 않아, 개인의 문서와 서신 등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불후의 명작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를 대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갑골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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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 | ||||
소전 | ||||
예서 | ||||
해서 | ||||
초서 | ||||
행서 |
(6) 간화자
현재 중국에서는 기존의 한자가 획수가 많고 익히거나 기억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획수를 대폭 축소해 만든 이른바 간체자라 부르는 '간화자(簡化字)'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다. 중국 정부는 1949년 건국과 동시에 문자개혁위원회를 만들어 한자의 획수를 간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1956년에는 간화자 517자 및 간화편방(簡化偏旁) 54개를 정식으로 공표하였다. 이어 1964년에 「간화자총표(簡話字總表)」를 공표함으로써 공식문자로 채택하여 그 사용을 강제화하였다.
간화자의 사용은 문맹률을 낮추고 공민교육을 향상시키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실효를 거두었다. 마치 진시황의 문자 통일을 연상시키는 문자개혁은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있지만, 오늘날 간체의 편리함 이면에는 기존 한자의 정자인 번체자(繁體字)로 기록된 고대 전적을 해독하지 못한다거나 같은 한자문화권인 한국, 일본, 홍콩, 타이완 등과 동일한 문자를 두고 혼란이 빚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편, 중국에서는 디지털 시대의 환경에 맞추어 사용 한자를 제한하여 통일적인 전자망 구축에 힘쓰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공문서와 호적정리 등의 현실적 필요성에 따라 2000년에 새로운 한자코드의 국가표준안인 'GB 18030' 프로그램을 컴퓨터 제품에 일률적으로 장착하도록 법제화하였다. 현재 이 프로그램에 수록된 한자 수는 27,533자로 이 범위 내의 한자를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간체자 구성 원리
1. 원래 글자의 윤곽은 보존한다.
2. 원래 글자의 일부 특징은 보존하고 기타 부분을 생략한다.
3. 비교적 간략한 필획의 편방으로 교체한다.
4. 형성자에서는 간단한 성부(聲部)를 사용한다.
5. 서로 통용되는 글자는 간편한 글자로 통일시킨다.
6. 초서(草書)를 해서(楷書)화 한다.
7. 미적인 부분을 고려하여 번체화 된 글자는 고대의 상형, 지사, 회의자를 사용한다.
8. 간단한 부호로 복잡한 편방을 대체한다.
9. 고자(古字)를 차용한다.
번체자 | 간체자 | 번체자 | 간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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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 | 户 | 見 | 见 |
訁 | 讠 | 貝 | 贝 |
車 | 车 | 釒 | 钅 |
長 | 长 | 門 | 门 |
靑 | 青 | 韋 | 韦 |
頁 | 页 | 風 | 风 |
飛 | 飞 | 飠 | 饣 |
馬 | 马 | 魚 | 鱼 |
鳥 | 鸟 | 麥 | 麦 |
黃 | 黄 | 齊 | 齐 |
齒 | 齿 | 龍 | 龙 |
龜 | 龟 | 豐 | 丰 |
[네이버 지식백과] 한자의 변천과 발전 (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2011. 9. 7., 다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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